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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22. 2021

당연하지만 경이로운 1인칭의 세계

무심히 지나치는 얼굴들이 모두 '나'의 시점을 가지고 있다니



문학 개념을 다루는 참고서의 목차는 엇비슷하다. 교육과정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개념을 따라 차례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큰 틀로 보자면 현대시로 시작해서 고전시의 갈래 학습까지 끝나면 현대 소설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갈래별 차례도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대다수의 책에서 현대시 1강은 화자이고 현대소설 1강은 서술자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소설에서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세상과 사건을 '서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발)화자가 아니라 서술자로 지칭한다. 수능 수업을 할 때도 현대소설을 읽을 땐 꼭 서술자가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연히, 문제에 자주 출제되니까.


소설에서 서술자가 중요한 개념인 것은 당연하다. 서술자의 위치에 따라 시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점은 말 그대로 서술자가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어떤 관점을 택하는지에 따라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도 완전히 다르게 서술될 수 있다. 그러면 당연히 주제까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김유정의 「동백꽃」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다면 지금과 같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므로 학원에서 문학 개념 수업을 할 때는 몇 번이고 반복한다. 소설 안에서 '나'가 등장하면  소설 속 등장인물이 서술자가 되어 말하고 있는 1인칭이다. 그리고 그 '나'가 작품의 핵심적 갈등과 사건의 중심에 있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나'가 주인공을 관찰하고 사건의 진행과정을 전달하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소설 안에서 '나'가 등장하지 않으면 소설 바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3인칭 시점이다. 인물의 속마음과 사건의 전개 방향을 알고 있다면 마치 신처럼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해서 '전지적 시점'이라고 하고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모습만을 관찰할 수 있다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한다.


각 시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효과와 감수해야 할 위험은 다르다. 물론 고등학생들에겐 문제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완벽히 이해하게 시키지만 지금은 시점상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한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문장으로 압축될 수도 있다.

'세상의 이 모든 1인칭이 가끔 너무도 경이롭다'라고.


어릴 적부터 상상과 몽상, 나아가 구상까지 좋아했던 '비워지지 않는 머리'의 소유자 강사강(앞선 글들에서 본명을 다 밝혀놓고 왜 막상 본명을 쓰려니 수줍은 걸까?)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 1인칭 시점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니 어떻게 이 수많은 사람들이 다 각자의 '나'를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단 말인가? 반대로 어떻게 '나'의 시점, 영혼, 감정은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공유되지 않고 '나'만의 것일 수 있는가? 학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어린 마음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생각들이었고 그 생각들이 사람과 '나'에 대해 탐구하고 고민하게 했다. 아마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다면 소설가를 꿈꾸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1+1=2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 알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나'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나'가 되었다.


이 문제에 심각하게 골몰한 사람은 이미 많다. 특히 인류 역사에 족적을 너무도 진하게 남긴 사람, 데카르트가 있지 않은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나는 데카르트가 아니니까 나의 기이한 느낌을 철학적으로 풀어내거나 증명할 수는 없다. 그저 아직도 가끔, 지하철에서 나를 무심히 지나치는 얼굴들이 각자의 '나'인 채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밀도의 경험을 하고 내밀한 정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모두가 각자의 1인칭인 주인공인 삶을 살아내고 있고, 언젠가는 끝나 버릴 책에 한 줄 한 줄을 적어 내려 가기 위해 무진 고생을 하며 많은 것들을 참아내고 이겨내고 있다니. 이 자명한 사실을 벼락처럼 깨달을 때마다 '인간 존중'의 사상이 깊이 체득된다. 좀 거창한 말인 것 같지만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 없다. '나'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생각만큼 다른 사람의 '나'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내 삶이라는 책에서 나는 주인공이자 1인칭 서술자다. 사건과 인물은 모두 서술자인 '나'의 프리즘을 거쳐 들어오고 나에게 다양한 색을 드리운다. 그렇다면 이 '나', 강사강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하기 위해 잠시 전지적 작가 시점을 빌려보도록 한다.




강사강은 사소한 일에도 사람의 의도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학생들은 "쌤 정말 자꾸 그러시면 '왜' 압수당하셔야 돼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 역시 그녀가 학생들에게 "너 자꾸 이러면 '버스가 늦게 왔어요' 이거 압수당해야 돼." 하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강사강을 집으로 비유하면 온갖 잡동사니들이 정신없이 쌓여있는 곳을 생각하면 된다. 읽다가 던진 철학책과 알아듣지도 못할 두꺼운 과학책들이 여기저기 쌓여있지만 무엇보다 여기저기 널린 소설책들로 어수선한 집. 또 누군가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면 꼭 상대방의 마음 상점에서 얻을 수 있는 자질구레한 마그넷이나 엽서를 가져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그 집에는 여기저기 그런 것들이 놓여있다. 강사강은 자신에게 마음의 마그넷이나 엽서를 안 주는 사람을 '이 세상에 다시없을 냉정한 사람'으로 쉽게 매도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아무렇게나 휘갈겨 준 쪽지를 엽서인 줄 알고 가져와 혼자 흐뭇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놓고 등 뒤에 대고 고민하는 사람인데 오죽했으면 그녀의 남편인 윤감자씨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안 돼?'라고까지 한 적이 있었다.


또 강사강을 집에 비유하면 낮에는 햇볕이 너무 많이 들어와 쉽게 바닥이 달구어지고 밤에는 찬바람이 얇은 바람벽을 타고 들어 금방 추워지는 집이다. 금방 좋았다가 금방 싫었다가 마구 달리려다가 대뜸 드러눕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강사강의 눈으로 해석된 인물과 세상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 썩 신뢰할 만하지 않다. 강사강은 시 1편만 좋아도 시집 전체가 좋다고 착각을 잘하고, 반대로 시 1편만 기분이 나빠도 시집 전체를 다시 안 보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문학 개념에서는 이것을 '신빙성 없는 서술자' 혹은 '못 미더운 서술자'라고 한다.


그렇다. 강사강은 너무도 주관적이다. 그래서 강사강은 왜곡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부러워했다. 보이는 면 그대로 믿고 이면은 추론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강사강의 눈에는 너무도 명쾌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강사강은 어느 기점을 돌면서 상황과 사람에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객관적인 거리감을 확보하려고, 딛고 선 곳을 왜곡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평생 살아온 이력을 바꾸기가 녹록지 않아 자꾸 좌절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내가 '나'라는 인물로 소설 속 인물을 만들어낸 것 같다. 머쓱한 기분이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 서술 역시 절대로 3인칭의 서술이 될 수는 없다. 이 역시 내가 나를 세워놓고 바라본 것이니까. 마오가, 삼이가, 윤감자씨가, 강쌀알씨에게 '강사강'에 대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써보라고 하면 아마 다 다른 서술이 나올 것이다. (이것보다 훨씬 신랄한 비판정신이 돋보일 수도 있겠다. 오빠인 강다구씨에게는 절대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노력,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하고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려고 해도, 결국 이 노력은 절대 성공을 거둘 수 없다. 그저 덜 실패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찰스 부코스키의 시집 『사랑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한 시구를 떠올려본다. "나라는 이 똑똑한 괴물은 내면에서는 얼굴을 찡그리지 하지만 곧 그걸 뒤로 숨길 수 있게 너무 많은 노력을 해" '나'라는 이 똑똑한, 그러면서도 괴물인 자신에 대한 서술이다. 그러나 '괴물'이라는 것도 '나'가 '나'를 바라본 결과다.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나 자조적 인식이 스며들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실패한 '3인칭 시점'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고 많이 노력 중인데, 그것은 카페인을 끊는 것보다도 어렵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과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많이 듣고 싶지만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기는 좀 쑥스러운 일인 데다 그런 요구를 한다면 '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는 거야?'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현실의 인물들에겐 묻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1인칭 시점으로 보는 삶'을 훔쳐보는 가장 좋은 방법을 택했다. 각자의 삶을 관조하고 기록한 에세이를 읽고, 또 허구의 탈을 쓴 내면적 이야기인 소설을 읽는 것이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세상엔 이토록 많은 일들이, 다 다르면서도 결국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작은 성공에 도취되고, 큰 성공에 오히려 불행해지고, 혹은 큰 성공으로 인생을 바꾸고, 무언가를 얻고, 결국은 잃고, 상실감에 울고, 혹은 상실감으로 더 큰 것을 얻고…. '나'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일을 '그렇게' 생각하는 서술들은 절로 경이를 느끼게 한다.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을 읽을 때는 작가가 지식과 앎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낸 것을 찬탄했다. 게일 콜드웰의 『먼길로 돌아갈까?』로 읽을 때는 '나 자신의 발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삶'에 대한 동경을 꿈꾸기도 했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을 땐 가끔 눈물이 날만큼 벅찰 때가 있다. '소설가'로서의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자기 자신'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견어 보며 그이를 더 자세히 알게 된 것 같은 기분, 더 친숙해진 기분을 느껴서 그렇다. 로맹가리가 그렇고 아니에르노가 그렇고 또 박완서가 그렇다.


그래서 나는 많은 '나'들이 자기 이야기를 써주었으면 좋겠다. 인스타그램에 하루 동안의 일을 적어도 좋고 나처럼 브런치에 자기 얘기를 쓰는 것도 좋다. 나 아닌 다른 '나'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느끼고 인식하는지 알면 알수록 내가 강사강이라는 나의 존재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거나 같은 영화를 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 너무도 좋다. 내가 무심히 지나친 장면에서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거나 내가 불의한 사건이라고 느낀 것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느꼈다거나, 그런 대화를 하다 보면 세상에 이처럼 많은 '1인칭'시점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고 겸손하게 된다. 나의 생각은 나에게만 절대적이고 나의 감정은 나에게만 불가항력일 뿐 다른 이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명백한 악의나 무례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내 입장에선 납득할 수 없는 행위를 한 사람도 '그의 나'는 그행동이 최선이라고 판단했겠거니―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바꾼다. "아니 저 할머니 신호 곧 바뀌는데 횡단보도 건너시면 어떡해!" 하는 말이 '허리가 아파 도저히 서 계실 수가 없어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면 횡단보도 근처에 앉을자리 하나 없는 사회가 삭막해 보인다. 내 곁을 소리지르며 뛰어가는 아이를 보고 '길가에 핀 꽃만으로도 소리지르면서 기뻐하는 순수한 경탄이 남아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아이들이 마음껏 경탄하고 뛰어놀 공간이 없는 도심을 돌아보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말을 '이해 가능성을 좁히는 사회'란 말로 바꾸게 하는 힘은 결국 세상의 모든 1인칭을 인식하는 일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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