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 서촌에 ‘METAPHOR(메타포)’란 이름의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건너편에서 경복궁 담장 쪽으로 통창이 나 있어 시쳇말로 ‘뷰 맛집’일 뻔했는데, 주인장은 이를 포기하고 독특한 선택을 했다. 도로 쪽에 ‘METAPHOR’라고 조그맣게 쓴 상호를 붙인 담을 세우고 실내와 담 사이에는 테라스를 만들어 테이블을 갖다 놓은 것이다. 아마도 카페가 차가 다니는 도로와 바로 맞닿아 있는 것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러한 배치야말로 바로 메타포의 속성을 살린 기가 막힌 디자인이었다. 메타포, 즉 은유는 본딧말을 대신하는 언어를 내세워 뜻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한 것이니 말이다.
레토릭에서 은유는 비유법의 여왕이다. 은유, 즉 메타포(metaphor)는 그리스어 meta(~과 함께, 뒤이어)와 pherein(운반하다)의 합성어로 ‘함께 또는 뒤이어 운반한다’는 어원적 의미를 갖고 있다. 흔한 예로 ‘시간은 돈이다’라는 비유를 들여다보자. 시간 자체는 돈이 아니지만,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실체화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을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돈에 비유함으로써 현대인들은 시간을 정의하고 시간의 사용 방법을 체화한다. ‘시간을 낭비하다(waste time)’ 또는 ‘시간을 절약하다(save time)’라고 서술하는 것은 ‘시간=돈 ’이라고 은유적으로 생각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 We live by)라는 책에서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은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적이기보다는 특수한 언어의 문제로 시적 상상력과 수사적 풍부성의 도구”일뿐이지만, 자신들은 “은유가 단순한 언어의 문제, 즉 낱말들의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사고 과정의 대부분이 은유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철학자 I.A. 리처즈는『수사학의 철학』에서 “은유가 없이는 자유로운 일상 대화에서 세 문장도 말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정밀과학의 정밀한 언어에 있어서조차도 은유를 제거하려면 엄청난 어려움이 수반된다.”라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일까. 세계적인 과학철학자인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예문을 들어 은유의 일상성을 설명했다. 첫째, ‘귀가 어둡다.’ 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어둡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안 들리는 것과 어두운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둘째, ‘물건값이 올랐다.’ 물건이 비싸진 것과 올라간 것도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다. 우리는 비싸진 것을 올라갔다고 은유한 것이다. 셋째, ‘앞으로 잘하겠다.’ 미래는 왜 하필 뒤가 아니라 앞인가? 이런 말도 은유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은유의 사용은 쉽지 않다. 쓰는 사람도 자신의 레토릭이 의도치 않은 엉뚱한 심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만, 이를 언론을 통해 듣거나 보는 시민들도 때로는 은유라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고 있는 레토릭이 사실상 어떤 사고방식을 주입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톺아보아야 한다.
레토릭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적절한 언어를 선택해 논증하고 표현하며 설득하는 기술인 동시에 수용자 처지에서는 거꾸로 이를 해체하는 과정이자 기술이다. 글쓴이나 연설가가 정직한 언어를 선택했는지, 제대로 논증했는지, 표현에는 감추고 있는 것이 없는지, 과장해서 연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걸러보는 기술이다.
세금폭탄· 배송전쟁
언론은 항상 독자와 시청자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을 자극적인 언어를 쓰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뉴스의 헤드라인을 어떻게 ‘뽑느냐’의 문제는 과거 오랜 세월 동안 가판대에서 오늘 신문이 얼마나 많이 팔리느냐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고, 방송뉴스에서도 제목이 어느 정도 시청률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 내지는 추정이 존재한다. 자극적인 레토릭은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에서 끄집어내기 쉽다. ‘뉴스는 불행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언론은 ‘굿 뉴스(good news)’ 보다는 ‘배드 뉴스(bad news)’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 뉴스에서 타인의 불행을 확인함으로써 내가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언론이 많이 쓰는 자극적인 언어 중에서도 가장 자극의 강도가 높은 레토릭은 어떤 사건이나 사태, 행위를 전쟁에 빗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금폭탄’, ‘문자폭탄’, ‘배송전쟁’, ‘예약전쟁’, ‘대확산 뇌관’ 같은 레토릭들이다. 이 밖에도 ‘겨냥’, ‘방탄’, ‘공방’ 등 무기나 전투 행위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레토릭들이 언론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많이 쓰이고 있는 ‘세금폭탄’이라는 레토릭을 들여다보자. 1883년부터 1960년까지 신문 98종의 기사 620만 건을 수록하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서 ‘세금폭탄’이란 단어를 사용한 기사를 검색해보면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다만 ‘증세’(增稅)라는 어휘를 쓴 기사는 2,504건이 검색돼, 이 시기에는 세금을 올린다는 뜻의 레토릭으로는 가치중립적인 ‘증세’를 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금폭탄’이라는 레토릭은 빅카인즈에서 2005년부터 언론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해 2020년까지 모두 5,504건의 기사에 쓰였는데, 그중 약 40%인 2,153건은 8개 경제지의 기사였고(매일경제가 501건으로 가장 많았다)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3사는 상대적으로 적은 110건의 기사에서 이 레토릭을 사용했다.
그런데 2003년까지만 해도 경제신문에서조차 ‘세금폭탄’이란 표현은 잘 쓰이지 않았는지 다음의 기사를 보면 증세를 ‘극약처방’, ‘폭탄선언’이라고까지 규정하면서도 ‘세금폭탄’ 대신 ‘세금확대’라는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세금으로 집값잡는 시대 지났다.
심지어 김효석 민주당 제2정조위원장은 “투기지역내 1가구2주택 소유자에 대해 특별부과금을 국세로 신설해 부과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중략)... 그렇다면 세금확대라는 극약처방마저 통하지 않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2003.5.22. 한국경제신문)
그런데 최근에는 어처구니없게도 (명백히 ‘세금폭탄’에서 영향받았음이 분명한) ‘~폭탄’이라는 레토릭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기대하며 공약하거나 추진하는 부동산 공급확대 정책에마저 쓰여 ‘공급폭탄’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웃지 못할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물론 세금은 대부분 시민에게 큰 부담이다. 누구도 그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금이 없으면 국가 재정과 공공 서비스, 적정한 복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세금 뒤에 붙은 ‘폭탄’이라는 레토릭은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킬까.
‘배송전쟁’, ‘쩐의 전쟁’, ‘예약 전쟁’, ‘~와의 전쟁’, ‘대유행 뇌관’, ‘대선정국 뇌관’, ‘여야 공방전’..... 언론 속 세상은 전쟁터이다. 한국 사회의 경쟁이 치열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 죽고 나 살자’는 전쟁의 알레고리를 가져와서 상호존중과 타협을 바탕으로 함께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시민 민주주의의 시대, ESG 경영이 화두로 등장한 시대에 ‘투하’하는 것은 바람직할까. ‘세금폭탄’이라는 레토릭이 시민들 간 연대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도움이 될까.
세금에 폭탄을 섞는 이러한 인지적 혼합은 역설적으로 레토릭의 힘을 증명한다. ‘파블로프의 개’로 유명한 파블로프의 조교 출신으로,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세르주 차코틴은 “단어 하나가 우리의 정신에 어떤 이미지를 전하기 시작하면, 그 단어는 그것을 시작한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개시한다”고 말했다. (필리프 브르통 지음, 『조작된 말』 127-128쪽에서 재인용)
월터 리프먼은『여론』이라는 책에서 “훈련되지 않은 눈으로 주변을 관찰할 때 우리는 거기서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기호만 본다”라면서 “보통 우리는 본 다음에 정의하지 않고, 정의를 내린 뒤에 본다. 크고 왕성하며 소란스러운 혼돈의 현실 세계에서 우리 문화가 이미 우리를 위해 정의해준 것을 본다”라고 말했다. 세금을 폭탄이라고 규정한 언어 세계 속에서 살아온 독자는 세금과 관련한 사안을 볼 때 이미 ‘세금폭탄’이라고 정의를 내린 문화 속에서 그 사안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전쟁의 알레고리를 동원한 레토릭은 우리 사회에 점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특히 코로나 사태, 부동산 문제 등 공공의 안전과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큰 사건들이 발생하고 1인 미디어의 부상, 유사 언론의 등장으로 언론 생태계가 변화하면서, 언론은 너도나도 독자와 시청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 갈수록 자극적인 레토릭을 쓰고 있다. 게다가 대선주자까지 ‘공급폭탄’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뉴스원들도 그 경쟁에 뛰어드는 형편이다.
‘배송’을 ‘전쟁’에 비유한 ‘배송전쟁’이란 레토릭도 마찬가지다. 단어 자체로도 과하지만,(심지어 ‘배송전쟁’에 ‘불이 붙었다’라고 쓰기도 하고, ‘총알 배송전쟁’이라는 표현을 동원하기도 한다) ‘배송전쟁’은 기업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본 레토릭이다. 시민이나 소비자 처지에서는 그들끼리의 ‘경쟁’을 ‘전쟁’으로 바라봐야 할 이유는 없다. 경쟁과 전쟁은 다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은 있어도 ‘선의의 전쟁’이란 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