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올리다
골프가 대중화하면서 ‘골린이’와 함께 널리 퍼지고 있는 레토릭 가운데 하나가 ‘머리(를) 올리다’라는 레토릭이다. 포털사이트에서 ‘머리를 올리다’를 검색하면 젊은 여성부터 중년 남성까지 ‘머리를 올리다’라는 표현을 쓴 글들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심지어 두 단어 모두 사용해 ‘골린이 머리 올리다’라고 쓴 블로그 제목도 보인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이 쓰는 소셜미디어인 인스타그램에서 ‘#머리올린날’로 검색되는 게시물만 해도 1.6만 건. 사진을 보면 실제로 2, 30대 여성들로 보이는 이들이 올린 것이 대부분이다.
‘머리 올리다’라는 표현은 수사학에서 환유법(metonymy)으로 볼 수 있다. 환유법은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대체하는 수사법으로, “하나의 관념을 연상시키는 그 무엇이 그 관념의 표시를 위해서 사용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를 들면 술 마시는 것을 ‘한잔하다’라고 표현하거나, 대통령을 ‘청와대’로 갈음하는 것, 십자가와 초승달로써 각각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것 등이다.
도대체 ‘머리(를) 올리다’는 무슨 뜻이며, 언제, 어디서부터 온 레토릭일일까?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머리(를) 올리다’는 ‘머리를 얹다’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관용구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여자의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엇바꾸어 양쪽 귀 뒤로 돌려서 이마 위쪽에 한데 틀어 얹다.
2. 어린 기생이 정식으로 기생이 되어 머리를 쪽 찌다.
3. 여자가 시집을 가다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용례를 보자.
“용모가 아름답다거나 그렇지 못하다거나 그런 점에선 별 흥미가 없지만 머리를 올린 것을 봐서는 분명 처녀는 아닐 터인데….”≪박경리, 토지≫
“아무리 천한 기생이라 하나 머리를 얹어 주는 첫 서방만은 중매가 있어야 하고 친구들 청해서 잔치를 해야 하고….”≪박종화, 임진왜란≫
“머리 얹어 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 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정만은 그분에게 바치고 싶었다.”
요컨대 ‘머리(를) 올리다’는 표현은 (나이 어린) 여성이 ‘신상(身上)의 변화’가 생겨 머리 모양을 특정 헤어스타일로 바꾼 것을 이르는 말이다. 용례로 보아 그 ‘변화’는 여염집 처자에게는 결혼일 수도 있고, 기생에게는 첫날밤이 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의미가 내포된 건 분명하다.
환유법은 공간적 인접성이나(대통령-청와대), 논리적 인과관계(뛰어난 ‘두뇌’-머리가 좋은 사람), 상징성(십자가)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그렇다면 ‘머리를 올리다’와 ‘골프장에서의 첫 라운딩’은 도대체 어디서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걸까. 이것을 환유라고 한다면, 여자가 시집가는 것과 어린 기생이 첫경험을 하는 것을 골프장에서의 공간적 경험으로 치환하는 상호인접성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교 대상인 두 행위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골프 치는 것과 머리를 올리는 것 사이에는 술잔으로 술 마시는 행위를 대체하는, “우리 한잔하자” 같은 의미의 인접성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다.
‘처음’, ‘첫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그렇다면 골프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 말이 널리 쓰여야 하지 않았을까? 왜 하필 골프에만 이 레토릭이 사용돼왔을까? 결국, 남는 것은 성적인 알레고리밖에 없다. 특히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머리를 올리다’(머리를 얹다)와 관련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남성중심적 사동 표현인 ‘머리를 얹히다’가 나란히 관용구로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머리(를) 얹히다
1. 어린 기생과 관계를 맺어 그 머리를 얹어 주다. (용례: “기생 머리 얹히는 것도 한량들 간에는 구실의 하나가 될 수 있어….”≪한무숙, 유수암≫
2. 처녀를 시집 보내다. (용례: 이젠 그 애도 머리를 얹혀 줄 나이가 되지 않았어?)
머리를 얹어 주는 사람이 있고(남성), 머리를 얹힌 사람(여성)이 있다. 여기서 머리를 얹는 대상의 피동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머리를 올리다’라는 레토릭에 결국은 남성중심의 성적인 은유가 함축돼서 쓰여왔을 개연성이 높아진다. ‘머리(를) 올리다’라는 레토릭은 남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뉘앙스가 있는 ‘처녀작’, ‘처녀비행’, ‘처녀 출전’ 같은 표현과 궤를 같이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이 어휘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성차별적인 어휘로 여겨져 이미 거의 퇴출당했다.
그러나, ‘머리(를) 올리다’라는 표현을 두고 일부 언중 사이에는 아직도 갑론을박이 끝나지는 않았다. 일부에서는 이 말이 그냥 일종의 통과의례를 뜻하는 말인데 너무 꼬아서만 보는 것 아니냐, 반드시 부정적인 뜻만 있지는 않다고 반박한다. 또 당시 기생은 몸을 파는 사람보다는 예인(藝人)에 가까웠다며 살짝 옆길로 새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레토릭은 레토릭 그 자체만의 고유 의미로 항상 고정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토이는『수사학』에서 “주어진 언어 조합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어서 텍스트를 읽거나 문법적으로 분석하는 것만으로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중략)...수사적 분석의 한가지 목표는 말을 해독하여 그 속에 새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맥락에서 특정한 진술이나 상징의 사회적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머리(를) 올리다’, ‘머리(를) 얹히다’ 즉, ‘머리를 얹어 주다’라는 표현과 그 용례에서 이 레토릭이 애초에 어떤 뜻에서 출발했는지와 별개로, 누가 어떤 의미로 써왔는지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머리(를) 올리다’라는 레토릭과 관련해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머리를 쪽지든, 시집을 가든, 기생이 예능인이었든 아니든(이는 역사학자와 사회학자가 우선 판단할 일이다), 이 레토릭은 한 개인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이를테면 성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는- 행위에 쓰는 말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골프를 처음 치는 것에 그런 의미 따위는 없다. 만일 있다고 한다면 (남성들이) 그런 의미로 전유해서 쓴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성들이 여성 캐디 등을 상대로 골프를 성행위에 비유한 농담을 굉장히 많이 했다고 들었다)
골프를 처음 치는 것에는 그 어떤 대단한 의미도 없다. 그냥 처음 등산을 하고, 처음 마라톤에 나가고, 처음 수영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프가 일반인들은 선뜻 접하기 어려운 스포츠이다 보니 거기에 우스꽝스럽도록 엄숙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머리 올리다’라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골프가 특권층의 놀이였던 시절에는 골프에 마치 뭐라도 있는 양 그런 레토릭으로 위세를 떨고 일종의 선망 의식을 부추겼는지도 모르겠으나 골프가 대중화됐다는 지금,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사라져버렸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는데, ‘상황에 맞게 쓰면 되는 거 아니냐’, ‘쓰는 사람과 듣는 사람만 문제없으면 되는 거 아니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처럼 ‘머리를 올리다’라는 표현이 지배적인 레토릭이 돼 버리면 이 말을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랑그는 자의적인 동시에 강제적입니다. 언어가 자의적이라는 것은 동일한 대상을 언어 공동체마다 다르게 부른다는 뜻입니다. 사과나무의 열매를 한국어로는 사과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apple, 프랑스어로는 폼므pomme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또 언어가 강제적이라는 것은 언어 공동체가 이 열매를 어느 한 형태로 부르기로 합의하면, 그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합의에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유별난 사람이 사과를 ‘감자’라고 부른다고 했을 때 이 언행은 감자라는 이름이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전까지 사회적 일탈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계속 사회적 합의를 준수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결국 사회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지요. 이 강제성 때문에 언어는 매우 강력한 사회화 도구로 여겨집니다.” (장한업 지음, 『차별의 언어』230-231쪽)
인스타그램을 검색하다가 한 젊은 여성의 게시물을 보게 됐다. 엄마와 프로님(남성티칭프로)과 함께 셋이 골프장에 처음 나가 ‘머리를 올렸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난감함과 민망함은 이 레토릭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유별난 사람들만의 몫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