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이 여전히 극심했던 1940-50년대 미국 남부. 천막 부흥회를 뚫고 들썩이는 흑인 특유의 소울충만한 가스펠을 들은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이끌려갑니다. 천막 사이로 언뜻 언뜻 비치는 신들린듯한 흑인들의 춤과 노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천막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가 이 ‘의식(儀式)’에 동참합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독일과 스코틀랜드계 피가 섞인 곱상한 외모의 백인 소년.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면, 이 소년은 ‘로큰롤의 제왕’에 등극합니다.
노래 뿐 아니라 ‘고무다리춤’(Rubber legs)으로도 불렸던 그의 춤은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리를 떨고 골반을 터는 저속하고 음란한 춤이고 백인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확실한 건 이 춤을 본 십대 소녀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겁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퍼포먼스였기 때문이죠. 1950년대에 그는 세계 최초의 아이돌이 됩니다. 그의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 지금까지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입니다.
영화 “엘비스” 도입부의 천막 부흥회 씬이 사실에 바탕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전기 영화의 외양을 하고 있긴 한데, 정신없을 정도로 화려한 영상과 화면 전환 효과, 편집 등으로 때론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엘비스라는 인물에 대한 재현과 시대 배경에 대한 고증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물랑 루즈”, “로미오+줄리엣”등 뮤지컬 영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바즈 루어만 감독이 처음인 관객이라면 적응에 시간이 좀 필요해보입니다. 그룹 퀸을 다룬 ‘거의 천만영화’(994만 명) “보헤미안 랩소디”(2018)나 팝 디바 휘트니 휴스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2018), 엘튼 존의 전기 영화 “로켓맨”(2019), 그리고 비틀즈를 다룬 피터 잭슨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비틀스:겟백”(2022) 등 대중음악사의 위대한 뮤지션들을 다룬 영화가 최근 잇따라 만들어졌지만. 이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로큰롤의 ‘제왕’이자 슈퍼스타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다룬 영화는 없었습니다. (배우이기도 했던 엘비스 본인은 생전에 서른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대중예술가로서 엘비스가 자신의 유전자와 흑인 음악의 세례를 바탕으로 ‘창조’해낸 세계를 제대로 재현할 수 있는 배우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노래만 잘한다고 해서, 연기만 잘 한다고 해서 되는 역할이 아니니까요. 영화를 보고 나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엘비스는 무엇보다 ‘온몸’이고 ‘영혼’입니다.
앞서 언급한 슈퍼스타 뮤지션을 다룬 전기 영화들은 사실 대략 비슷비슷한 이야기와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그들은 일찍이 또는 늦되이 꽃을 피우고 슈퍼스타가 되지만 무대 뒤의 허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약 등에 손을 대고, 우울증에 빠지고, 나쁜 매니저의 계략에 휘말리고, 결국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엘비스”도 크게 다르지 않게 전개되지만, 눈에 띄는 건 약관의 나이에 이미 슈퍼스타였던 그가 미국 사회, 기성 세대, 주류 권력과 불화하고 고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슈퍼스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애송이였던 그가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타협하거나 굴복하면서 흔들리는 모습 또한 인상깊었습니다.
지금은 주류를 넘어 하나의 이정표가 된 엘비스지만, 당대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류에 맞섰습니다. 첫째, 엘비스가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로큰롤’(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만)은 흑인의 R&B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엘비스는 흑인 커뮤니티에서 성장했습니다. 인종차별 반대가 아니라 인종차별이 법으로 보장됐던 시대에 백인이 흑인 음악을 한다는 것은 경멸의 대상이자 사회 질서를 흔드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엘비스가 주목받기 시작했던 1954년에 그가 부른 ‘댓츠 올 라잇(That's all right)’을 라디오에서 듣고는 엘비스를 흑인으로 착각했다는 청취자들이 많았습니다. 엘비스는 명성을 얻은 초기부터 흑인음악과 흑인음악가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한편 당시 남부에 횡행하던 인종 차별 규범을 무시하며 자신에게 영감을 준 음악을 밀고 나갔습니다. 둘째, 골반을 흔들고 하체를 떠는 파격적인 춤이 백인 청소년의 도덕성과 사회적 안녕에 큰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며 ‘펠비스(pelvis, 골반) 엘비스’라고 비아냥 댄 주류 기성세대의 시선과 압박을 엘비스는 흔들리면서도 버텨냈습니다.
1956년 중서부 15개 도시 투어에 나섰을 때 위스콘신주의 한 카톨릭 교구에서는 당시 FBI 국장이었던 에드거 후버에게 긴급 메시지를 보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합중국의 안보에 분명한 위협입니다.” 대중문화와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국의 지상파 3사는 그의 인기를 이용해 엄청난 시청률을 올렸지만, 엘비스에게 로큰롤이 음란하고 저속하다는 사회 통념과 타협하라고 종용합니다. NBC의 ‘스티브 알렌쇼’는 “뉴 엘비스”를 소개한다며 엘비스에게 마치 집사처럼 검정색 연미복에 흰색 보타이를 매게한 뒤 실제 하운드 독을 등장시킨 가운데 ‘하운드 독’을 부르게 합니다. 엘비스도 사시나무 떨듯, 감전된 듯 춤을 추던 평소와 달리 얌전하게 춤을 춥니다. 영화를 보면 엘비스의 매니저인 톰 파커(톰 행크스 분)와 방송사 측의 계획이었던 걸로 나오지요. 엘비스는 나중에 이 쇼를 자신의 이력에 있어 가장 멍청했던 퍼포먼스였다고 회상합니다. 스티브 알렌쇼에 나간 얼마 후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멤피스에서 야외 콘서트에 나선 엘비스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다면 제대로 찾아왔어.. 문제를 일으키길 원하지 않았지만 피하지도 않아”란 노랫말의 ‘트러블(Trouble)이란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뉴욕 방송사의 그치들은 날 바꾸지 못해요. 오늘 밤 진짜 엘비스가 뭔지 보여줄게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TV쇼인 CBS의 ‘에드 설리반쇼’(비틀즈 출연으로도 유명)는 엘비스의 쇼에 대해 “가족이 보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리지만 경쟁사가 엘비스로 시청률을 올리자 엘비스를 불러냅니다. 그런데 엘비스가 격렬한 춤을 출 때 카메라는 허리 아래를 비추지 않습니다. 오로지 여성 청중의 비명 소리로만 엘비스의 퍼포먼스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1956년 9월 9일, 에드 설리반 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시청자수는 6천만 명, 시청률은 82.6% 였습니다. 백인 주류의 기성 사회는 인기 높은 그가 순종적인 미국의 모범 청년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엘비스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끝내 자신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방황하는 청춘, 청년의 고뇌와 반항,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 엘비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청년 문화를 대중문화의 주류 대열에 합류시켰습니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 평가했듯이 어쩌면 “엘비스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엘비스지만 배우가 설득력이 없었다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지면서 영화는 산으로 갔을 터, 하지만 엘비스 역을 맡은 신예 오스틴 버틀러는 “빙의했다”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대단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오스틴 버틀러는 특유의 구레나룻과 의상으로 실제 엘비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배우이자 연예인인 오스틴에게 엘비스는 반드시 인생 연기를 펼쳐야 하는 부담감의 대상이었겠지요. 그는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영화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노래나 춤 같은 기능적인 측면보다 오스틴에게서 진짜 엘비스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듯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이 지나치게 번쩍이는 바즈 루어만 표 엘비스 영화가 진정성을 획득하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얘기입니다.
“오스틴이 그 역사적인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이돌을 신격화하고 완벽한 사람으로 바라보는데, 그 사람들의 창의적인 영혼이나 크리에이티브적인 영혼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들도 가슴에 텅 빈 부분이 있고, 내면에 슬픔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오스틴이 이 역할을 따낸 것이 아니라 오스틴과 엘비스의 영혼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엘비스”의 후반부에는 뜻밖에도 “아비정전”의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발 없는 새’ 이야기입니다. “발 없는 새 얘기 알아? 땅에 내리지 못해 평생을 하늘에서 살지. 지치면 날개를 펴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잠들어.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리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엘비스는 불멸의 히트곡 ‘언체인드 멜로디’을 부릅니다. 빈티지한 질감을 가진 영상과 영혼이 담긴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진짜 엘비스인지 배우 오스틴인지 헷갈릴 정도로 겹쳐 보이게 만듭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오스틴이 연기했고 노래는 실제 엘비스의 목소리를 썼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은 언체인드 멜로디를 부르던 영화 속 엘비스가 실제 엘비스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엘비스가 살아있을 때는 TV에서도 엘비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가 그리울 정도의 정서를 품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새삼 청춘의 엘비스가 그리워집니다. 마치 김광석이 그리워지듯이요. 젊은 영혼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과 ‘몰아’의 경지가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의 하얀 티셔츠를 입은 말론 브란도, “이유없는 반항(1955)”에서 청바지와 가죽 점퍼를 입은 제임스 딘, 그리고 민소매 흰색 속옷 바람으로 맘보 춤을 추던 “아비정전(1990)”의 장국영. 그 모두가 엘비스에 있었습니다. 하나 아쉬운 건 그런 엘비스의 추억을 고즈넉히 상상하기엔 영화가 너무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쩌면 20세기의 BTS에 맞는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