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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18. 2021

과장법은 마치 MSG 같다

감칠맛을 더해주지만 너무 많이 쓰면 입맛이 떫다


고전소설 <흥부전>은 수도 없이 수업을 한 작품인데도 마음이 저릿해질 때가 있다. 소설 속 흥부가 당장 자식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어 고을의 좌수가 맞아야 할 곤장을 대신 맞아주고 돈을 받는 '매품팔이'를 하러 나가는 장면이 그런 순간이다. 흥부가 병영에 도착했을 때 매품팔이를 하러 온 사람은 흥부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미 소작을 부칠 땅조차 없는 조선의 백성들은 매품팔이를 하러 아침부터 병영에 모여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매품을 팔자는 합의를 한 뒤 모인 사람들 각각 자신의 가난을 자랑한다. '부엌의 쥐가 밥알을 주우러 다니다가 다리에 가래톳이 섰다'라든가 '아내와 둘이 안고 누우면 상투가 울 밖으로 나가고 아내의 엉덩이는 담 밖으로 나간다'라든가 하는 진술은 명백한 과장법이다. 교과서에서는 이 과장을 통해 해학성을 가르친다. 해학은 대상에 대해 호감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웃음과 익살이 있는 형상화의 방법이다. 이 서러운 과장법에는 조선 후기, 백성들의 가난과 한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익살스러운 표현 덕분에 깔깔 웃다가, 웃음이 사라질 때는 씁쓸한 연민의 감정이 남는다.


과장은 해학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쓰이지만 풍자적 상황에서도 자주 쓰인다. <흥부전>은 흥부의 가난함도 과장하지만 놀부의 악행도 과장한다. 과장의 대립은 흥부와 놀부로 대표되는 선과 악의 명백한 대립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물신 숭배자 놀부를 희화화한다.

그런 의미로 코미디에서는 과장법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계층이나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과장적 장치가 필수다. 개그콘서트에서 보아왔던 개그들을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후배들에게는 과도한 요구를 하면서 선배에게는 아첨을 하는 캐릭터를 그려낸 '분장실의 강 선생 님' 속 안영미는 과장을 통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을 만들어냈다. 유튜브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그맨들의 'B대면 데이트'도 과장을 통해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웃음을 유발한다. 우리는 '이호창'을 만나본 적 없지만 어디에선가 보아 온 인물 같아 몰입하기 쉽다. 그러고 나면 그 '전형성'을 비판하기 위해도 과장적 장치가 동원된다. 비판당할 면만을 극대화하여 과장하면 인물이나 사회에 대한 성찰이 뒤따른다.


'과장법'은 수사법의 일종이지만 사실 과장 그 자체는 앞서 말한 코미디부터 시작해 일상생활 곳곳에서 너무도 흔하게 쓰이고 있다. 아이들도 말을 배우면서 과장과 극단적 축소를 쉽게 사용한다. 그러니 굳이 과장법의 사전적 정의나 수사학적 특성을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장법이 쓰인 문학적 예시를 몇 개만 확인해도 우리가 얼마나 과장법에 익숙한지, 과장법이 얼마나 효과적인 수사적 방법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고 표현했다. 화자가 간절히 희구하는 대상인 모란, 그 모란이 지고 나면 화자는 삼백예순 날을 '하냥'(늘) 운다고 표현했다. 1년 365일 중에 360일을 눈물로 보낸다는 것은 당연히 슬픔의 깊이를 나타내기 위한 수치적 과장이다. 과장을 뺀 담백한 문장과 비교하면 단연 정감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그녀는 아마 갈비뼈가 하나쯤 부러졌을 거라고, 그게 아니면 다른 거라도, 영원히 그의 흔적을 남길 무언가가 생겼을 거라고 확신했다." 앤드루 포터의 『어떤 날들』에 나오는 문장이다. 연인을 너무도 꽉 끌어안은 나머지 갈비뼈가 하나쯤 부러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과장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사랑'이라는 것을 가시화한 문장이다. 역시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표현으로는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요즘, 과장의 부작용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학생들이 자주 쓰는 문장이 자꾸 가슴을 옥죄는 까닭이다.


"선생님, 사람이 어떻게 숨만 쉬고 공부만 합니까."


한 학생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숙제를 조금 많이 내주거나, 진도를 급하게 나갈 때마다 들을 수 있는 말인데 저런 문장이 나오면 많은 학생들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학생들의 얄팍한 과장법의 실사용 예시―유사한 세트로는 "사람이 이걸 어떻게 해요" "세종대왕도 이건 못 풀어요" 등등이 있다. 보통은 "전교 1등도 그런 소린 안 할 거야" "그럼 이걸 다 한 선배들은 사람 아니고 뭔데? 선배 비하 발언하는 거야?" "너는 전주이씨 문중한테 소송을 당해봐야 돼" 등으로 적당히 받아치는데 (학생들은 '국문과 나오면 다 말싸움 잘하는 거예요?'라고 감탄해준다) 듣는 순간 마음이 쿵, 하는 문장이 있다.


"아, 저 진짜 죽고 싶어요."


시험 전날 예비시험을 보겠다는 말이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들다니. 이런 말을 들으면 죄책감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감정이 든다.

이상한 일이다. 죽음에 관련된 과장은 도처에 널릴 대로 널리지 않았는가. 한 아이돌그룹의 노래 제목은 '죽겠다'이고 나 역시 어떨 땐 '이러다 과로사하겠다'라는 말을 가끔 농담처럼 하지만, 학생들이 저런 말을 하면 가만히 멈춰 서게 된다. 사고와 행동이 일시 정지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명백한 과장법이라는 것을, 사실 과장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우스울 만큼 관용적인 어구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렇다. '자살말린다'라는 표현이 한창 유행할 때는 더 그랬다. 제발 그런 말 좀 쓰지 말아 달라고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부탁을 했는데 그런 나의 태도에 아이들은 오히려 놀라워했다. 쌤, 왜 진짜로 슬퍼하고 그래요 그냥 하는 말이에요. 그냥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런 말일 수 있는지 그 위로가 오히려 더 아프고 슬펐다. 우리는 왜 '죽고 싶은' 기분이 관용 어구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과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한 스푼의 괴로움에 이스트를 잔뜩 넣어서 부풀려 '죽고 싶다'로 표현하는 것이겠지만, 애초 그 한 스푼의 괴로움이 없다면 그런 과장이 가능할 리 없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말하는 과장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해 본다. 쉽게 죽음이나 자살을 입에 올려 오히려 삶의 절박함을 알게 되는 거라면? 혹여 '죽고 싶은' 기분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삶의 동력이 되는 거라면? 하지만 그 모든 '좋은 해석'은 무력하다. 모의고사에서 한 문제를 알면서도 실수로 틀렸다. 그것은 속상하고 괴로운 일이다. 학생은 말한다. '진짜 자살말린다'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삶을 경시하는 태도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기쁨이나 행복을 과장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관용 어구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행복한 나머지 삶을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라는 관용 어구는 발화자의 들뜬 감정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듣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특히나 그 기쁨이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더욱. 이렇게나 기쁘게 만들었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었다가 침대에 누우면 '이 정도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삶을 살았다니'하는 생각이 들면 울적해진다. 특히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님이 그런 말을 할 때 더더욱 그렇다. 반대로 과장법을 써준다면 어떨까,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너무너무 행복해서 1000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해준다면 부모의 얼굴에서 다가오고야 말 영원한 이별을 느끼는 자식들이 잠시나마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걸 깨달은 이후로 나는 함께 있는 사람에게 "너무 좋아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 때문인지 과장의 일상적인 용례를 생각하면―과장의 극단적인 사용이 오히려 상황을 더 비관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수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글인데 (아무리 다양한 방법으로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이별을 선고받았다"라고 표현하면 될 일을 "차였다"라고 극단적인 언어로 과장함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더 비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과장법의 남발은 오히려 상황을 바라보는 객관적 태도를 잃게 만들고 자신의 상황을 더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무심하게 굴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일을 '찬바람 쌩쌩 불도록 차갑게 굴었다'라고 표현하면 상대방은 무관심한 사람에서 냉정한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관심의 대상에서 냉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무엇일까?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신경림, 동해바다ㅡ후포에서) 간결하고 쉬운 문장이지만 과장법을 통해 핵심을 꿰뚫을 수 있다. 친구가 저지른 작은 잘못이나 실수, 겨우 티끌만 한 실수가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날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날은 나의 감정이 상황을 또 상대방을 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장은 상대방을 왜곡할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도 왜곡한다. 이런 과장은 문장으로 만들고 나면 혀 밑에 바삭거리는 결정을 남긴다. 삼켜도 삼켜지지 않고 뱉어버리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결정을.


비관적인 사람들은 대개 '부정의 과장'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나 응당 할 수 있는 실수로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라고 과장해서 생각한다. 통화 중 상대방이 피곤해하면 '이제 나와의 통화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라고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겨우 서른이 되었을 뿐인데도 자신에게 남은 가능성이 많이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부정의 감정을 과장'하기도 한다. 모임이 끝나고 난 뒤 느껴지는 노곤함을 '완전히 방전되었다'라고 표현하거나 찰나의 모욕감을 '인간으로서 부정당한 느낌'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이다. 그 이후엔 정말로 방전이 되었다고, 인간으로서 부정당했다고 확신하게 되고 다시 또 "나는 인간 군상과 전혀 맞지 않으며 세상은 나를 넘어뜨리려고 설계되었다"라는 과장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끊임없이 부정을 과장하면 삶을 살아내는 일 자체가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모든 일이 '죽고 싶다'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도 부정의 과장을 끊어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또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감정의 진폭이 큰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안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이 나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다가, 또 작은 한숨 한 번에도 이제 나에게 질렸다는 확신까지 나아간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달빛을 바라보며 인간임을 행복해하다가 모든 문제가 인간으로 태어난 원죄(기독교에서 말하는 의미는 아니다)때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이 많아 잠 못 드는 날들에는 보통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징후를 하나 포착하면 그것에 살을 붙여 과장해대곤 했다. 그리고 이제는, 과장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징후를 하나 포착하면 최대한 담백하고 객관적인 언어로 그 사실을 표현해보려고 한다.


'입시설명회에서 실수를 했다. 며칠 동안 원고를 쓰고, 예행연습까지 철저히 했는데도 실수를 해버렸다. 이후에 당황해서 버벅거리기까지 했으니 앉아있던 사람들은 당연히 나의 전문성을 의심했을 것이다.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발표도 제대로 못한다고 비웃었을 것이 분명하다. 순간의 그 싸늘했던 공기가 그렇게 방증한다. 나는 오늘의 설명회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원래의 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하던 생각들이다. 논리적 비약과 과장적인 판단으로 오히려 본질이 훼손되었다. 내가 정확히 어떤 실수를 했는지, 또 다음 발표에도 가지고 가야 할 긍정적인 요소는 무엇이었는지, 개선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는 모두 사라지고 '완전히 실패한 나'만 남았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일기에도 이렇게 기록을 하고, 부정의 과장이 나타나려는 순간 의식적으로 생각을 바꾼다.

'입시설명회 발표 중 실수를 했다. 며칠 동안 원고를 쓰고, 예행연습을 철저히 했는데 미처 수정하지 못한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을 그대로 읽어버렸다. 청중들이 그 순간 나의 전문성에 대해 의심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실수를 빠르게 정정하고 프레젠테이션을 면밀히 검토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이후 실수가 마음에 걸려 두 번 문장을 버벅거렸다. 하지만 변화한 입시 안에 대해서 빠짐없이 설명을 했고 수업 커리큘럼을 설명할 땐 원고에 없는 예시를 적절히 들었다.'


이 변화는 아주 중요하다. 내가 지금 브런치에 이렇게 글을 연재하게 된 것도 이 변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었을 일이다. 부정을 과장하지 않는 것은 현실적인 일이다. 부정을 과장하는 사람은 냉소적인 사람, 비관적인 사람밖에 되지 못한다.


과장은 물론 훌륭한 표현법이다. '예뻐 죽겠다'라는 말로만 표현되는 깊은 애착이 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라거나 '단장이 끊어지는 슬픔'같은 관용어구로 굳어진 과장은 그 어떤 말보다 압축적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불행과 슬픔을 과장하는 일엔 익숙해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세상이 나를 버렸다"라는 문장은 자신을 정말로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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