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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19. 2021

나 아닌 것들로 나를 이해하는 것 - 객관적 상관물

학생들은 객관적 상관물이 자기랑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


수업을 할 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프로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마음속 깊이 경탄하게 되는 작품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어조에 애정이 묻어 나오고 만다. 눈치 빠른 학생들은 '선생님 이 시 엄청 좋아하시네요'라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니 애초에 숨기려고 연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와 1년만 수업을 해도 학생들이 다 알아차리는 나의 '최애 시인'은 백석이다. 그리고 백석의 시는 시를 지루한 것, 재미없는 것,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던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러 교과서에 수록되어있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수업을 하는 나도, 듣는 학생들도 가만히 사색하게 되는 시다. 처음 읽으면 감탄하고 한 줄 한 줄 샅샅이 들여다보면 사랑하게 되고 다시 읽으면 마치 내 마음을 시인이 그러모아 적어놓은 것만 같은 시.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제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화자가 살고 있는 곳의 주소, 곧 편지에 적힌 발신인 주소다. 가족들과 떨어져 쓸쓸한 거리 끝을 헤매던 화자는 어느 목수(박시봉)의 집에 세 들어 살게 된다. 춥고 누긋한 방에 누워 화자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라는 말의 문학적 표현으로 학생들은 우선 이 표현에서 작게 감탄을 한다. 자신의 삶 자체가 무게이자 짐일 때 나는 나를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런 느낌은 고등학생만 되어도 다 느껴본 압박이므로. 그러한 상황에서 화자는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한다. 그르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 절망이 엄습한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그러나'를 기점으로 태도를 바꾼다. 끊임없이 가라앉던 화자는 이제 고개를 들어,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상승한다. 화자를 일으킨 힘은 역설적으로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들다는 인식이다. 그렇다. 비단 이 작품이 창작된 일제강점기 시기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노력대로, 능력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다. 상황과 시대가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이 삶의 진실이다. 이 인식으로 말미암아 화자는 절망에서 벗어난다. 자리에 누워있던 화자가 무릎을 꿇어본다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화자는 떠올린다. '외로이' 선 채로 '눈'을 맞는, 그러니까 외로이 시련과 고난을 묵묵히 견디어내고 있을 '갈매나무'를. 갈매나무는 객관적으로는 시련의 상황―한겨울에 눈을 맞는―에 처해있으나 '굳고 정한(맑고 깨끗한)' 상태다. 이 갈매나무는 화자의 내적 의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외로움과 가난함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것으로 타락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굳고 깨끗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대다수의 교과서는 이 작품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학습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래서 문제집들도 객관적 상관물의 개념을 이해했는지, 다른 작품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찾아 적용할 수 있는지 등을 묻는 문제들을 다수 출제한다. 학생들은 '시 감동적으로 다 읽었는데 문제가 감동 다 망친다'라고 얘기하고, 나는 일정 부분 그에 공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달랜다. 그렇다면 대체 객관적 상관물이란 무엇이고 왜 학생들의 감동을 망쳐가며까지 강조의 대상이 될까?


객관적 상관물은 문학 작품의 다양한 표현방식 가운데 하나로 글쓴이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특징이나 모양, 행동 등에 의미를 부여해서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담아내는 표현 방식을 이야기한다.  


객관적 상관물에 대한 문학적 논쟁이나 비판은 다루지 않기로 한다. 내가 설명을 해낼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표현 방법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상의 것들이므로. 한 학생은 나에게 "객관적 상관물이 저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고등래퍼에 나가도 될 라임"이라고 칭찬해주었지만 쉽사리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학을 배우는 것, 시의 표현방법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객관적 상관물'이 그 학생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객관적 상관물은 고등 문학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정작 '그런 것 처음 들어보는데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조어 자체가 어렵게 느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학생의 말대로 자신의 인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여서일까. 유리왕의 <황조가>의 첫 구절 '펄펄 나는 저 꾀꼬리'를 이야기하면 대다수가 내용을 안다고 하는데, 그때 다루어진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은 머릿속에서 지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실은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도.

유리왕은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암수가 서로 정다운 꾀꼬리와 대비함으로써 객관화했다. 이때 꾀꼬리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화자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자연물이다. 꾀꼬리의 처지와 대비됨으로써 '외로워라 이 내 몸은'이라고 탄식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강조된다.


그렇다면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주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는 '감정과 상황의 객관화'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 1인칭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고 다른 사람 역시 나로 살 수 없다. 아무리 타인과 감정의 파동을 일치시키려고 해도 파동은 간섭을 일으킬 뿐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차이만으로 파동을 커지고 작아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어가 있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정적인 방법으로 언어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언어의 본질적인 문제는 모두 차치하고) 1인칭의 언어, '나'에 매몰된 언어는 타인에게 공명을 일으킬 수 없다.


다시 백석의 시를 읽어보자.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리며 읽으면 더욱 좋다. 한 사나이가 아내와 가족과 떨어져 바람 부는 거리 끝을 헤매고 있다. 그러다 그 사나이는 춥고 습기 찬 방에 누워 자신의 슬픔과 가난함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그는 방 안에 누워 천근으로 내리누르는 것만 같은 삶의 중압감을 견디며 자신이 결국 삶에 압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킨다. 그는 이 중압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뚜렷이 직시한다. 내가 내 인생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나를 굴려가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무엇이다. 나를 이곳까지 굴려온 그 초월적인 무엇. 그 힘을 분명히 느끼고 나자 그는 자책과 슬픔에서 벗어난다. 다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 외로운 겨울, 밖에는 눈이 내린다. 그 눈을 맞으며 그는 떠올린다. 숲 속에 홀로 외로이 우뚝 서서 눈을 맞고 있을, 곧고 깨끗한 갈매나무를.


새로운 삶에 대한 염원, 희망, 의지 등은 단 한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경건할 정도의 굳고 정한, 고결한 인간의 표상을 본다. 갈매나무가 환기하는 '객관적 이미지'로 가능한 일이다. 이로써 1인칭의 이야기는 외롭게 선 채로 눈을 맞고 선,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 공명한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부친 이 편지는 90년을 날아 우리에게로 온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읽고 난 뒤에는 못 견디게 외로운 날에 갈매나무를 떠올린다. 그 시각적 심상은 내가 무엇이든지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는 나의 '객관적 상관물'을 사진 폴더를 정리하던 중에 알게 되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나의 취미인데, 어느 날 스캔된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같은 암시의 장면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항구에 정박해있는, 혹은 바다에 잠시 멈춰있는 배를 보면 자연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필름 카메라는 정해진 사진의 수(내가 쓰는 필름은 1 롤이 36장이다)가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누르는데도, 마치 이 장면은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정박한 배는 이미 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어진 주제다. 이미 유명한 문구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도 있지 않은가. 나는 정박해 있는 배에서 나의 의지를 본다. 숨을 고르고, 잠시 쉬고,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 잠시 나를 묶어둘 수 있는 곳. 그것은 나에게 '가족'의 상관물이다.


객관적 상관물이 개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를 보여주는 사물과 이미지를 찾으면 타인에게 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는 아니다. '나'를 객관화하여 내가 '나'의 소망과 의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반대로 객관화된 세상을 '나'의 언어로 바꾸어 1인칭화하는 과정에서 내 삶을 적어가는 작가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꾀꼬리는 나를 울게 하려고 다정한 것이 아니다. 배는 나를 위해서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갈매나무는 나를 위해 눈을 맞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나의 것으로 만들면 적어도 내 감정과 의지의 작가는 내가 될 수 있다. 내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자신의 삶에 '객관적 상관물'이 될만한 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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