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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24. 2021

다면체의 인간들과 허접한 주인공들

'평면적 인물'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



고1 국어 과목과 고2~3의 문학 과목엔 '한국 문학의 흐름(혹은 역사)'과 관련된 대단원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 이 대단원은 고전 문학에서 다뤄지는 어휘부터가 어렵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파트이지만 반대로 대다수의 학교 내신 시험에서는 아주 주요하게 출제되는 파트이다. 애초에 단원명에서 느껴지듯이 학생들이 '한국 문학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보니 고전 작품과 현대 작품을 비교·대조하라는 문제가 자주 출제된다. 그래서 구체적인 개별 작품에 들어가기에 앞서 개괄적인 개념과 유형의 차이부터 설명을 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고전 소설과 현대 소설의 차이점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아마 '인물의 유형'일 것이다. 역시나 외부지문을 엮어서라도 자주 출제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고전 소설 속 인물은 대개 '평면적 인물'이다. 흥부나 심청이를 생각하면 간단한데,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성격이 변화하지 않는 인물을 뜻한다. 물론 놀부처럼 개과천선하는 유형의 인물도 있고 <운영전>의 안평대군처럼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로 평가할 수 없는 인물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교과서에 실려있는 고전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은 끝끝내 착하거나 그럼에도 선한 인물들이다. 반대로 기어이 악하거나 모든 면에서 악한 인물들도 있다. 여기에서 권선징악이라는 고전 소설의 보편적인 주제 의식도 드러난다. 형에게 재산을 다 빼앗겨 당장 먹고 죽을 돈도 없었던 흥부는 그 와중에도 다친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면서 선행의 보상을 받게 되고 온갖 악행을 일삼던 놀부는 멀쩡한 제비 다리마저 부러뜨려 악행을 징벌 받는다. 어찌 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끝끝내 착하게 사는 것이 옳은 방법일 수 있다고, 가난하고 한 인간들이 서로를 위안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도 같다. 물론 심청이를 살리는 것이 용왕이며 흥부에게 선을 보상하는 것이 제비라는 점에서 '실제로는 선함을 보상받기가 너무도 어렵다'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반면 현대 소설 속 인물들은 '입체적 인물'이다. 입체적 인물이란 사건 전개 방식에서 성격이 변화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1925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감자>는 유교적 정조관념을 중시했던 복녀라는 인물이 자본에 의해 서서히 타락해가다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복녀의 성격 변화는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의 최여인이나 <춘향전>속 춘향이와 비교하면 더더욱 부각된다. 상황이, 시대가, 만남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가. 그리고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채 휩쓸려가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변화는 성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타락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직시하기 위해 소설 속 인물들을 배워야 한다고,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입체적'이란 다면적이라는 뜻으로 선과 악, 정의와 부정, 같은 이분법적인 대립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빛과 어둠을 가지고 있다. 마블의 드라마 <퍼니셔>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인데 그는 전쟁 트라우마의 피해자이며 약자들을 구하는 영웅임과 동시에 자신의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인자다. 그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그를 어느 쪽에서 보는지에 따라 그림자가 달라지는데.


이런 개념을 먼저 설명하고 난 다음, 교과서에 실려있는 구체적인 작품을 설명한다. 비상 문학 교과서를 예로 들면 학생들은 고전 소설 <이생규장전>과 <임경업전>을 배운다. 그 중 영웅소설인 <임경업전>의 임경업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교적 충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기능한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 자신의 안위나 성공보다 세자와 대군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 임경업이 간신 김자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충신이 사라지고 있는 조선 후기 사회를 시사하는데, 그는 어쨌든 죽어가면서까지 영웅이다.

그리고 난 다음 현대 소설 채만식의 <태평천하>와 최인훈의 <광장>을 배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를 따라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며 북한으로 밀항한다. 그러나 그가 북한 사회에서 목도한 것은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말살하는 억압으로서의 땅이다. 결국 이명준은 전쟁 중 포로가 되고, 포로송환심사에서 '중립국'행의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중립국을 선택한다. 그러나 명준은 결국 배에서 바다에 투신해 자살을 선택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명준은 이제 이념, 이상사회, 정치의 모든 허상을 깨달았고 사람을 사랍답게 하는 것을 좇으려면 죽음밖에 없다는 비극적 결론을 내렸으니까. 소설 속 명준은 점진적으로 망가지며 정신 이상의 증후들을 보인다. 사회를 변혁하려던 꿈이 있었던 명문대생 이명준의 점차적인 몰락과 체념에서 우리는 좌절이 얼마나 사람을 망가뜨리는지에 대해 배운다. 몰입을 잘 하는 학생들은 명준의 죽음에서 작게 탄식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학생들이 배우는 현대 소설 속 인물들은 대다수가 입체적 인물, 즉 다면체의 인간이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소설은 우리의 삶과 인간성을 담는 것이고 우리의 삶과 인간성 그 자체가 다면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어느 편에 서서 어떤 조명으로 비추는지에 따라 모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절대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라고 이야기한 것도 이런 맥락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인물 유형 구분의 기준이 있다. '영웅적 인물' 혹은 '재자가인형 인물'과 '평범한 인물'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 발생하기도 전인 '설화'를 이야기할 때부터 등장하는 개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 속 인물은 모두 신적이며 영웅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신의 혈통을 물려받았거나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위대한 힘과 운명을 가졌다. 우리나라 전설 속 인물들은 대개 인간이다. 보통의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이나 통찰력을 가졌지만 서양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비극적 결함'을 가져 종국에는 비참하게 되는 인간. 장수 우투리는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나 장수의 힘, 날개를 가졌지만 그의 갑옷엔 '콩 한 알'이 부족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개념들이 소설로 넘어오면 '영웅적 인물'이나 '재자가인형 인물'로 변화한다. <홍길동전>의 홍길동, 앞서 말한 <임경업전>의 임경업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천상계의 존재가 천상에서 죄를 저질러 인간세상으로 적강했다는 설정의 고전소설도 많은데 이것은 인물 자체를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 설정하는 장치다. 그들은 한 번 칼을 휘둘러 천 명씩 베고, 구름을 타고 다니고, 날씨를 조종한다. 마치 슈퍼맨처럼 말이다. 아이언맨이나 배트맨처럼 후천적으로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 그들은 은사인 도사를 만나 산에서 무술과 도술을 배운다. 어쨌든 그들도 한 번 칼을 휘둘러 천 명씩 베고, 구름을 타고 다니고, 피리 한 번으로 적들을 쓰러뜨린다.

'재자가인형 인물'은 영웅 소설과 더불어 애정 소설에서 많이 등장하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재주가 출중하고 인물마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생규장전>의 이생은 국학을 다니는 선비로 시에 탁월한 재주가 있고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담장 너머 첫눈에 최여인을 반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가장 보편적인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을 정의하자면 바로 이 단어, 재자가인형 인물 아닐까. 그들은 재벌이면서도 얼굴이 현빈이고 심지어 외계인과 도깨비가 김수현, 공유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물론 현대 소설에도 재주와 용모를 두루 갖춘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어딘가 결함을 가진, 혹은 평범한, 어쩌면 평범한 삶이라도 가지고 싶어 애를 쓰는 인물들이 더 낯익다. 특히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더더욱 그렇다. 앞서 말한 채만식의 <태평천하>의 주인공 면면을 살펴 보면, 돈은 있으나 교양이 없거나, 돈과 교양은 있으나 도덕성이 없는 인물들이 소설을 채운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돈과 교양과 도덕성을 다 갖춘 인물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경찰서에 잡혀갔기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서술자는 '말대가리'같은 천박한 별명을 인물에게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자린고비인 윤직원을 풍자하는데도 거리낌이 없다. 또 양귀자의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의 서술자와 주인공은 어떤가. 서술자는 자신의 집을 수리하러 온 사람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소시민이며 주인공은 아등바등 살아도 자식들에게 곰국 하나 맘껏 못 먹이는 무능한 가장이다. 아내의 수술비를 마련할 돈이 없어 전세 들어 사는 집의 집주인을 찾아가 도둑질을 하는 사내(윤흥길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등장하기도 하고 천연두 백신을 맞으면 힘이 약해진다고 주장하는 인물(이태준 <달밤>)도 소설의 전면에 내세워진다.  


그래서일까, 학생들은 간혹 "대체 현대소설들은 결말이 다 왜 이래요?"라고 묻곤 한다. 고전소설 속 영웅적 인물들은 대개 위업을 달성하거나, 나라를 구하여 그에 준하는 보상을 받는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소설에서 선한 이들은 복을 받는다. 초월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물론 비극적인 결말의 작품들도 있지만 현대소설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적은 숫자다. 현대 소설의 결말들은 우울한 암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겨울이면 연탄 장사를 하고 연탄이 안 팔리는 계절엔 육체노동을 하면서 또 비가 와 그마저도 할 수 없는 날엔 떼인 돈을 받으러 가리봉동에 가야 하는 임씨의 미래를 우리는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다. 서술자 역시 임씨가 아무리 성실하고 도덕적으로 살아도 앞으로의 그의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예감을 느낀다. 아내의 수술비를 마련하여 도둑질까지 감행한 사내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소설이 마무리되고, 열심히 살아보려 애를 쓰지만 '반편'인 황수건은 삶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내마저 도망 가 버리는 결말을 맞는다. 그러니 학생들의 입장에선 인물들이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혹은 불행한 삶에 침잠하는 결말을 보면 우울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겠다.


왜 교과서는 이런 소설들을 선정했을까. 그 의도를 곰곰이 헤아리면서, 우울하고 비관적인 말이지만 결국 그것이 삶의 진실이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인물들의 삶과 모습이 이 사회의 절대 다수의 삶이라고. 통잔 잔고나 재산의 소유 여부가 사람의 도덕성이나 성실성을 재단하는 척도가 될 수 없으며, '예쁜 것이 착한 것이다' '돈 많으면 장땡이다'라고 부추기는 사회에게 "그렇지만 이젠 속지 않아"(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영수의 대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교육에 몸 담고 있으면서 가장 마음이 부대끼는 것이 이 지점이다. 어쨌거나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위해, 혹은 그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꺼이 돈을 내고 시간을 내어 학원에 오는 아이들에게 그 사다리가 과연 공정한 것인지,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과연 삶의 행복을 담보하는지, 내 사다리를 잡아주고 있는 누군가는 애초에 사다리에 올라 탈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도 모순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진실을 감춘 채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산업화의 이면을 고발하고 있으며" 운운하는 것은 공허하다.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게 명문대생인 지섭의 비참한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나는 대체 이 모순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이런 끊임없는 성찰과 자책들로 괴로웠던 날들이 꽤나 길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 학생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중간고사 시험 범위에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포함되는데 모듬 활동을 하면서 소설에 대한 질문을 작성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조의 어떤 학생이 "그러게 왜 불법 건축물을 지어놓고 징징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처음부터 무허가 건물에서 안 살았으면 되는데."같은 의견을 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고. 물론 학생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70년대라는 시대 배경을 정확하게 배우지 못했고 2021년과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내가 모르는 시대'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죽어 나가고,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느라 코피가 터지는 소설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피해자 탓을 하는 사고를 하게 된 것은 서글프다. 그런 생각을 하는 학생들의 인식을 바꾸려고 우리가 그 시대를 담고 있는 문학을 배우는 것 아닐까. 매체와 언론에서는 '피해자의 무결성'과 '자본의 힘'에 대해 매일 떠들고 있으니, 문학에서라도 그것이 삶의 진실이 아니라고 가르쳐줘야 하는 것 아닐까. 이 나라는 1970년대 압축적인 산업화를 이루면서 오히려 '그렇게라도' 살면서 공장에 와서 노동력을 제공하기를 바랐다고, 그 때 서울시에 이른바 '무허가 건축물'들의 퍼센테이지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서 '친구한테 전해줘'라고 말하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입이 썼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사용된 현재형 시제나 반어법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뜨리고 혹은 놓친 채로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이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다는 것이 어쩌면 순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순진한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을 쓴다. 언젠가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허접한 주인공'인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일견 맞는 말이다. 아이들에게 운동화 한 켤레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주인공을 '허접하다'라는 말 외에 달리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우리 각자의 인생은 아주 많은 면에서 허접하고 소수의 사람들은 적은 면에서 크게 허접한 것 아닐까. 대중적인 슈퍼 히어로 영화들이나 웹툰, 웹소설의 주인공도 어떤 면에서는 '허접한' 유형의 주인공들이 인기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아이언맨의 인간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과오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가 과오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 과오를 되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이어서이기도 하겠지. 아이들이 추천해주는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조용해 보이지만 실은 강한 힘을 가진 주인공이나 겉으로는 나약해보이지만 훈련으로 아주 강한 능력을 갖게 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아주 큰 힘을 가졌지만, 적은 면에서 허접한 인간 군상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교과서에서 배우는 문학 속 인물들은 인간적인 과오만 있고, 아무런 힘도 없어 자신의 목숨 말고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나오니 이입도 사랑도 힘들 것이다. 많은 면에서 허접한 인간을 응원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마음이 결국 실패를 거듭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일 아닐까. 매일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데도 스웨터 공장 사장에게 떼인 연탄값도 제대로 받지 못해 가난한 임씨를 연민하고 사랑해야 나를 지나쳐가는 무수히 많은 인물들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래야, 그 허접한 주인공들을 감싸안고 사랑할 수 있어야 '이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소리높일 수 있다.

'여기저기 망가지고 다치고 많은 면에서 허접한 사람도 사람이다. 사람 대접은 강한 자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난쟁이를, 임씨를, 황수건을 떠올린다. 순문학의 다면적이고 허접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우울한 비관이 결국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순진성으로 연결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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