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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13. 2021

은유가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빈곤할까

삶과 인간은 은은한 암시로 읽어내는 것 아닐까



요즘은 은유라는 말보다 메타포라는 말을 더 자주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최근 1년간 네이버 검색량은 메타포가 은유를 압도했으며 구글에서는 메타포보다는 은유의 검색량이 많지만 '은유법'과 비교하면 메타포가 더 많이 검색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단상, 리뷰에도 '메타포 해석'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그럴 때의 메타포는 수사학적 은유를 지칭하기보다는 폭넓은 의미의 암시를 지칭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은유는 그런 의미로 모두가 알고, 또 알지 못하는 상태로도 체화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아마 어떤 사람이 한 말들을 모두 기록해놓는다면 은유를 쓰지 않은 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날일 것이다. 


은유법 : 직유법과 대조되며 암유()라고도 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시하여 대상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표현법이다. 원관념과 비유되는 보조관념을 같은 것으로 보므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 나타난다.  


은유법의 수사학적 설명이다.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원관념은 '설명하려는 대상'이고 보조관념은 '빗대어진 대상'이다. 에픽하이 <당신의 조각들>이라는 노래 가사를 예로 들어보자. 당신의 눈동자, 내 생의 첫 거울. 당신(아버지)의 눈동자는 내가 설명하려는 대상 즉 원관념이고 첫 거울은 그 눈동자를 설명하기 위해 빗대어진 대상 즉 보조관념이다. 이런 식의 비유를 시와 노래 가사에서 찾으라고 하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격이 될 것이다. 워낙 오래된 수사법이다 보니 은유 자체를 세분화하여 설명할 수 있고 은유를 통해 거둘 수 있는 문학적인 효과도 여럿이나 여기에서는 그런 '문학적' 설명은 모두 거두기로 한다. 은유 혹은 메타포는 일상에서, 인간의 삶에서, 언어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수사이므로.


사실 넓게 보자면 기호 자체가 은유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언어라는 기호는 더더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다의어나 관용어구는 대다수가 은유를 바탕을 만들어졌다. '가슴이 아프다'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바로 와닿을 것이다. 깊은 슬픔에 절망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표현한다. 그 가슴은 물리적인 의미의 흉부가 아니라 절망의 은유다. 인간의 역사에서 은유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고대의 인간들은 밤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만들어냈다. 별의 모양을 '쌍둥이' '물병'이라고 붙인 것도 하나의 은유다. 어떤 장면이 어떤 사건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도. 그래서인지 은유를 다루고 있는 책들은 많고 '은유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사람도 많다. 내가 수사학의 기법을 일상과 연결 지어 써보자고 결심해놓고 은유에 대해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 이유다. 우리의 몸에 아로새겨지다시피 한, 너무도 많이 반복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유에 대해 쓰기로 결심한 것은 은유 그 자체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은유가 나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삶에 드리운 다양한 은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서였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불안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 주변의 교외이고, 쓰지 않은 책에 대한 장황한 해설이다." 이 문장을 필사 노트에 적어놓고 여러 번 읽고 꼭꼭 씹어 넘겼다. '나'라는 원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쓰지 않은 책에 대한 장황한 해설'이라는 보조관념. 나는 그때 있는 힘껏 '글을 쓰는 삶'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고 '글을 쓰지 않는 나의 삶'의 이유를 찾아 각주를 달려고 할 때였다. 그때의 내 심정을 그대로 적어놓은 문장인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은 아직 제대로 쓰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장황한 해설을 달고 있다니. 명작이라고 하는 책들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 넘치는데 아직 쓰이지도 않은 책의 장황한 해설을 읽어줄 사람은 당연히 존재할 리 없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의 나는 저 문장을 이렇게 이해했다. '나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내 삶에 대고 치열한 변명을 하고 있다.'라고.


그러면 또 자연스레 기형도의 은유가 따라온다. 시 「오래된 서적」의 문장이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한 사람의 삶을 책에 비유하는 것은 상투적인 은유다. 흔히 말하는 '죽은 은유'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형도는 '검은 페이지'로 자신의 영혼을 은유함으로써 그 은유를 살려냈다. 읽어줄 사람 없는 자신의 생에 대한 고백, 자연스레 손가락으로 문질러볼 수밖에 없는 문장이다. 누군가가 나를 읽어주고 펼쳐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페이지에 무언가를 적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내 영혼 자체가 검은 페이지라는 것, 그러니까 그 어떤 것도 적힐 수 없다는 것. 


이런 해석은 나 개인의 해석이므로 앞선 예들의 문장 모두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이 될 것이다. 타블로가 쓴 가사의 '첫 거울'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그 다른 해석들은 거울과 아버지라는 관념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하리라. 나는 저 가사를 '아버지를 통해 나를 본다'라고 해석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나는 아버지의 눈에 비친 나이고, 결국은 아버지의 눈에 비친 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고. 타블로가 어떤 마음으로 저 문장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페소아와 기형도가 어떤 의미로 자신의 삶과 영혼을 저렇게 비유했는지도 우리는 모른다. 은유의 핵심은 바로 이것 아닐까.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등치시키면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고, 이것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 발화자가 의도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공통점이 청자에게는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오독의 가능성 그 자체. 은유는 이해의 가능성을 넓힘과 동시에 오해의 가능성도 넓히는 역설적인 수사라는 점에서 은유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은유하고 있는 것 아닐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부르는 애칭도 모두 은유다. 나의 남편 윤 감자씨는 나에게 그때그때 아주 다양한 별명을 붙여주는데 사실 그 호칭에 담긴 의미를 내가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그 애칭을 붙인 윤 감자씨 본인도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접점과 차이점에 대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애칭에서 말 그대로 '애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조금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단어 하나하나가 윤 감자씨가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 애정의 은유라고 느껴진다. 나의 얄미운 행동을 보고 붙여준 별명조차도. 감자씨가 그 애칭에 진짜 애정을 담아 부르는지는 나중 문제다.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니까.


세라 윈먼의 『신이 토끼였을 때』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그들이 주고받는 정감 어린 농담은 재미있고 편안했으며, 장난은 친밀하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그것이 요란한 말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만의 '사랑해'였던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보조관념)은 그들이 나누는 정감 어린 농담과 장난이다. 그것이 암시하는 원관념은 '사랑해'다. 그들의 농담은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장난 역시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것은 꼭 말로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친밀함, 사랑에 대한 은유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은유의 의미는 아주 넓어진다. 꼭 언어로 만들어진 기호가 아니라 아주 넓은 의미로, 무언가를 암시하고 보여주는 장면까지 은유가 된다. 그러니까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해석할 때 우리가 '메타포'라고 말하는 장면과 소재들까지.

언어적 은유가 어렵다면 여기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을 제안해본다. 

사람들과 이런 놀이를 해보면 어떨까. 단어를 제시하고 주어진 시간 내에 그 단어를 가장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암시의 장면들을 찾는다. 단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단어, 가령 '사랑'이나 '두려움'같은 단어여도 좋고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단어여도 좋다. 그러면 누군가는 <타이타닉>을, 누군가는 <신과 함께>를, 누군가는 <걸어도 걸어도>를 꼽을 것이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놀이일 수 있겠지만 아주 효과가 좋은 놀이이기도 하지 않을까. 스스로가 어떤 장면에서 사랑을 느끼는지, 어떤 표정과 말에서 두려움을 느끼는지 명징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놀이에 참가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과 서로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또 혹은 오해하게 된다면 그날의 만남은 풍요로울 것 같다. 


그리고 나아가 이런 놀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이 단어와 단어를 이어 은유를 만들고 그 은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가령 '눈물'이 제시어라면 누군가가 '눈물은 기록이다'라는 은유를 만들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그다음 사람은 '기록은 쓰레기통이다'라고 은유를 이어받는 것이다. 무작정 선문답처럼 던져놓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째서 두 관념 사이의 등가가 성립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어보도록 하자. 사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 놀이에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스스로가 천착하고 있는 제시어를 하나 고르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과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놀이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고 그 은유에 대한 설명은 결국 자신에 대한 설명이 되리라.


아니 에르노는 『부끄러움』에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이라는 문장을 썼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고 말한 그녀다운 비유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된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관찰하고 사색하고 분석하고 독해하는 일이다. 실용적이고 짧은 글로도 자신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런 해석은 어쩐지 본질이 빠진 공허한 해석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과 삶과 사람들을 은유해보는 것, 내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에서 어떤 접점을 찾아냈는지, 또 그 관념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함축적으로 자신을 알아내는 방법 아닐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스스로를 오해하게 될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그 오해의 비밀도 풀리게 될 것이다. 오독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말하면 낭만주의자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나는 오독이야말로 관계를 깊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이렇게 오해했다'라는 것은 결국 상대방을 '이렇게 믿고 있었다'라는 것이고 그것은 상대방이 '이렇다'라고 생각한 것이니까. 서로의 해석에 각주를 달고 비평을 하다 보면 상대방의 눈에 비친 나와, 내 눈동자에 비친 상대방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은유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빈곤했을까. 나는 서른둘인 딸을 여전히 '애기'라고 부르는 부모님의 은유에서 '언제든 실패해도 되는'존재임을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보조관념을 붙여주고 싶다. 내 삶의 향기, 나의 거울, 나의 신발, 그리고 나의 손과 나의 자서전 등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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