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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정말?

권력의 클리셰

by Editor M

클리셰(cliche)는 프랑스어로 활자 연판(鉛版)을 가리키는 인쇄 용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19세기에 유럽에서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인쇄할 때마다 매번 새로 글자를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판형 하나를 만들어 대량으로 인쇄물을 찍어낼 수 있게 한 것을 클리셰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도 독재정권 시절 아무개 대통령(大統領)이라고 쓴다는 것이 대(大)자를 견(犬)자로 잘못 쓰는 바람에 견통령(犬統領)으로 나가고, 또는 통(統 )자를 빼먹고 아무개 대령(大領)이라고 쓰는 바람에 경을 친 언론사가 나오자, 이후에는 대통령(大統領)을 아예 하나의 활자로 묶어버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한다.


클리셰는 19세기 중반 필름 카메라 시절에 우리가 흔히 ‘네가’(negative film)라고 불렀던, 사본을 무한정 뽑아낼 수 있는 음화(陰畫)라는 의미로 사진 분야에서도 쓰이게 됐다. 이후 클리셰는 문학 분야 등으로 쓰임새가 확장되며 미리 딱 정해져 있어서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는 상투적이거나 진부한 표현을 경멸적으로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백옥같이 흰 피부”,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바로 클리셰다.


『여론』(Public Opinon)이란 책으로 유명한 월터 리프먼은 우리는 실제로 눈으로 보기 전에 세계가 어떤 것인지 듣게 되며 직접 경험하기 전에 상상하는데 “이러한 선입견이 지각의 모든 과정을 깊이 지배한다”고 말했다. 월터 리프먼은 ‘의사 환경’(psuedo-environment)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독자들은 언론이 구성하는 의사 환경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하고 행동하는데, 그 행위의 결과는 의사 환경이 아니라 실제 환경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때는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1997년 12월 22일. IMF 사태로 '국가 부도의 날'이 선포된 지 딱 한 달 되는 날이었다. 텅 빈 시민들 가슴 속마다 을씨년스럽고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데, 날씨는 겨울치고 아주 따뜻했다. 이날 최고 기온인 영상 10.3도를 향해 수은주가 달려가던 오전 10시 50분쯤, 안양교도소 정문에 검은 코트 차림의 전두환 씨가 나타났다. 구속된 지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그는 뒷짐을 진 채 당당하게 말했다.


“국민 여러분들에게 오랫동안 너무 심려를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때부터였을까. 이 레토릭에 불행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그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짓밟아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죽인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당시 연희동 집에는 과거 정권의 환영객들이 몰려오고 그에게 큰절한 동네 주민도 있었다지만, ‘심려’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레토릭이었다. 국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걱정’한 적이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심려’의 정의는 ‘마음속으로 걱정함. 또는 그런 걱정’이라고 나와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언론을 통해 이 레토릭을 물리도록 듣고 있다. 듣고 있자니 이 레토릭이 매우 부적절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첫째, 무슨 일이 터지면 정확한 사실을 밝히고 피해당사자에게 사과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왜 국민한테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는 말부터 앞세우는지 이상했다. 둘째,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클리셰가 과연 그 상황에 맞는 정확한 표현인지도 의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수사학』에서 “포괄적이고 두루뭉술한 단어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 꼭 들어맞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라면서 “실제로는 말할 것이 없는데도 마치 자기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을 때 사람들은 일부러 애매모호한 표현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 레토릭을 주로 구사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 기업대표 등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전자인문학센터의 ‘트렌드21 코퍼스’에서 ‘심려’라는 단어의 연도별 공기어(共起語)를 분석해보면 가장 많이 함께 쓰인 단어는 역시 ‘국민’(10.6%)이었고, 뒤를 이어 장관(3.4%), 대통령(3.1%), 회장(3%), 대표(2.7%), 의원(2.6%) 등 직위나 직책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많이 나타났다.


출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트렌드21’ 코퍼스 공기어 분석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원래 민심의 풍향에 민감한 정치인들의 레토릭으로 많이쓰였다.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의 자식이나 가족, 또는 정권 실세들과 관련된 비리 사건이 터지고 정책의 큰 실패가 드러날 때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국정 최고책임자는 국민에 대해 무한대의 정치적 책임을 진 자로서 자신이 직접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았더라도 책임감을 느끼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하는 자리이다. 왕조 시대에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도 임금의 책임이라고 했을 정도니까 ‘심려를 끼쳐 죄송...’은 ‘부덕의 소치’에 버금가는 레토릭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래서 국민은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를 하지 않는 대통령이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면서 머리 숙여 사과하면 어느 정도 평가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권위주의 시대 또는 권위주의 시대의 정서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너도나도 국민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단다. 검찰 포토라인에 선 명백한 범법자들도 뻔뻔하게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라고 말한다. 마치 나는 죄가 없는데 정권에 밉보여서 여기까지 왔다, 정치하다 보니까, 기업하다 보니까, 다시 말해 ‘큰일’하다 보니까 옷에 더러운 게 조금 묻고 손에 피도 조금 묻혔다는 투의 태도를 포장하는 레토릭이 됐다. 내가 한 일은 자잘한 일이 아니라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칠 정도로 큰 나랏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여러분 이거 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어느 쪽이건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중에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긴 했지만, 지난 2018년 이른바 ‘물컵 갑질’사건으로 사회적 공분을 샀던 조현민 대한항공 임원은 경찰에 출석하면서 대상이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고 “심려를 끼쳐 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6차례 반복했고, 2014년에 5명의 병사가 숨지고 7명이 다친 동부전선 GOP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 국방부는 다음날 오전 브리핑의 첫머리에서 “먼저,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데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말문을 연 뒤 “아울러, 이번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희생된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사망자 및 부상자 가족 여러분들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덧붙였다. 꽃다운 나이의 장병이 5명이나 비전투 상황에서 숨지고 7명이 부상했는데 이게 과연 ‘심려를 끼친 데 대해 죄송’하다고 할 일일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2021년 2월 포스코에서 크레인을 정비하던 협력업체 직원이 기계에 몸이 끼어 숨지는 사고가 있었을 때도 포스코는 사고 발생 8일 만에 최정우 회장의 말이라며 유가족에게 사죄하고 “국민 여러분들께도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고 밝혔다. 당시 숨진 노동자를 비롯해 최 회장 재임 동안 포스코에서 십여 명의 사망자가 잇따라 나오자, 당시 여당의 이낙연 대표가 “산재 사고가 반복돼도 안전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무책임한 태도가 계속되는 데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비판한 지 하루 만에 나온 말이었다


출처: 포스코 뉴스룸


그런데 이 ‘대국민 사과’가 언론에 나온 과정도 좀 석연치 않다. 포스코가 이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는 기사들을 찾아보니 언론사들이 대국민 사과 기사에 쓴 사진은 통신사인 연합뉴스를 포함해 모두 포스코가 제공한 것이었고, 사과 내용도 포스코의 보도자료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기사를 보면 “17일 포스코에 따르면, 최회장은...사과했다”(서울신문 2021.2.17.), “포스코는 최정우 회장이...말했다고 17일 밝혔다”(MBN뉴스 2021.2.17.)라고 돼 있다. 한마디로 유족과 국민에게 한 회사의 첫 공식 사과도 공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사 보도자료 형식을 통한 것이다. 그러니 영상도 없고 언론사가 찍은 사진도 없었다.


최 회장은 이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산재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 요구를 받았지만, 허리가 아프다며 불출석 사유서를 냈다가 비판을 받고 출석한 뒤 역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 달 뒤..... 포스코 포항제철 안에서 또 한 명의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숨졌다.


어쩌면 이 상투어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진 신분과 계급을 나누는 상징적인 레토릭일지도 모르겠다. 힘없는 사람들은 이 말을 쓸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늘 이 상투어가 상정하는 희생양이 될 뿐이다. 이 클리셰는 도의적 잘못은 있으나 법적인 책임은 피하고 싶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여론의 비판이 거셀 때 홍보담당자와 변호사들이 고민고민하다 불러온 표현일 것이다. 오늘날 ‘심려’라는 레토릭은 앞서 본 경우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됐다. 사람이 어처구니없이 죽었는데 그것을 겨우 걱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심려’로 애매모호하게 포장된 레토릭은 분야를 넓혀가며 수십 년째 무한 반복되고 있다. 클리셰는 반복됨으로써 당연시된다. 클리셰의 반복은 생각을 고정한다.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반복적으로 한정 짓는 행위는 일종의 인지조작이다. 알고 보면 걱정을 끼친 정도의 일 정도라는 것이다.


필리프 브르통은『조작된 말』에서 “반복은 조작 과정에서 명백하게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반복은 어떤 확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며 “논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처음에는 근거 없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반복되는 동안 결국 받아들일 만하게 느껴지고, 그 다음에는 정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이런 기술은 반복적으로 들은 것이 훨씬 이전에 어딘가에서 논증된 적이 있다는 인상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롤랑 바르트도 “권력 언어란 규정상 반복 언어이며, 모든 공식적인 언어 제도는 되새기는 기계들이다. 학교며 스포츠며 광고며 대중 작품이며 유행가며 뉴스며, 이 모든 것들은 항상 똑같은 구조, 똑같은 의미, 대개는 똑같은 말만을 반복한다. 상투성은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형상, 정치적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바르트가『텍스트의 즐거움』이란 책을 통해 이런 통찰을 할 즈음, 한국의 한 평범한 시민에 의해서도 ‘심려를 끼쳐 죄송’이라는 레토릭에 숨은 허구성은 이미 간파되었다. 1974년 동아일보 독자의견란에 실린 시민 기고글을 한번 보자.


출처: 1974.4.26. 동아일보 6면


치안국은 각 고층건물에 대한 소방진단을 강력히 실시하리라 한다. 항상 느끼는 감정이지만 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당국의 처사가 한심스럽기만 하다. 그 처절했던 대연각의 화재 사건이 우리 뇌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비록 인명피해는 없었다지만 ‘설마 우리야’하는 그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귀중한 재산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리다니 이건 분명히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 이번 서울 코스모스 백화점 화재사건만 해도 그렇다. 二회에 걸친 소방진단 경고처분을 했다는데도 뱃심좋은 기업주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경시하다가 진화작업이 지연되고 피해액도 늘어난 것 같다. 얼마들지 않는 소방시설에는 외면을 하면서 불난 후에 국민들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一白萬원이 넘는 사과문에는 인색치 않은 기업주들의 양심들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96-48 윤갑조 (1974.4.26. 동아일보 6면 코너 중)


소방진단 결과 경고를 받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던 기업주들이 불이 난 뒤에는 ‘국민들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백만원이 넘는 돈을 쓰는 걸 보니 그들의 양심이 의심스럽다는 한 시민의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40여 년 전에도 뻔히 속이 들여다보였던 이 레토릭의 인기는 그러나, 수그러들 줄 모른다. 대부분은 ‘국민’, ‘죄송’ 등을 동반하여 쓰이는 ‘심려’라는 단어는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3년부터 언론에 급속하게 많이 쓰이기 시작하더니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5,448건으로 정점을 찍고 잠시 내려왔다가 문재인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다시 급상승해 2019년과 2020년 모두 한 해 5,000건 넘게 언론 기사에 등장했다.


상투어 중의 상투어가 된 이 문장은 이제 정치인도 쓰고, 기업인도 쓰며, 체육인도 쓰고, 연예인도 쓴다. 연예인이 코로나 음성판정을 받았다며 팬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건 애교로 받아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도 “팬 여러분을 걱정하게 해 죄송하다”라고 하면 좋겠다. 또는 그냥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은 더는 아무 데나 쓰는 레토릭이 아니어야 한다.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걱정하게 해 죄송하다는 말은 구두선으로 끝나기에 십상인, 무책임한 말이다. 만일 잘못을 했다면, 어떤 행위를 했는데, 어떤 점이 잘못됐고, 어느 정도의 잘못인지 명확하게 인식을 드러내야 한다. 또한, 사과를 하려면 두루뭉술하게 국민 여러분 운운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먼저 해야 한다. 국민은 당신들이 저지른 일로 ‘심려’하지 않는다 ‘분노’하거나 ‘원망’하고 ‘비판’할 뿐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조치를 요구할 따름이다.


당사자가 직접 연설문을 구성해서 발언대에 섰던 고대 그리스와 달리,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인 홍보와 공보담당자들, 그리고 언론은, 그저 앞사람이 쓰던 대로 잠깐 적당한 비난만 감수하면 피신할 기회를 제공하는 안전한 표현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와 레토릭을 찾아내야 한다.


“새로운 표현법을 쓰면 사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략)...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수사학적 구성물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인 수사학적 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 (리처드 토이 지음, 『수사학』)


불문학자 고 황현산을 인용하자면, 언어로 흔들지 않는 한 세상은 한치도 나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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