그렇다면 유희춘의 일기에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그의 부인입니다. 부인의 이름은 홍주 송 씨 집안의 송종개(宋鍾介, 1521~1578)입니다. 그녀의 호가 덕봉(德峯)이라 송덕봉으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양반가문의 여성은 이름이 있으되 기록된 경우가 거의 없고 주로 성씨로 불리거나 이름 대신 호나 당호로 불렸는데 번듯하게 송종개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여인 중 한 명입니다.
『미암일기』에는 부부가 비록 떨어져 산 날이 더 많았지만 서로 시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리워하고, 학문적 조언을 해주며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매우 이상적인 부부관계로 보입니다. 또한 집안 대소사를 의논하는 일,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일, 자신이 없는 집안의 모든 일을 건사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 등이 일기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17세기 후반 이후 가부장적 윤리가 정착되면 더 이상 사대부의 일기에 여성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성은 혼인, 질병, 사망 등의 기사에만 잠깐 등장할 뿐 철저히 집안 내부의 일에 국한되는 것에 비한다면 미암의 일기 속 덕봉은 남편의 진정한 인생 동반자라 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덕봉 송종개는 『덕봉집(德峯集)』이라는 문집을 남길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고 당대에 이미 여사(女士)로도 꽤나 이름이 알려졌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문집은 지금 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그녀의 시문들은 남편인 유희춘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남아 있는 유희춘의 일기 11권 중 한 권에 덕봉의 한시 25수와 <답미암(答眉巖)><착석문(斲石文)>등 2편의 편지글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가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네
부인의 몸으로 만 리 길을 어이 왔는고
삼종의 의리 무겁고 이 한 몸 가벼워서지
‘마천령 위에서(磨天嶺上吟)’라는 위 시는 덕봉이 1560년 시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 남편을 만나기 위해 함경도 종성 유배지로 가다가 마천령에서 읊은 것입니다. 마천령은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사이 도계에 있는 고개로 725m에 이르는 험준한 고개입니다.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었다’ 거나 ‘마음을 감동시키고 시어도 매우 뛰어나다’는 시평을 얻으며 그녀의 시 중 가장 널리 후대에 알려진 시입니다. 부녀자의 도를 읊고 있는 이 시가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특별히 눈에 뜨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1570년(선조 3) 유희춘이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어 한양에서 4개월째 홀로 관직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라는 시를 지어 부인 덕봉에게 보냅니다. 그러자 덕봉은 곧바로 화답시를 지어 보냅니다.
원공이라 자처하며 물욕 없다 하시더니
어찌하여 오경까지 잠 못 이뤄하시나요.
비록 옥당 금마도 즐겁기는 하겠지만
가을바람에 뜻대로 돌아옴만 같겠습니까.
덕봉은 벼슬살이도 즐겁지만 가을에는 사직하고 돌아와 고향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남편에게 권유합니다. 미암은 얼마 뒤 또다시 덕봉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데, 3,4개월 동안 일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당신은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자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덕봉은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냅니다.
엎드려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 또 중심이 정해지면 물욕이 가리기 어려운 것이니 자연 잡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가 보은 하기를 바라시오. (중략)
나는 옛날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은 만 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소. 그래서 나는 지성으로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면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하였소.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 리의 길을 나서서 멀리 험난한 길을 갔는데 이것을 누가 모르겠소, 내가 당신한테 한 이런 지성스러운 일이 바로 잊기 어려운 일이오. 당신이 몇 달 동안 독숙한 공을 내가 한 몇 가지 일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소. (중략)
구구절절 옳을 뿐 아니라 논리 정연하게 따져 묻는 덕봉의 편지를 읽고 미암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일기에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라고 쓰며 순순히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합니다. 대학자의 이런 유연한 면모라니요!
덕봉의 또 다른 편지글은 그다음 해(1571)에 작성된 <斲石文>입니다. ‘斲石’이란 무덤 앞에 돌을 깎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덕봉은 자신의 부모의 묘소에 석물을 세워 효를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좋은 돌을 채취해 담양까지 끌어다 놓기는 했는데 인력이 부족하여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암이 전라감사로 부임하자 덕봉은 석물의 마지막 작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미암은 “반드시 사비를 들여 이루도록 해야 하오.”라고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이에 덕봉은 미암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비석을 세우고 싶지만 이루지 못하는 애통한 심정을 호소하는가 하면, 평소 아버지가 사위 미암에게 베푼 은혜와 정다웠던 두 사람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설득합니다. 또 친정 형제들의 형편이 넉넉지 않아 똑같이 거두어들여 일을 진행할 수 없음도 설명합니다.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을 만큼 자신도 며느리로서의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덕봉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움직인 미암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 석물 일을 시작하도록 합니다. 그의 일기에는 ‘부인이 편지로 담양의 석물을 늦추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극진하게 설명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미암은 석수(石手) 2명과 일을 돕는 승려 10명을 보내 비석을 깎도록 하되, 아침, 저녁은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고 점심은 덕봉의 친척들로 하여금 날마다 쌀 10말씩을 내서 해주도록 합니다. 기계, 숫돌, 반찬거리, 품삯 등은 미암이 따로 보내주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한 달 만에 덕봉은 부모의 무덤 앞에 오랜 염원이던 비석을 세우고 음식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현명하고도 격조 있게 가정 일을 처리하는 부부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이렇게 작성된 덕봉의 <답미암(答眉巖)>과 <斲石文>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 전기 여성의 산문일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여성들의 당당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덕봉 송종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4대 여류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미암일기』에는 유희춘의 부인 외에도 수많은 흥미로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학 저서로 한중일 삼국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동의보감(東醫寶鑑, 1596~1610)』의 저자 허준(許浚, 1539~1615)은 유희춘의 일기에 38회나 거론됩니다. 유희춘은 자신의 집안에 드나들며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살펴주던 허준의 의술이 뛰어남을 알아보고, 1569년 내의원에 천거합니다.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천거, 등용케 한 유희춘의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들 『동의보감』의 탄생은 애초부터 가능치 않았을 것입니다.
『미암일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유희춘의 며느리 김 씨가 있습니다. 미암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었는데, 첫째 아들 유경렴은 김 씨에 장가를 든 후 처가로 가서 살았고 며느리 김 씨가 시집살이를 한 것은 유희춘 말년 불과 몇 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다른 가족들에 비해 크게 언급되는 일은 없지만 며느리 김 씨가 미암의 집으로 시집을 온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며느리 김 씨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의 셋째 딸입니다. 김인후는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로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따르면, ‘인품이 높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스스로 터득함이 있었으나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고 합니다. 김인후는 호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18 선정(先正) 중 한 분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위패를 모신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은 2019년 우리나라 9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정되어 세계문화유산이 된 바 있습니다. 허균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미암과 하서의 인연을 이렇게 썼습니다.
김인후가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그가 전염병에 걸려 위독했으나 사람들은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은 당시 성균관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를 애석히 여겨 자기 집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김인후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뒷날 미암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게 되었을 때 하나 있는 자식이 매우 어리석었다. 김인후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온 집안이 찬성하지 않았지만 끝내 듣지
않고 혼인을 치르니 사람들이 미암과 하서를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또 하서 김인후의 시문집인 『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에는 하서가 유배지로 인사 가는 미암의 아들 유경렴 편에 보낸 시가 미암의 화답시와 함께 전해집니다.
아름다운 벗 미암이여
어이해 그립게 만드는가
언제쯤 한 자리에 어울려
책 펴고 깊이 공부해 볼까나 (하서)
북쪽 변경이라 묻는 이 없건만
하서만이 나를 생각해주누나
새로 지은 삼백 자의 시로
먼 곳까지 자세히 말해주네 (미암)
미암의 종성 유배기간까지 여러 편의 시와 편지로 이어진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은 안타깝게도 재회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미암이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인 1560년 하서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서 김인후의 이름을 『미암일기』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었겠지요.
9개 서원 중 하나로 선정되어 세계유산이 된 전남 장성군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지요.
미암은 1575년 대사헌의 벼슬을 그만두고 한양에서 내려와 담양 인근 창평 수국리에 집을 지었습니다.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잠시 나아갈 때를 제외하고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한가로운 노후를 보냈지요. 그리고 사후에는 이곳에서 가까운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묻혔습니다. 그의 무덤 오른편에는 미암이 세상을 뜬 지 불과 8개월 만에 58세를 일기로 더럭 생을 마감한 덕봉의 무덤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습니다. 지음(知音)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을까요?
그런데 미암 부부 무덤 아래에 부부의 무덤에 비해 조촐해 보이는 작은 무덤 한 기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미암의 첩, 방굿덕(房㖌德)의 무덤입니다. 첩의 무덤이 선산에 함께 모셔져 있는 경우는 드문데, 전해오는 바로는 “내가 죽으면 영감 곁에 묻어서 제사 지내고 남은 퇴주라도 부어줄 수 있게 해 주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 <미암일기>에 등장하는 내로라하는 수많은 인물 중 미암의 첩, 방굿덕에 유난히 마음이 갑니다. 죽어서라도 지아비 곁에 있고 싶었던 방굿덕, 그녀는 일기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방굿덕은 본래 미암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이구(李懼)의 여종이었는데, 미암이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그의 첩으로 들어가 해성, 해복, 해명, 해귀, 네 딸을 낳았습니다. 미암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방굿덕은 아이들을 데리고 해남으로 내려가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비록 적지만 나름 재산(집, 논)도 소유하고 있었고 미암에게 ‘일무, 순지, 부용’ 등 세 명의 여종을 증여받아서 노비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덕봉이 방굿덕과 그녀의 딸들에게 매우 후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덕봉의 소유인 여종, 부용을 허락 없이 방굿덕에게 준 일로 미암 부부는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여종이 없기 때문에 순지를 첩에게 줬다. 일찍이 일무가 있었으나 이제는 서울의 정홍의 첩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밥 짓고 물 기를 사람이 없어서 아주 가련하여 주었다. (1569.11.1.)
첩이 자식만 있고 여종이 없는 것이 불쌍해서 어제 부용을 주고 오늘 부인에게 알렸다. (1569. 11.20)
방굿덕은 미암이 본가인 해남에 올 때마다 딸들을 데리고 찾아가 의복 수발, 빨래, 청소, 음식 장만, 잠자리 돌보기 등 각종 시중을 들었고 미암은 방굿덕을 ‘시자(侍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학문적 동지로서, 인생의 동반자였던 부인 덕봉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방굿덕에 대해서는 ‘불쌍’, ‘가련’과 같은 표현이 주로 사용됩니다. 네 명의 서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서녀들을 속량 시키기 위해 말을 바치며 간청하는 모습, 좋은 짝과 혼인시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 등은 여느 부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첩은 엄연히 비천한 신분이었기에 방굿덕은 제 목소리를 낼 수도, 원하는 것을 당당히 요구할 수도 없는 처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도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있었을 것이고 지아비 역시 정을 나누고 자신의 자식을 낳고 산 여인에게 어찌 연민의 마음 한 구석이 없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기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방굿덕의 삶이기에 애잔함은 한층 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