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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17. 2021

'반어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화자의 의도를 어떻게 알아요?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수업 시간,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수업할 땐 각오해야 할 일이 있다. 매 학기마다 한 번씩은 꼭 나오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일이다.


"쌤, 이게 왜 반어법이에요?"


시 구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가 왜 반어법인지는 이미 5분 전에 설명을 다 했다. 화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을 위해 꽃을 뿌려주어 축복을 빌 정도로 임을 사랑하고 있다, 꽃잎은 화자의 분신이다, 떠나는 임 입장에서는 꽃잎을 사뿐히 밟는 것이지만 화자에겐 짓밟히는 슬픔이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라는 비장한 다짐은 '울 수밖에 없다'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구구절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했다고 해서, 그 학생이 수업을 듣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진짜 안 울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사실 수업 시간에 나오는 '엉뚱한 질문'은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없는 성격의 한 학생이 총대를 메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속으로 같은 것을 궁금해하면서도 질문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의외로 많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질문이 나오면 우선 자세하게 답변을 해줘야 한다. 매 학기 나오는 질문이므로 아주 익숙하게,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해준다. 시에서는 화자가 처한 상황과 태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지금 이 화자는 이별의 상황에 처해있고'에서 '사뿐히 즈려밟고'까지 다시. 그런 다음 반어법의 정의를 다시 읊어준다.


반어법 : 겉으로 표현한 내용과 속마음에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말함으로써 독자에게 인상을 강하게 주고 문장의 변화를 주는 표현법.


그러니까 화자는 지금 '이별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령 선생님의 해석에 의하면 절절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는 수업 시간엔 생략한다. 교과서의 해석 방향에 맞추어야 하니까.) 교과서에서 말하는 이 시의 주제도 '이별의 정한'이다. 그런데 슬픔을 이야기하면서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겉으로 표현한 내용과 속마음이 반대니까 반어법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학생이 납득을 하면 끝이다. 그런데 꼭,


"근데 이 사람이 진짜 울고 싶은지 안 울고 싶은지 어떻게 알아요."


이 질문이 나온다면 어쩔 수 없다. 수업이 다 끝나고 난 뒤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수밖에. 나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학원 강사니까. 학원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은 대다수가 빨리 진도를 나가고 싶어 하고 문학적 비평이나 철학적 사색을 배우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나올 만한 지식을 배우러 오는 것이므로, 한 학생의 순수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데에 수업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난 뒤 학생과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물론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아니에요, 저 이해됐어요"라고 말하는 학생은 특별면담시간을 추가한다.


예술, 그중에서도 시는 물론 '독자가 어떻게 해석을 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문학을 천편일률적으로 배워서 객관식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 맞느냐, 우리나라 문학 교육이 잘못되어있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나도 우리나라 문학 교육에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무작정 '시를 느끼고 자신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 교과서 해석을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말엔 반박을 하고 싶다. 독자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말이 문학을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교육 현장에서 문학을 교수학습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나는 문학 교육의 목적은 결과적으로 '언어를 해석하는 법,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체화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해나간다. 언어를 제대로 다룰 수 있으려면 기본적인 언어의 쓰임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림을 배울 때 원근법과 명암을 먼저 배우듯이, 요리를 배울 때 칼질과 불 조절에 대해 먼저 배워야 하듯이. 그러니 중고등학교 때 시에 나타난 단어, 단어의 배열, 문장, 문장의 흐름을 바탕으로 '화자의 정서'와 '화자의 태도'를 먼저 파악하는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문학, 특히 시의 언어는 정교하게 갈고 닦인, 그 단어가 그 자리에 놓여있어야만 하는 '적확성'의 언어다. 부사어 하나, 서술어 하나가 시의 맥락과 뉘앙스 전체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를 다루고 해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텍스트이다.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ㅡ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윤동주-소년) 이런 시구를 읽고 화자가 순이에게 느끼는 감정을 헤아리는 것은 중요한 사회적 연습일 수밖에 없다. 그 연습이 되어있지 않다면 시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해석은 고사하고 표현된 언어 밑에 존재하는 의도와 맥락조차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 해석의 문제 차원이 아니다. 발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상대방의 언어를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먼저 학생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무작정 '교과서니까 외워'식으로 하면 수업시간에 저런 질문을 던지고야 마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수 없고, 그러면 이런 학생들은 '역시 국어는 나랑 안 맞는다'며 지레 떨어져 나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김소월이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진달래꽃>을 읽는 것이지 김소월을 읽는 것이 아니다. 작품 안에 드러난 언어들로 이 시를 해석해내야 하고, 화자와 작가는 절대 동의어가 아니다. 이 시에서 보이는 화자의 모습은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임이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난다는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정말로 울기 싫어"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나 정말 눈물 날 것 같아"라는 표현이니까 그것 역시 울어버리고 말 것 같다는 뜻이고 그 역시 반어법이라고.


그런데도 '그래서 화자의 의도를 어떻게 아냐고요'라고 대답하는 학생이 간혹 있다. 이 질문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의도라는 것은 발화자 본인만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표현된 문장만 보고 그 사람의 의도를 어떻게 추론할 수 있느냐, 하는 말이다. 그런 학생들에겐 선생님과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어보자고 한다. 네가 지금 선생님의 말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예 언어를 다루는 방법, 의사소통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물론 "아, 아니에요. 이해됐어요"라고 말하는 학생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독서활동을 시킨다.


그리고 나면 또 산 넘어 산. <진달래꽃>이 실려 있는 교과서의 문제집들은 꼭 반어법의 예시를 찾으라고 한다. 당연히 따라 나오는 질문이 있다.


"쌤, 여기 반어법이 어디 있어요?"


반어법으로 자주 나오는 예시는 역시나 김광규의 <묘비명>이다.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적이 없대. 그럼 이 사람은 정신적 가치를 전혀 추구하지 않은 사람이지? 근데 이 사람이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대. 그러면 화자가 과연 이 사람을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어?"

아리송해하는 학생들의 표정. 학생들은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훌륭한 거 아니에요?"


문학적 소양은 없지만 자본주의의 진리는 뼛속으로 체득한 학생들 같으니.




반어법의 개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예시를 들어보라고 하면 보통은 비꼬는 의미의 예시가 나온다. 단순히 학생들이 비관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학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접한 반어법의 용법들이 대개 조롱이나 비꼼의 의미로 쓰여서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무의식적으로 드는 예시는 자신들이 많이 들어 본 말인 경우가 많다. 지각을 자주 하는 학생은 반어법의 예로 "5분밖에 안 늦었다니, 아주 성실하구나"를 들었고 의문이 들면 곧바로 질문을 해야 하는 성격의 학생은 "그래, 너 잘났다"를 들었다. 그 외에도 엇비슷하다. "너무 보기 좋다."(옷을 그냥 잡히는 대로 입고 오는 친구의 경우) "참 잘한다."(성격이 꼼꼼하지 않아 뭐든 떨어뜨리고 잃어버리고 다니는 친구의 경우) "아휴 똑똑하다 서울대 가겠다"(내신 등급이 5등급인 친구의 경우) 등등.  


물론 반어법은 조롱이나 비꼬는 의도로도 훌륭한 수사법이다. 반어는 그 자체로 위트가 되고 훌륭한 풍자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온 이몽룡이 춘향이를 시험해보려 "내 수청도 거절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기가 막힌 춘향은 분노로 일갈하는 대신 반어로 말한다. "내려오는 관장마다 개개이 명관이로구나." 이 짧은 문장은 조선 후기, 지배계층에 대한 서민의 위트이며 블랙 유머다. "어떻게 내려오는 관장마다 모두 수청 타령을 하는지, 너무도 절망적이다"라는 직설적인 문장과 비교하면 단연 반어를 쓰는 편이 말의 맛이 살면서 허탈한 춘향의 심정을 부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님이 열심히 만들어준 부교재를 하나도 안 풀다니, 너는 정말 수업에 대한 열의도 없고 선생님에 대한 예의도 없구나." 이 문장보다 "정말 고마워. 선생님이 밤새 만든 교재 이렇게 새 것으로 아껴줘서 선생님 너무 행복해." 이 문장이 학생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데 더 용이하다. (용이하다는 것이 교육적으로 꼭 옳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또한 반어는 사회와 개인을 관통하는 관점이 될 때가 많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는 제목 그대로 반어다. 일제강점기, 수탈과 억압이 극에 달한 1930년대를 주인공 윤직원은 '태평천하'라고 호명한다. 이것은 자신의 부귀와 안위를 위해서는 나라 같은 것은 망해버려도 그만인 친일파 윤직원의 현실인식을 대변한다. 아내가 죽은 처절하고 비참한 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 명명한 현진건의 소설도 그러하다.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 피식민지 국민에게 '운수 좋은 날'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사실 비극의 전조일 뿐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반어를 사랑과 연민을 나타내는 용법에 쓸 때가 더 마음에 짙게 내려앉는다. 다시 <진달래꽃>으로 돌아가 보자. 이어령 선생님의 해석을 참고하면 <진달래꽃>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는 가정적 용법을 사용하여 절절한 사랑을 드러내는 시다. 우리가 깊은 사랑에 빠져있을 때, 이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내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강렬한 행복의 순간, 죽음을 떠올리며 근원적인 생의 충동을 느끼듯이. 그러면 이 시의 '말없이 보내드리우리다'부터가 반어가 된다. '보내드리우는' 상황 밑에 숨겨진 의미는 '이렇게나 너를 사랑한다'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용법은 또 어떠한가. 우리의 할머니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를 '못난이'로 부른다. 예쁜 아기는 귀신이 잡아갈까 봐 그렇다는 토속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인데, 단순히 미신으로 치부하기에는 손주를 아끼는 그 마음이 얼마나 순하고 맑은지 절로 웃음이 난다. 깜찍한 행동을 하는 아이를 보고 '얄밉다'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닐까. 이렇게 내 발을 동동 구르게 할 정도로 귀여운 것이, 나를 온통 사로잡은 것이 '얄미울' 정도라는 사랑의 수사법.


나도 어릴 땐 외할머니가 나를 '메주'라고 불러 속상했던 적이 있었다. 메주라니, 직관적으로 기분이 나쁜 별명 아닌가. 그런데 '메주'라고 부를 때의 말투와 어조는 얼마나 다정함으로 충만했는지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애칭에 담긴 의미는 조금 자라고 난 뒤에 알았다. 어릴 때부터 폐결핵 등을 앓았던 손녀, 그 손녀를 귀신이 잡아갈까 봐 그렇게나 얄궂은 별명으로 불렀다는 것을.


말을 빨리 떼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하고 어른의 말에 의문을 제시하는 아이를 보고 "아휴, 말이나 못 하면"이라고 말할 때 부모의 얼굴에 담긴 뿌듯한 표정을 보자. "주말엔 좀 쉬고 싶은데 애들이 아빠 껌딱지야. 아주 피곤해 죽겠어."라고 말할 때 입가에 걸쳐 있는 은은한 미소는 또 어떤가. 맞다. 언어는 종종 우리를 속일 때가 있다. 표정과 말투, 말로 할 때 느껴지는 미묘한 박자와 높낮이가 진짜인 순간들. 반어는 표현과 속마음을 뒤집어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한 번 더 '상대의 속마음'을 간파하게 하는 재미를 준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지"라고 폄하하기엔 그 섬세한 말의 맛과 멋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한다.


그런데 어릴 때 별명에 대한 내 해석을 들은 오빠 강다구(당연히 가명이다. 애칭은 아니다. 그냥 가명이다)는 "아냐. 너 어렸을 때 진짜 못생겼어서 그래."라고 했다. 오빠의 말도 반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하여간 유치하게, 동생이 이쁘면 이쁘다고 하지. 그러니까 학생의 질문대로 '의도를 어떻게 알아요'식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표현된 언어를 통해 발화자의 의도를 추측하다고 해도 그것이 상대방이 진짜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내뱉은 말의 의도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표현된 문장으로 상대방의 의도를 추론하고,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문장은 상대방의 반어로 생각해버리는 것도 맘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적어도 "너 말 되게 잘한다"라는 문장을 듣고 '지금 입만 살았다고 비꼬는 반어인가?'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왜곡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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