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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린이'와 '골린이'에 대한 단상

by Editor M
주린이 · 골린이


서울문화재단 온라인 캠페인 포스터


지난 4월,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문화재단에서 어린이의 날을 앞두고 펼치던 온라인 캠페인 ‘○린이 날 · ☆린이 날 · △린이 날’이 하루 만에 끝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에서 ‘○린이’는 어린이를 무시하는 표현이라는 항의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어린이보호재단의 후신인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영문명으로 바꾼 건 유감이다)도 99회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논평을 내서 ‘○린이’는 “KBS 등 주요 방송사에서 ‘어떤 것에 입문하였거나 실력이 낮은’의 뜻으로 주린이, 요린이, 산린이 등의 말로 재생산되고 있다”라며 “어린이를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차별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빅카인즈 검색에서 ‘골린이’는 2020년에는 62건의 기사에 쓰였지만 2021년 7월 현재까지만 해도 177건을 기록해 일년 만에 거의 3배나 늘었고, ‘주린이’도 2020년 342건에서 2021년 7월 현재 800건을 기록 중이다. 이런 추세라면 최근 언론에서 가장 많이 쓰는 유행어의 반열에 올라 갈 기세다.




그러나 ‘○린이’에 대한 비판은 ‘프로불편러’의 시각일 뿐, 이 레토릭에 문제가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린이’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며 무엇인가에 도전하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어린이를 깎아내리거나 조롱하려는 뜻은 없다는 주장이다. 아니, 오히려 ‘○린이’는 처음 접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주며, 도전을 응원하는 말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남녀노소 인간은 모두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특별히 어린이만 그런 건 아니다. 비록 어린이가 실생활에서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일시적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어린이의 인격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주린이’나 ‘골린이’라고 해서 인격이 부족하거나 주식이나 골프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도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일에 서투르고 어설픈 상태라는 의미만 어린이에서 뚝 떼어내서, 미숙하고 모자란 존재라는 의미로 쓸 때만 ‘○린이’라고 은유의 레토릭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남녀노소 누구나, 어느 분야에서나, 초보자나 초심자가 있는데 왜 하필 특정 연령대만 초보자에 비유해야 할까. 골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골린이’가 꾸준히 싱글을 치면 ‘골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다. 못해야만 ‘골린이’ 인 것이다. 이것이 어린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다. ‘초보자’도 일시적으로 교육의 대상이긴 하지만 훈육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늘 부족한 상태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린이’라 부르면 귀엽다고? 징그럽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우리에게 어떤 개념의 한 측면을 다른 개념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가령 싸움의 관점에서 논쟁의 측면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체계성은 필연적으로 그 개념의 다른 측면들을 은폐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이는 오로지 배우기만 하는 존재인가. 어른이 어린이에게 배울 때도 많다. ‘○린이’는 어린이의 한 측면을 ‘○린이’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도록 사회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런 레토릭은 어린이가 가진 힘과 가능성을 감춘다.


국제연맹이 채택한 세계최초의 국제아동권리선언인 ‘제네바 선언보다 1년 앞선 1923년 5월 1일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선포한 ‘어린이날 선언’은 어린이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며 ‘어른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9가지 권유 사항을 전한다. 그중 첫 번째가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이고 마지막이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이다.


‘○린이’라는 레토릭은 과연 100년 전의 인식보다 나아간 것일까, 퇴보한 것일까. ‘○린이’라는 레토릭에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더 있다. 사회 일부 계층에서 유행하는 언어를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차용한다는 문제다. 창의성이 부족한 건 둘째 치고, 언론의 언어는 공공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므로 사회적 영향을 세심하게 고려해서 레토릭을 선택해야 한다. 게다가 어감도 좋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수사학』에서 은유로 사용된 단어의 발음이 그 은유가 가리키는 대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은유를 잘못 사용한 것이라며 “어떤 단어의 아름다움은 발음이나 의미에 있고, 이것은 추함도 마찬가지다... (중략)...따라서 은유는 발음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시각적으로, 그 밖의 다른 감각과 관련해서 아름다운 단어와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요린이’(요리), ‘헬린이’(헬스), ‘폰린이’(휴대폰), ‘등린이’(등산), ‘코린이’(코인), ‘낚린이’(낚시), ‘킥린이’(킥보드), ‘캠린이’(캠핑)... 발음은 어색하고, 표현은 상투적이며, 조어 방식도 마구잡이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모든 분야에 붙일 수 있겠다. 인간 사회에 초보자가 없는 분야가 어디에 있는가. ‘범린이’(초범), ‘통린이’(취임 초기에는 대통령이라도 초보자니까)... 이렇게 쓰는 게 가능한가?




게다가 ‘○린이’ 레토릭은 골프와 주식 등의 영역에서 심리적 진입 장벽을 허물고 일반인들을 끌어들이는 마케팅 레토릭이 되고 있다. ‘초보자들 어서어서 오세요. 이 제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배우고 따라 할 수 있어요’의 상징어가 된 것이다. ‘누구나 쉽게’에는 ‘어린이도 하는데 어른인 내가 못하면 안 되지’라는 이야기가 숨져져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잘 안 해왔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예를 들어 골프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든지, 주식을 함부로 했다가는 위험하다든지. 그런데 마케팅에 동원된 ‘○린이’는 이런 장벽을 뚫고 골프나 주식을 안 하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언론이 나서서 ‘○린이’라고 온갖 분야에 갖다 붙이며 부추기니 더 하다.


가만있던 어린이들은 난데없이 초보자와 초심자를 유혹하는 마케팅의 세계에 자연스레 편입된다. 그러면서 어린이는 늘 뭔가에 서툴고, 부족하고, 미숙한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 지금은 세상이 개명해 아동 노동이 금지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는 더 중하게 처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아동 노동이 지속되고 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에서도 끊임없이 아동 학대, 성착취 영상등의 사건이 터지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아동이 어른과 다름없는, 아니 몸집이 작아 굴뚝 청소나 탄광 일에는 오히려 유리한 노동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처지에서 벗어난 지 겨우 100년에 불과할 뿐인데, 이번에는 어린이를 모든 분야의 초보자일 뿐이라며 깎아내리는 시선으로 보는가.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힘든 당사자들인 어린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골린이’, ‘주린이’, ‘헬린이’…. 무엇이든 초보자에게 쓰는 말은 다 자신들 차지라고 좋아할까.


100년 전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린이’가 순간의 유행처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레토릭이자 유행어로 끝날 수도 있다. 나의 우려가 기우일 수도 있다. 그러기를 바란다. 이 레토릭은 다른 무엇보다,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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