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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 시대의 레토릭

by Editor M

레토릭 또는 수사학의 부활


레토릭(Rhetoric) 또는 수사학은 어원적으로 '연설가의 기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수사(修辭)’라는 번역어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수사학에 대한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수사학이 도대체 뭐하는 학문이냐는 것이고, 두 번째 반응은 고리타분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수사(搜査)’와 관련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중세에는 수사학이 논리학, 문법과 함께 ‘트리비움(trivium)’ 즉, 삼학 (三學) 중 하나였다. 40대 이상의 연배는 알 것이다. 어렸을 적 주변에 웅변학원이 많았다는 사실을. 웅변학원은 일종의 수사학 교습소였다. 맞다. 레토릭은 고색창연한 학문이다. 무려 철학과 맞먹는 역사를 가진 학문이요, 설득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cicero.jpg ‘카탈리나를 탄핵하는 키케로’ (체사레 마카리, 1888)


한편 레토릭은 최신의 학문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씬에 빅뱅이 일어나고 각종 메신저와 소셜미디어가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파고 들면서, 말하기와 쓰기의 힘은 과거와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레토릭 하나로 대선 주자로 부상하는가 하면, 말 한마디에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정치인도 많다. 대기업 CEO들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고객과 직접 소통하는 시대다. 소셜미디어에서 젊은 세대가 즐겨 찾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어록’이라는 점은 레토릭의 힘을 보여준다. 수사학의 케케묵은 먼지를 털어내자 알라딘의 램프가 되는 세상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내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는 말과 글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늘 레토릭을 쓴다.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갈 식당을 정할 때도, 부모가 자녀를 설득할 때도, 기업이 광고를 할 때도 알게 모르게 레토릭을 쓴다. 레토릭은 삶에 필수불가결한 학문이자 기술이다. 그런데 특정 레토릭 안에는 많은 의미들이 감춰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레토릭은 ‘드러내면서 감추는’ 기술이다. 우리는 레토릭의 가면을 벗겨서 봐야 한다.


언프레이밍 레토릭


시민대중이 평소 쓰는 말은 언론같은 대중매체에서 보고 듣는 언어에서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특정한 레토릭은 특정한 생각의 프레임을 전달한다. 특히 정치 언어와 공공 언어, 그리고 언론의 언어는 한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을 결정짓는 레토릭이다.


특정 레토릭을 선택한다는 것을 씨름에 비유하자면 샅바싸움이다. 씨름 선수들은 샅바를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잡기 위해 시작부터 상대와 몸싸움을 벌인다.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 서로 샅바를 잡았다 풀렀다 하며 몇 분이고 흘려보내는 일도 잦다. 샅바를 내주면 경기를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레토릭을 레토릭일 뿐이라며 허투루 취급하면 알게 모르게 후과가 온다. 한번 대중의 입에 붙고 귀에 익은 잘못된 레토릭은 바꾸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레토릭은 의미의 낙인(烙印)이다. 과거 오랫동안(어쩌면 지금까지도) ‘종북’, ‘빨갱이’ 같은 프레이밍된 레토릭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일이 일사천리로 ‘처리’됐던가. ‘진보’, ‘보수’, ‘수구’, ‘꼰대’, ‘적폐’ 같은 레토릭 하나로 얼마나 많은 의미가 도매금으로 묻히는가.


최근 극단의 언어, 편 가르기 언어, 남들이 쓰니까 무비판적으로 따라 쓰는 언어가 늘었다. 또 알맹이가 없거나 겉만 번지르르하게 화장한 레토릭도 많아졌다. 또 너무 많은 레토릭이 쏟아지다 보니 언론이나 시민이 제대로 음미하고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랬듯이, 민주주의는 말로써 시작해 말로써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면 쓴 레토릭과 프레이밍된 레토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위협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과 언론의 언어 가운데 10가지 문제적 레토릭을 언프레이밍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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