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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21. 2021

'너무 좋다'와 '얼마나 좋을까'의 차이

질문의 답을 구한 게 아니라 감정의 깊이를 나타낸 거야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아 얼마나 좋을까요'


누구나 아는 가수의 누구나 아는 노래 <밤편지>의 가사 중 일부다. 개인적으로는 이 가사가 이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적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가사 속 화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 사랑하는 연인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 '내 마음속에 모든 말을' 꺼내기에 마음은 한없이 크고 무거워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반딧불에 담아 보내는 낭만적인 편지다. 편지를 쓰는 것은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다. 깊은 밤, 긴 편지를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따라 단어들을 늘어놓다 보면 한 번은 감정의 절정에 닿고야 만다는 것을. 그 순간 노래 속 화자는 이야기한다. 이렇게 벅차오르는 지금, 더없는 사랑으로 충일한 지금,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아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정말 좋겠다'와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같다. 그럼에도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깊이가 다르다. '얼마나 좋을까'는 의문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답을 구하는 의문문이 아니다. 이 문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를 나타내기 위한 강조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문법적으로는 '수사 의문문' 문학적으로는 '설의법'이라고 부른다.


설의법 :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짐짓 의문 형식으로 제시하여 독자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표현법. 수사적 의문이라고도 한다. 평서문보다 훨씬 감정적, 강의적이다.

수사 의문문 : 문장의 형식은 물음을 나타내나 답변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강한 긍정 진술을 내포하고 있는 의문문


사전적 정의가 나타내고 있듯이 설의법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감정의 강조다. 고등 문학에서는 설의법을 '영탄적 어조'에 포함시켜서 다루고 있는데 영탄적 어조란 감정의 격양을 나타내는 말투를 의미한다. 그러니 설의법은 애초에 표현 의도부터가 넘쳐흐르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손 넘치게 뚝뚝 흐르는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사실 설의법,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사 의문문의 또 다른 중요한 효과로는 '정중 어법'도 있다. 영어식 표현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내가 도와줄게!'가 아니라 '내가 도와줄까?'라고 묻는 것, '문 좀 닫아줘'가 아니라 '문 좀 닫아줄 수 있어?'라고 묻는 것, 그것은 모두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이야기는 닫아두려고 한다. 배려의 마음도 고맙지만 나에겐 넘치는 감정이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설의법이 나타낼 수 있는 문학적 표현의 근원, 감정의 표현을 얘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설의법의 문학적 효과를 백석의 시를 보고 절절히 체감했다. 단박에 무릎을 칠만큼 참신한 비유를 쓰고 있다거나 단어의 섬세한 배열로 전율하게 하는 문장이 아닌데도 그랬다. 시 <두보나 이백같이>라는 작품은 가족과 떨어져 타국에서 명절을 맞는 작가의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두 시인은 당나라의 시인이다. 그리고 두 불세출의 시인은 지금까지도 유랑과 높은 시심心의 상징이다. 백석은 제목에 두 시인의 이름을 적고 '같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 긴 시 중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은 그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어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었을 것인가


백석이 이 시를 썼을 때는 1941년으로 그는 시를 쓰기 위해 만주에 건너 가 있었다. 제 손으로 선택한 만주행이건만 이 시기 백석의 시에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곳곳에 엿보인다. 사실 빼앗긴 나라의 백성에게 '떠남'이 완전히 자발적인 선택일 수 있겠는가. 또 꼭 그런 시대상황이 아니더라도 모든 출발과 도착은 이별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낯선 얼굴과 말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백석은 그 쓸쓸함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가. 백석이 투영된 시의 화자는 자신의 유랑생활을 두보나 이백에 빗댐으로써 자신 역시 그들처럼 유랑의 마음으로 높은 시적 정신을 갖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위안한다. 자신의 처지를 1000년도 전의 시인에 빗대며 화자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려보는 것이다.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들도 명절이 되면 고향 사람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찾아가 명절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겠느냐고. 천년 전의 사람들이 과연 그랬을 것인지 답은 없다. 그러나 백석이 던진 질문은 답이 필요한 질문이 아니다. 명절을 맞아 더 그립고 애달픈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니까.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보면 나도 모르게 쓸쓸한,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 따뜻한 위안을 얻는 목소리가 된다. 탄식과 위안을 한 번에 아우르는 문장이다. '느꾸어(긴장이나 위안을 풀어-평안도 방언) 위안했을 것이다'라는 가정적 용법과 비교하면 화자의 절박한 자기 위안이 더 마음에 와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답변이 필요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돌아오지 않을 부메랑을 던지는 것과 같지 않은가. 질문을 던질 때는 돌아오는 답변을 가정하고 던지는 것인데, 어떻게 답변을 바라지 않는 것일까. 수도 없이 많은 문학 작품을 가르치며 '설의법'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하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레 결론을 내렸다. 설의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던지는' 목표지점이 다르다고. 보통의 의문문이 상대의 입술을 향해 던지는 것이라면 설의적 질문은 상대의 심장을 향해 던지는 것이다. 그러니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언어가 아니라 공감과 이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심장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정확히 반대편으로 날아 던지는 자신의 심장에도 꽂힌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좋을까요'는 상대방에게 나의 좋음을 전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나의 내면에 나의 깊은 기대와 설렘을 드리운 것이다. '느꾸어 위안하지 않겠는가'는 자신을 향해 던져 결국은 세상을 향해 나아간 질문이다. 나의 이 옛투의 쓸쓸한 마음이 결국은 나를 울게 하고 살게 하고 쓰게 할 것이라고, 화자는 스스로에게 물음으로써 그 쓸쓸한 자기 위안을 몇십 년 뒤의 독자들에게 포물선을 그려 날려 보냈다.

그러고 보면 설의법은 연극의 독백과 비슷하다. 상대배우가 앞에 있든, 혼자 있든, 나의 감정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대사'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내면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으면 무의식적으로 설의법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것 하나 못 해주겠니?'라고 말하는 다정한 사람들. 그런 표현은 자신도 의도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 같아 절로 웃게 된다. 내가 '참 호방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혹시 일요일에 시간 돼?'라는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네가 만나자는데 없는 시간이라도 못 만들겠냐'라고 말해주는 호탕한 다정함. 

그리고 우리는 설의법을 서운할 때도 쓴다. '내가 많은 거 바랐어?' '이 정도도 이해 못해줘?' 억울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런 소리 들을 짓을 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의지를 다질 때 쓴다. 나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내가 이 정도도 못 해내겠어?' 그렇게 주먹을 꼭 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깊은 곳에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점점 적셔 들어온다. '내가 이 정도로 무너지겠어?'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하겠어?' 그럴 리 없다는 확고한 생각을 담아 던지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강한 긍정이다. '아니다!'라는 정해진 답변이 내 안에서 메아리를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면 설의는 부메랑이 아니라 메아리인 것일까.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려앉음으로 편안해지는 곡이 있다. 타블로의 <집>이라는 노래인데, 노래 속 화자가 자신에게 던지는 설의적 질문은 내가 평생 답을 찾아 헤맬 질문이다. 답이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답이 너무 많아서, 평생 던지고 고민하고 지웠다가 다시 적을 문장.


'내게 행복할 자격 있을까? 난 왜 얕은 상처 속에도 깊이 빠져있을까? 사는 건 누구에게나 화살 세례지만 나만 왜 마음에 달라붙은 과녁이 클까?'


처음에 이 노래를 들었을 땐 슬픔이 집인 사람, 불행이 익숙한 사람, 행복의 찰나엔 그 행복이 도무지 제 것 같지 않은 사람을 떠올렸다. 그러므로 '내게 행복할 자격 있을까?'는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의 슬픈 독백이라고 생각했다. 얕은 상처 속에 깊이 빠진, 누구나 겪을 삶의 화살 세례가 단 하나도 비껴가지 않는 사람, 언제나 마음에서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의 독백이라고. 그래서 '행복할 자격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행복할 자격을 얻고 싶은,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의 독백은 아닐까?'하고. 내게 행복할 자격 있을까? 나에게도 행복할 자격은 있다. 그런데 난 왜 얕은 상처 속에도 깊이 빠져 있을까? 이 얕은 상처에서 무릎을 펴고 일어날 방법이 있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화살 세례지만 나만 왜 마음에 달라붙은 과녁이 클까? 삶이란 누구에게나 고통과 불행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고, 과녁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 없으므로 과녁이 다 채워지고 나면 더 이상 피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노래는 처절하게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항변하고 싶은 사람의 노래로 바뀌었다.


가사는 그대로다. 바뀐 것은 행간을 채우는 나 자신이다. 

그렇게 해석이 바뀌고 나자, 중간 부분에 나오는 설의적 의문은 내가 간절하게 붙잡고 싶은 문장이 되었다.

집이 되어버린 내 슬픔 속에 그댈 초대해도 될까?

'초대할 수 없는 슬픔'에서 '내 슬픔에 걸어 들어온 사람에 대한 경이와 걱정'으로 내 해석이 바뀌었다. 또 언젠가 바뀌겠지만. 


나는 답 없는 질문을 던지고, 던져진 질문의 여백을 채우며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내가 던지는 수사적 질문이 깊은 울림의 메아리가 되길 바라며 글을 쓴다. 나의 글이, 세상을 조금쯤 더 다정한 공간으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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