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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12. 2021

'역설'로만 표현되는 순간들

모순적인 삶과 양가적인 감정



나는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데 수업 내용 외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아마 '이거 배워서 어디에 써요?'일 것이다. 문학에서 수사법, 특히 시에서의 표현방법을 배울 때 많이 나오는 질문이다. 그렇다. 당장 역설법을 배운다고 해서 실용적으로 어딘가에 쓸 일이 있는가? 답은 '없다'이다. 모두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도 아니고, 입시가 끝나고 나면 잊어버려도 삶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텐데 왜 그 많은 표현방법을 외우고, 시에 적용하는 연습을 해야 할까. 외워도 외워지지 않을 때 혹은 문제를 아무리 풀어도 도저히 감이 오지 않을 때, 학생들은 토로하듯이 그렇게 묻는다. 답을 줘야 할 때 잠시 망설여지는 것은 학생들의 질문에는 답보다 한탄의 의미가 짙다고 느껴져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김현의 말을 빌려 문학의 무용론에 대해 떠들 수도 있겠지만 그냥 간략하게 대답하는 편이다.


"살다 보면 그 방법으로만 표현되는 순간들이 있어. 제대로 표현 못 하고 살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느껴져."


이러한 설명 역시 학생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문학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저 문장보다 더 적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살다 보면 도저히 그런 수사가 아니고서는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감정들을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들이 온다. 부사와 수사를 뺀 실용문으로는 도저히 형언해낼 수 없는 순간들이. 그런 순간을 언어로 빚어내야 하는 것은 첫째로, 상대방에게 내 상황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표현의 범위와 한계가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고 또 오해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다.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나를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더 무서운 것은 나를 오해할 수도 없다. 오독의 여지조차 없는 관계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두 번째, 나 스스로에게 내 상황과 감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나라는 존재가 보고 느끼는 것들은 얼마나 찰나의 것들이며 불가해한 것인지. '하루에 5시간을 자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없이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나의 상황을 간결하게 나타내는 문장이지만, 이 문장만으로는 나의 방황, 나의 갈피 없음, 절망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내가 이토록 잠 못 드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 나는 나에게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문장의 표현을 체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수많은 수사법 중 삶을 설명하는 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역설법이지 않을까. 


역설법 : 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수사법


현대 사회는 모순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안다. 아무 생산도 하지 않는 사람이 부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시간을, 육체를, 심지어 영혼까지 내놓은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돈을 버는 방법은 누군가가 내 아파트를 비싸게 사주는 것이고 내가 아파트를 사려면 누군가가 나에게 아파트를 싸게 팔아줘야 한다. 내 자식에게 좋은 것들만 물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환경과 기후에는 무관심하다. 이런 자본주의와 현 산업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의미조차 없을 정도로 당연시되어 있다. 정치적인 알력이나 국제 정세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살기 위해서 죽을 것처럼 산다. 젊은이들은 죽음이 예비되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데 사실 도처에 죽음이 널려있다. 


이런 세상을 역설이 아닌 방법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를 매시간, 매분으로 나눠 살고 있음에도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는데도 내가 내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 출발지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목적지에서도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내가 분명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은 모두 역설적인 생각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사랑의 기술』에서 "현대인들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이라고 표현했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시간을 아끼고 그렇게 아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역설의 문장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내는 내 마음 역시 양가적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웬만큼 무던한 사람들도 자신이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은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인간이란 왜 이렇게 복잡하면서 단순한 존재인지. 나도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상충들로 괴로워했었다. 내 머리와 내 마음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도저히 맞물리지 않는 경험들. 가령 내 머리는 당장 헤어져야 한다고 외치는데 내 마음은 도저히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을 때, 나의 일상을 갉아먹는 일에서 오히려 내 삶의 에너지가 고양됨을 느낄 때가 그랬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느껴지는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특히 괴로웠다. 자면서도 계속 이어지지 않는 생각들이 나열되었고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태도를 바꾸지 못하는 자신을 응시하는 것은 내 내면에 있는 나약함과 저열함을 모두 인정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살지 말자, 하는 마음과 이렇게 살고 싶다, 라는 마음이 크게 부딪칠 땐 죽고 싶었다. 우스웠다. 이렇게 살고 싶어서 차라리 죽고 싶어 지다니.


그 순간들을 지나왔지만 여전히 내 감정은 여전히 양가적이다.


행복을 바라면서도 내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가벼운 우울과 슬픔이 나의 본질이라고 느껴질 때가 그렇다. 창피하지만―20대 중반까지는 "내 진짜 모습은 어둡고 우울하지만 겉으로는 이렇게나 밝고 긍정적이지, 내 밑바닥을 보고도 사랑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았다. 사실 어둡고 우울한 것도 내 모습의 부분이고 밝고 긍정적인 나도 내 모습의 일부인데 '밝음과 어둠'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편협한 시각이 나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어둠의 시간과 여명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경시하고 나 자신의 명암만 뚜렷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철없는 생각이었다. 나 자신만 깊게 들여다보고 남들의 삶은 훑어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다시 바꿔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밝고 긍정적이면서도 우울하고, 사람을 믿고 싶으면서도 불신하고, 사실은 믿고 싶기 때문에 불신하는 것인데, 이런 내 모습까지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믿고 싶기 때문에 불신하는 모순을 안은 채로 사랑에 빠지고, 친구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나서 마음이 편해졌다. 모두가 다면체의 얼굴을 하고 있고 모순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체감한 것은 분명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그때의 메모들을 보면 많이 머쓱하다. 왜 그렇게 내 안에 모순을 견디기 힘들어했을까, 삶 자체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아주 큰 역설인데.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양가적인 감정은 모순을 넘어서 종종 충돌, 혹은 위선이나 위악으로 불린다. 

서로 적당한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험담은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그때는 그렇게 말해놓고'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말이다. 사람을 납작한 평면으로 가정했을 때나 가능한 말 아닌가. "엄청 밝은 '척'하더니 사실은 우울증 환자였대"라는 말의 폭력성, "예의 바르게 보였는데 뒤에서 고소 준비를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라는 말의 편협함. 내가 이 사람의 모든 면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넘어서 '여태까지가 다 가식이었다'거나 '그렇게 보이고 싶었나 보다'로 해석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모두가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이 자명한데 말이다. 


이윤기의 「숨은 그림 찾기」 연작에는 구두쇠이며 부정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하 사장이 자신의 후원자임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우리가 직선이라고 믿었던 것이 때로는 곡선일 수도 있다는 대사는 독자에게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단순히 서술자를 '위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선하고 어떤 면에서는 악하고 어떤 면에선 통찰력이 있지만 다른 면으로는 편협한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인 것이 아닐까?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양가적인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상대방의 사랑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상대방이 변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사람. "너 변했어"라는 말에서 '너의 사랑이 변하지 않은 것이면 좋겠다'라는 절박한 소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게나 안온한 일상을 갈구해놓고 막상 자신이 안온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다시 스스로의 인생을 불행에 담그려는 사람은 또 어떤가. "이제는 쉽게 살고 싶다"라고 말할 때는 '지금의 삶은 어렵지만 생생하다'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이 두려워 애초에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려는 사람. 동정받기가 싫어서 상대방을 먼저 동정해버리는 사람…. 


그러고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야말로 가장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는 MJ에게 말한다. "더 강해진 걸 느끼는 동시에 더 약해진 걸 느낄 거야." 사랑을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동시에 그 사람이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될 것이라는 느낌. 사랑을 이보다 더 명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다. 몇 번이고 돌려보고 감탄했던 고백의 문장은 역설로 빚어져있다.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는 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무엇도 나를 더 행복하게, 더 슬프게 하지는 못하니까. 너 말고는." 한 번이라도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의할 만한, 설명이 필요 없는 문장.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사실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며 인생의 구절로 꼽히는 문장, 영화 <아가씨>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대사. 이는 히데코의 상황과 숙희에 대한 감정을 압축한 한 문장이다. 숙희는 히데코의 '여태까지의 인생'을 망치러 왔다. 그리고, 히데코를 인생에서 구원했다. 역시나 역설이 아니라면 가질 수 없었던 울림이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역설이라는 수사야말로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랑, 우리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수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혹시나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어긋남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이 삶을 잘 살아내고 있음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랑해서 미워하고 미워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모순, 완벽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순들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니까.


나탈리 크랍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다. "노르베르트 그뢰벤은 나아가 겉보기에 모순적인 성격을 자신 속에 어우러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창조적인 사람의 핵심능력이라고 본다." 내가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 부딪친다면, 내가 원하는 나와 실제의 나의 삶이 어긋난다면 이 문장을 곱씹어보면 어떨까. 이 모순적인 성격을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내가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라고. 그 부딪침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고, 깨지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 나의 삶을 조각하는 끌이 되어줄 것이라고. 

그리고 이미 1990년대에 양귀자는 『모순』에서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제 내 안의 모순을 긍정할 것이다. 역설로 삶을 살아내고 불완전하므로 완전하게 살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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