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종세트
‘세금폭탄 3종세트’ 나왔다…“매물 잠기고 전셋값 상승 우려” (2020.7.22. 한국경제)
민심에 놀란 與, 부동산·지원금·백신 3종세트로 뒤집기 나서나 (2021.1.6. 중앙일보)
‘탄도미사일 3종세트’ 나온다 (2021.4.20. 아시아경제)
중구, 여성 1인 가구 안심홈 3종세트 지원 (2021.6.15. 서울신문)
‘세금폭탄 3종세트’에서 ‘안심홈 3종세트’, 심지어 ‘탄도미사일 3종세트’까지…. 이제는 갈 데까지 간 느낌이다. 빅카인즈 상에서 ‘3종세트’라는 용어는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대부분 화장품 세트나 명절 선물 세트 등 유통업계 판촉용어로 쓰였다.
그러다 2006년 ‘취업기초 3종세트’(학벌, 학점, 토익점수), 2007년 ‘국민모독 3종세트’, 2008년 ‘섹시댄스 3종 세트’, 2009년 ‘예산심사 막장 3종세트’등 2000년대 후반부터 점차 정치, 사회 분야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3종세트’는 예나 지금이나 명백히 마케팅업계의 레토릭이다.
즉 ‘3종세트’든 ‘5종세트’든 다른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상품을 팔기 위해 특별히 ‘구성된’ 상품이자 레토릭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세트 상품은 ‘특별히’,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를 위해’, ‘때맞춰’ 구성한 것이며 그래서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상품이다. ‘평상시에는 이런 세트 구성이 쉽지 않으며 이번만 소비자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배려’라고 인지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밑지고 파는 장사란 없으며, 백번 양보해서 원가에 판매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브랜드 로열티 제고’나 ‘록인’(lock-in)효과, 또는 ‘미끼상품’ 효과를 노린 상품일 확률이 높다.
이제 정치와 자본의 결합은 노골적으로 서로의 레토릭을 섞는 수준에 다다랐다. 정치와 행정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레토릭을 ‘공유’한 경제부총리의 다음 발언과 관련 기사들을 보자.
2020년 경제정책 방향 관계부처 합동브리핑 내용 중
“최저 1%대의 파격적인 금리에 4조 5000억 원 규모의 설비투자 촉진 금융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투자 촉진 세제 3종세트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등 민간 투자 촉진을 전방위적으로 뒷받침해 나가겠습니다.” (2019.12.19. 홍남기 경제부총리. 정부서울청사)
[홍남기 경제부총리 인터뷰] 플러스 성장·일자리 반전 가능할까?
“8대 분야의 소비 쿠폰을 제공해서 1조 원 정도의 소비 진작을 하겠다라든가 또는 온누리 상품권을 포함해서 소비 진작 3종 지원 세트도 저희가 이번에 보강을 했습니다. 아울러서 신용카드에 대한 소득공제액도 늘린다든가 해서 이번만큼은 소비가 확실하게 살아날 수 있도록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2020.6.1. KBS9시뉴스)
세금이나 경기부양책, 재난지원금 같은 정부의 공공정책과 공공서비스에 ‘3종세트’같은 자본주의적 마케팅의 레토릭이 들어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정부가 공공서비스를 책임지고 제공하는 주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시민은 단지 이런 서비스를 돈(세금) 내고 구매할 뿐 그밖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소비자’일까?
아니다. 시민은 정책 집행의 단순한 수혜자를 넘어서 정책과 공공서비스의 방향을 다양한 경로(선거, 공청회, 여론 조성)를 통해서 정부와 함께 결정하고, 집행에 참여하고, 개선하는 주체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협조 없이는 공공부문이 제대로 유지되기 힘들다.
‘3종세트’라는 메타포에는 소비문화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3종세트’에는 시민이 설 자리도, 할 일도 없다. 모든 것은 판매의 주체가 기획하고, 제작하고, 마케팅해서 시장에 내놓고 판매하는 것이다. 소비자는 마음에 들면 사고, 싫으면 안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정치나 행정은 필요 없다고 회피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이런 마케팅업계의 레토릭을 부총리 같은 정치인이자 고위관료가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경제부총리는 기업대표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부 정책이 특정 정치세력이나 관료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독단적으로 추진될 경우에 이런 레토릭이 사용된다면 문제다.
‘3종세트’라는 은유의 레토릭이 가진 힘은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즉각적이고도 무비판적인 호감이나 무관심, 또는 방관을 이끌어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뭐든 세트로 준다는데 싫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다.
“메타포는 무의식적인 감정 유발을 촉발하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선과 악의 척도가 되는 생각과 신념에 위상을 두기 때문에, 우리들의 믿음과 태도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준다. 메타포는 그것이 지향하는 다양한 유발 어휘들의 긍정 또는 부정적 연관성을 이행하여 목표를 이룬다...(중략)...메타포의 담론적인 역할은 강조되는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에 연계하여 정책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조나단 챠테리스 블랙 지음, 『세상을 움직인 레토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