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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못소 Nov 30. 2017

시대를 거스른 사랑

제 4회 글못소의 날, 시간 브로커

시대를 거스른 사랑 (저자 권희선)


“하~암.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야~ 너는 매일 자는 시간도 없이 빨빨거리면서 뭘 하는 애가 재미난 일을 찾냐?”     

“하긴. 그러고 보니 오늘도 3시간밖에 못 자긴 했네. 그건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거 말이야.”     

“참나. 연애나 해. 이 연애 고자야. 연애만큼 모든 게 새롭게 보이는 것 또한 없지. 소개팅이라도 받아볼래?”     

“야야. 나도 연애 그거 다 해봤거든요? 그것도 처음에나 그런 거지. 아니. 난 소개팅 딱 질색이다. 그것만큼 날 피곤하게 하는 것도 없어. 나는 혼자가 더 편해. 눈치 볼 것도 없고, 나 하고 싶은대로 다 해도 뭐라 할 사람 없고. 얼마나 편해. 그리고 어디 요즘 남자가 남자냐. 징징거리기나 하고, 박력도 없고, 오히려 여자한테 기대 살려고 하는 놈들도 많고. 재고 따지고 남자가 여자보다 더하잖아. 그냥 시시해. 남자라는 존재. 뭐. 위인전에 나오는 남자가 실제로 존재하면 또 모르겠다. 하하.”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 참. 하여튼 넌 특이해. 그럼 그중에 특히 누굴 만나보고 싶냐?”     

“음. 당연히 두말할 것도 없이 정조대왕이지!”     

“왜?”     

“멘탈 갑이잖아. 그리고 그렇게 성실한 왕, 백성을 사랑한 왕이 어디 있냐. 진짜 보자마자 반해버릴 것 같아. 꿈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고 싶다.”     

“누가 글 쓰는 애 아니랄까 봐. 아주 그냥 소설을 써라 써. 아직 그런 환상에 싸여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너 결혼하긴 틀린 것 같다. 틀렸어. 으이구. 헛소리 그만하고 집에나 가자. 늦었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 둘은 짐을 주섬주섬 챙겨 카페를 나갔다. 문을 나서자 선선한 가을바람이 그들을 싱그럽게 반긴다.      


“아~ 가을이다. 좋다.”     

“좋아? 나는 춥기만 한데. 가을바람이 뭐 이리 차냐.”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던 무더위를 생각해봐. 그럼 이게 얼마나 행복한지 금방 알 수 있지 않아?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더위도 어느새 가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대단하다. 신지수. 너는 인생을 아주 꿈처럼 사는구나. 내 친구지만, 그렇게 사는 네가 부럽다. 생각해보니 너는 어렸을 때도 늘 밝고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 나 중학생 때도 이랬었나? 나는 잘 기억이 안 나. 그러고 보니, 너랑 나랑 알고 지낸 것도 진짜 오래됐다. 중학교 1학년 때 너를 알게 됐으니까. 어디 보자. 17년 친구네. 이야~ 골동품 친구네. 하하.”     

“그러네. 우리가 벌써 나이를 이렇게나 먹었나. 아직도 마음은 그때 같은데 참 시간 빠르다. 그치?”     

“그러게 말이야. 우리 나이가 벌써 31살이구나. 영미야. 그 오랜 시간 동안 내 친구로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     

“새삼스럽게 고맙기는. 야야!! 빨간불이야. 신호 좀 보고 다녀. 사고 날 뻔했잖아! 강가에 내놓은 아이같이 불안한 녀석이야 넌.”     


영미는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도로를 건너려는 지수를 간신히 붙잡는다.     


“아아. 미안. 하하.”     


지수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둘은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 불이 켜지기만을 기다린다. 갑자기 지수가 영미를 방정맞게 때리며 말한다.     


“영미야. 저거 보여? 저 전광판!”     

“아파! 그만 좀 때려. 대체 뭘 봤길래 이렇게 들뜬 거야?”     

“내가 원하는 시간을 살 수 있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도로 앞 전광판에는 이런 문구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시간을 드립니다. 과거든, 미래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의뢰 연락처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수는 재빨리 그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했다.   

   

“영미야. 어쩌면 우리가 좀 전에 나눴던 대화가 실제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지 않아? 과거의 시간을 살 수만 있다면, 내가 보고 싶어 하던 정조대왕을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 완전 신난다.”     

“제발. 지수야. 저런 거 다 사기야. 잘못하면 다단계 이런 거일 수도 있다고. 너 저기다 연락할 생각 마라.” 

“그래그래~ 알았어~”     


지수는 영미의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그리고 바로 집에 가자마자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지수는 문자 소리에 잠이 깼다. 문자에는 회사 주소가 적혀있었다. 시간이 될 때 언제든지 찾아오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지수는 더 망설일 시간도 아까워 문자를 보자마자 나갈 준비를 했다. 다행히도 그 회사의 위치는 지수의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어느새 지수는 그 회사의 문 앞에 서 있다.      

[똑똑]     

그러자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지수를 반갑게 맞아준다.     


“어제 문자로 연락해주셨던 분이죠? 어서 오세요.”     

“네. 보긴 했는데,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제가 원하는 시간을 줄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시간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도와드립니다.”     

“원하는 시간이면 다 되는 건가요? 원시시대로도 갈 수 있고 그런가요?”     

“물론 그것도 가능합니다. 원하신다면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어떤 시간을 사고 싶으신가요?”     

“네. 저는 평소에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을 만나려면 그 시대로 가야 하는데… 조선 시대 정조대왕 시기로 저를 보내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가능합니다. 단, 정조대왕과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거는 본인의 재량에 따라 달렸습니다. 저희는 정조대왕을 만날 수 있는 시간만 제공하는 거니까요.”     

“그거면 됩니다. 궁궐 안까지는 보내주시는 거죠? 그 뒤에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럼 비용은 얼마나 드나요?”     

“저희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의 시간을 대가로 받죠.”     

“네? 돈이 아닌 시간을 달라고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당신의 생에 남은 시간을 받습니다. 그 시간을 여행하는 동안 당신의 남은 미래의 시간을 값으로 내시면 됩니다. 보통은 1일 코스를 많이 선택하시죠. 자신의 하루를 주고, 다른 하루를 살아보는 여행코스를 많이 선호하시더라고요. 지수 씨처럼 처음 오시는 분께 권해드리는 코스이기도 하고요. 선택은 자유입니다.”     


지수도 그의 말에 끄덕거리며 말했다.     


“네네. 저도 1일이면 될 것 같습니다. 1일 코스로 살게요.”     

“네. 알겠습니다.”     

지수는 그가 내미는 카드결제기처럼 생긴 기계에 서명했다.     

“결제 완료되었습니다.”     


결제가 완료되자 남자는 지수에게 상자를 하나 건넨다. 그 상자 안에는 알약같이 생긴 작은 캡슐이 들어있다.       


“날짜는 편하신 시간으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진행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생각하면서 캡슐을 복용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곳으로 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캡슐을 복용하신 지 정확히 24시간이 지나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옵니다.”     

“와. 마치 신데렐라 동화 같은 일이네요. 24시간 뒤에 돌아오다니. 아무튼, 감사합니다.”     

“네. 좋은 시간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다른 시간 여행이 필요하시면 다시 찾아주십시오.”     


지수는 부푼 마음으로 상자를 들고 나왔다. 마침 내일까지 일도 쉬는 날이라 지수는 오늘 당장 그 시간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장에 옷들을 죄다 침대에 늘어놓는다.     


“음. 조선 시대 성군 중의 성군! 정조대왕을 만나러 가는 건데,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까? 아… 평소에 예쁜 옷들 좀 사 놓을걸. 입을 옷이 없네. 이참에 예쁜 한복을 사서 입고 가야 하나? 그게 좋겠다. 하하.” 

    

지수는 옷을 침대에 난장판으로 펼쳐놓은 채로 집 근처에 유명한 한복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요즘 유행한다는 예쁜 계량한복을 한 벌 구매해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한복을 좋아하는 지수는 이참에 한복도 구매하고, 입어 볼 수 있게 돼서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고 빨간 치마에, 꽃무늬 수가 놓인 하얀 저고리. 오늘따라 화장도 곱게 하고, 머리도 한복에 어울리게 곱게 따서 댕기로 마무리했다.    

  

“아. 이제 좀 조선 시대에 가는 사람 갔군. 물론 이런 한복을 입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튀어 주어야 정조대왕 눈에 띄지 않을까? 좋아! 그럼 준비는 완벽하고, 이제 캡슐을 먹어볼까?”     


지수는 캡슐을 삼켰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지수는 어느 집 마당에 누워있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분명 해가 쨍쨍했던 낮이었는데, 이곳은 이미 해가 저물고 있을 시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여긴 어디야. 궁 안이긴 한 건가? 경복궁이랑 비슷한 구조처럼 생기긴 했네. 근데 무슨 궁이 이렇게 조용해? 잘 못 왔나? 이상하다. 정조대왕이 있는 곳까지는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음. 일단 사람 좀 찾아보자.”     


지수는 방마다 노크해본다. 기척이 없으면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몇 번째 허탕이었다. 죄다 빈방이었다.      


“무슨 방이 이렇게 많아. 여기 사람이 살긴 하는 거야? 해도 다 지고 있는데. 좀 무섭다. 그래도 신지수 사전에 포기란 없지! 누구라도 찾아야 해. 내겐 24시간밖에 없으니까. 그 안에 꼭 만나야 해.”     


그렇게 몇 번째 방문을 두드렸을까. 갑자기 방문을 열자마자 어떤 손에 이끌려 방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깜깜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의 목에 시퍼런 칼날이 번쩍거리는 건 보였다. 지수가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려 입을 열자마자 칼을 들고 있는 남자는 다른 손으로 지수의 입까지 막아버렸다.      


“읍...읍...”     

“네가 소리 지르는 순간, 이 칼이 너의 목을 내려칠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너의 신분을 밝혀라. 여기서 살아나가고 싶다면 말이다.”


남자는 할 말을 마친 후 지수의 입에서 손을 뗐지만, 여전히 지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 지수는 살아나갈 궁리는커녕 엉뚱한 생각을 한다.    

  

‘와. 멋있다. 무슨 자객이 이리도 멋져?’     


불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마치 만화 속의 주인공처럼 멋져 보였다. 조선 시대 사람 같지 않게 큰 키,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날카로운 콧날. 한마디로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었다. 순간 지수는 이 사람이 정조대왕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숨어 있는 사람이 정조대왕일 리가 없다는 생각에 살짝 실망하며 말했다.     


“하…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물론 무기도 없고요. 저는 사람을 찾으러 온 것뿐이에요. 그 사람만 보면 조용히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요. 저를 죽여서 득 될 건 없으니 살려주세요. 그리고 일단 이 칼부터 좀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실은 지금 엄청 무서운데…”     


남자는 이상한 옷차림을 한 지수를 몇 번 훑어보더니,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칼을 칼집에 넣었다.      


“휴. 살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이곳 사람이 아닌 듯싶은데 너는 어디서 온 것이냐. 그리고 대체 누굴 찾는데 궁궐 안에서 얼쩡거리는 것이냐.”     

“와. 여기가 궁 안이긴 하군요? 제대로 오긴 했네. 저는 미래에서 왔어요. 이렇게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당신이 죽은 후 한참 후에 태어난 후손입니다. 제게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네요. 한가롭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요. 참. 혹시 정조대왕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꼭 만나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남자는 흠칫 놀라며 지수를 바라본다. 그리고 애써 침착하게 대답한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그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허튼수작 따윈 부릴 생각도 마라. 그리고 정조대왕을 만나서 무슨 얘기가 하고 싶다는 것이냐.”     

“그냥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라서 그냥 보고 싶어서요. 역시 대왕님을 제가 직접 마주하긴 힘들겠죠? 음. 편지를 써도 못 알아보실 것 같고. 어쩌지. 얘기를 할 수 없다면, 그냥 멀리서라도 바라보기만 하면 안 될까요? 행차 같은 거 하시는 날이라도 알려주시면 그때 맞춰서 다시 올 수도 있는데.”     

“정조대왕을 왜 존경하는 거지? 이 나라는 그 왕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데? 너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구나.”     

“지금이 그럼 정조대왕이 시련을 겪고 있는 그런 시기인가 보네요. 그분이 후대에 얼마나 칭송을 받는 왕인지 모르셔서 그래요. 다들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본받고 싶은 그런 왕으로 추대받는답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을 한번 보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이고요. 저기 이건 일급비밀인데. 지금이라도 정조대왕한테 잘 보이셔야 해요. 아시겠죠?”     

“너는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게냐.”     

“음… 제가 사는 세계에는 그분에 관한 책이 정말 많아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쓰인 책들이.”     

“조선왕조실록? 그걸 봤단 말이더냐?”     

“그럼요! 보다마다요. 미래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속고만 사셨나. 정조대왕뿐 아니라 역대 왕들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답니다. 영조,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알고 있고요.”     


지수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경계심을 풀고 그 이상한 여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어? 지금 웃은 거예요?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 하하. 그렇게 웃어요~ 웃으니까 더 멋있네. 처음에 너무 심각해 보여서 무서웠어요. 잘난 얼굴인데 매일 인상만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도 됐고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힘든가요?”     

“이 나라가 힘들다기보다 내 자리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구나.”     

“자리요? 아. 당신도 조선에서 꽤 높은 직위를 가진 분이신가 봐요. 장군 같은 그런 거? 하긴 갑옷 같은 거 입으면 정말 잘 어울리겠어요. 짱!”     


지수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짱?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 죄송해요. 멋있다는 뜻이에요. 하하.”     

“참. 못 말리는 여인이구나.”     


지수는 시계를 다시 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서 더 얘기하면 참 좋겠는데, 저는 정조대왕을 보러 가야 해요. 같이 가주실 수 없다면, 위치라도 알려주세요. 얼굴이라도 꼭 보고 돌아가야 해요. 그게 제가 여기 온 이유니까요.”     

“그런 거라면 너는 이미 소원을 이룬 것 같구나.”     

“네? 그게 무슨…?”     

“내가 네가 찾는 정조, 이산이다.”     


지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정조도 놀라 지수를 따라 주저앉았다.     


“괜찮은 것이냐.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저… 지금 한 말 참이십니까? 당신이 정말 정조대왕이십니까?”     

“그렇다. 내가 네 말을 믿을 수 없듯이 너도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것이냐. 그럴 만도 하지. 이해는 한다.”   

“아뇨. 믿어요. 저는. 처음부터 당신이 정조대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뭐?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냐.”     


지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음… 딱 제 스타일이었거든요! 너무 멋있어서 제가 존경하는 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하하.”     

“스…일?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네 얘기는 반밖에 못 알아듣겠구나. 어쨌든 나쁜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네~ 좋은 뜻이에요. 그리고 이건 못 알아들으셔도 돼요.”     

“그래. 알았다. 근데 나를 만나서 하고 싶다는 얘기는 대체 무엇이냐.”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그게 뭐냐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또 자신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는 자들 틈에서 어떻게 그런 강인한 정신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매일 일기를 썼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게 원동력이었는지 여쭙고 싶었어요.”     

“미래에서 왔다는 터무니없는 말이 사실이긴 한가보구나. 나를 암살하려 한다는 자가 있다는 건, 궁 안에서도 몇 명 알지 못하는 사실인데. 음. 내가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오더냐? 실은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다. 궁 안에 있는 모든 순간이 무섭고 두렵다. 왕으로서 내가 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잘 이끌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어질 때가 많다. 그리고 네가 말하는 일기라면 일성록을 말하는 듯하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이제는 그게 나를 매일 반성하며 성찰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고.”     

“역시. 일기가 진리군요. 저도 요즘 그 일기의 효과를 톡톡히 본지라 그게 얼마나 큰 힘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정조대왕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입니다. 세종대왕과 맞먹는 성군으로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분이니까요. 백성들을 사랑한 왕, 효심이 지극한 왕, 그리고 후대에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저는 세종대왕보다 당신을 더 만나고 싶었습니다. 세종대왕이 봄에 마땅히 피어야 할 꽃이라면, 당신은 도저히 꽃을 피우기 힘든 겨울에 홀로 피어난 꽃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러니 힘을 내세요.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더 당당히 보여주세요.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역사가 당신 편이니까요.”     


정조는 그 이상한 여자의 말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어느 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참. 내가 정신이 없었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아. 제가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저는 신지수라고 해요.”     

“신지수. 예쁜 이름이로구나. 내가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마음이 답답하여 혼자 있고 싶어 이곳을 찾았는데 이런 기이한 인연을 만나게 될 줄이야. 참으로 괴이한 일이지만, 이런 경험도 나쁘지만은 않구나. 허허.”     

“저도요! 저야 뭐. 당신을 만나러 온 거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인간적인 당신의 모습을 알게 된 것도 너무 좋았고요. 그냥 이렇게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었습니다. 저의 하루를 아깝지 않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백성을 사랑하는 멋진 왕으로 남아주세요. 가끔 미래에서 온 저도 생각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지만요.”     

“마치 마지막처럼 말을 하는구나. 나도 너를 만나게 되어 너무 감사한 하루를 보냈구나. 어지럽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너는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보석 같은 여인이구나. 밝고 긍정적인 심정이 너를 더 빛나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너도 너의 세계에서 계속 그런 모습으로 살아다오. 그리고 오늘 나를 찾아와주어 고맙다. 내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구나.”     


정조와 지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수는 시계를 바라보고는 마지막 말을 건넸다.     

“진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제가 갑자기 사라져도 놀라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부탁? 그게 무엇이냐.”     

“저 한 번만 안아주세요.”     

“하하하. 안아달라니. 조신한 여자는 아닌 것 같구나.”     

“우리 세계에서 안는 건 인사하는 정도란 말이에요! 마지막 인사로다가 왕과의 포옹 정도면 아주 근사할 것 같은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참 볼수록 재미있는 아이로구나. 하하하. 그래. 알았다. 내 너의 마지막 소원쯤 못 들어주겠느냐. 이리 가까이 오거라.”     

“와! 신난다!”     


지수는 폴짝 뛰어 넓은 정조의 품 안에 쏙 안겼다. 그의 품은 너무 따뜻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지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다시 자신의 방 침대였다.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실제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황홀한 시간 여행이었다. 시간은 정말 딱 24시간이 지나있었다. 지수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다녔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저 생생하게 꾼 판타지 꿈처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수는 아마추어 소설가였기 때문에 더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수는 이 이야기를 소설화시켜 <정조대왕과 아찔한 하룻밤>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책도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의 밤이 더 생생하게 기억났고, 점점 더 그가 그리워졌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더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지수는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똑똑]     

이번에도 젊은 남자가 지수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또 오셨군요.”     

“네. 한 번 더 구매하고 싶어서요. 일주일 분도 구매되나요?”     

“네. 물론이죠.”     


지수는 이번에도 전자기기에 서명을 한 뒤, 캡슐이 들어있는 상자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에는 갑자기 일이 생겨 일주일 동안 연차를 써야 한다고 둘러댔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는 혼자 멀리 여행을 떠난다고 말해뒀다. 그리고는 얼른 캡슐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지 눈은 감고 있지만, 얼굴은 벌써 태양열로 뜨거웠다. 주변에서는 말발굽 소리와 사람 소리로 시끄럽고, 야외인지 흙먼지가 코로 다 들어왔다. 사람들은 지수를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듯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며 지나갔다.     


“아. 내 옷차림 때문인가보다. 얼른 이 튀는 옷부터 갈아입든지 해야겠다.”     


지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근처에서 대충 옷을 사 입었다. 이제야 사람들의 시선에서 편해진 지수는 왜 궁 밖으로 오게 됐을까 의아해했다. 분명 정조대왕을 생각하며 캡슐을 먹었는데 궁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와 있는 게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사람들이 길 한복판에 너도나도 엎드려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왜들 이래. 왕이라도 행차하는 건가? 오! 그럼 정조대왕이 지금 오고 있다는 뜻인 거네! 이번에도 정확하게 데려다줬군.”     


지수는 엎드려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사람들과 달리 정조의 행차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가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조금 뒤 정말 지수가 그리워하던 정조대왕이 많은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지수의 앞을 지나려고 하고 있었다. 지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폴짝폴짝 뛰며 정조에게 두 손을 흔들어댔다. 정조도 지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런데 정조가 명을 내리기도 전에 호위무사들이 지수를 잡아 와 정조대왕 앞에 무릎을 꿇렸다.     


“수상한 자가 있어 끌고 왔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잡혀 왔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지수는 정조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정조도 그녀를 따라 피식 웃었다.      

“궁으로 데려가서 내 친히 문초할 것이니, 가마에 태워라.”     

“예.”     


지수는 정조의 호의로 편하게 가마를 타고 행차를 따라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정조가 일하는 모습을 가마 창문 사이로 힐끔힐끔 바라봤다. 뒷모습마저도 멋진 그였다. 궁에 돌아오자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정조는 모두 해산하라고 명했다. 죄인을 어쩌냐는 물음에 알아서 할 테니 다들 나가서 아무도 들어오지 않게 망을 보라는 말만 했다. 왕의 어명이라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은 나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 나간 걸 확인한 후에야 정조는 지수가 탄 가마의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지수는 정조의 손을 잡고 가마 밖으로 나왔다.      

“여긴 어떻게 다시 온 것이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보고 싶어서요.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어서 왔어요.”     

“참.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역시 보통 여인은 아니로군.”     

“흥! 쑥스러워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반갑지 않으신 겁니까?”     

“흠. 흠. 그럴 리가 있느냐. 나도 네가 그리웠다. 오늘도 그때처럼 네가 갑자기 사라졌을까 봐 행차 내내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느냐. 가마를 열어 네가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안심됐단 말이다.”     

“정말요? 헤헤.”     


지수는 또 정조의 품에 멋대로 안겼다. 정조도 이제는 익숙한 듯 지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오늘은 무얼 하고 싶소? 말괄량이 공주님?”     

“음. 저 거기 가보고 싶어요! 그 왕좌 있고, 신하들이랑 모여서 일하는 곳!”     

“아아. 편전을 말하는 모양이구나. 그래. 가자.”   

  

정조는 지수의 손을 꼭 잡았다.      


“오해는 말거라. 갑자기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잡는 것뿐이니.”     

“네~ 알겠습니다. 전하. 히히.”     


지수는 처음 보는 편전에서 마구 뛰어다녔다.     


“우와! 여기 엄청 크다! 낮에는 여기서 신하들과 정책을 의논하고 그런다는 거죠? 신기하다. 어? 저기가 바로 왕좌인가 봐요!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곳에 함부로 앉으면 막 죽고 그러던데. 저도 여기 앉으면 죽고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하하하. 앉아보고 싶은 게냐?”     

“네…앉아보고 싶긴 한데 안된다면 조르진 않을게요.”     

“아니다. 여기 너랑 나 둘 뿐인데 안될 것도 없지. 앉아 보거라.”     


지수는 신이 나서 단숨에 왕좌로 뛰어 올라가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고, 서서 뛰어도 보며 즐겁게 놀았다. 그런 지수를 바라보며 정조는 세상사의 고단함이 죄다 잊히는 기분을 느끼며 혼자 중얼거렸다.      


“저 아이만 보면 그냥 웃음이 나는구나. 종일 저 아이만 봐도 좋을 만큼.”     

지수는 이제 다 놀았다는 듯 왕좌에서 내려와 정조에게 쪼르르 달려온다.

“저. 다른 것도 해봐도 돼요?”     

“더 하고 싶은 게 있느냐? 하하. 그래. 말해 보거라.”

“저 말 타보고 싶어요!”     

“말? 말을 타본 적이 있느냐?”     

“아니요. 없어요. 그래서 타보고 싶어요.”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구나. 처음 타보는 거라 위험하니 나랑 같이 타자꾸나.”    

 

정조는 왕만 출입 가능한 연마장으로 몰래 지수를 데리고 들어간다. 그중 털이 너무 곱고 예쁜 백마를 보고는 감탄하며 쓰다듬었다. 말도 자신을 예뻐하는 지수의 마음을 알았는지 온순하게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녀석 다루기 쉽지 않은 녀석인데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다.”   

“오! 정말요? 이렇게 순한데요? 저 애랑 놀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정조는 백마의 고삐를 잡고 들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멋지게 곤룡포를 휘날리며 단번에 말에 올라탔다.      

“자. 내 손을 잡거라.”     


지수는 정조의 손에 이끌려 말에 올라탔다.    

  

“이제 달릴 거니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야 한다.”    

 

지수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정조는 말의 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정조는 말의 고삐를 잡으며 지수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 순간 지수의 심장은 들판을 신나게 달리는 말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조의 품에 안겨서 말을 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한데 불안해요. 당신과 영영 헤어지고 싶지 않게 될까 봐.”     


바람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한 정조가 되물었다.     


“뭐라고 했느냐?”     

“아니에요~ 너무 좋다고요!!!”     


그렇게 지수와 정조는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이제 깜깜한 밤이 찾아오고 나서야 그 둘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꾸나. 아… 이번에도 가야 할 시간인가?”     

“아니요. 이번에는 저번보다 시간이 조금 더 벌어왔답니다.”     

“참말이냐?”     

“네. 참말이죠! 기쁘십니까 전하?”     

“요놈이 왕을 놀리는 것이냐. 하하. 그래. 기쁘다. 매우.”     


정조는 보는 눈이 많은 왕의 침실이 아닌 지수를 처음 만났던 곳으로 지수와 함께 갔다. 그곳은 정조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마치 폐허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곳으로 변해버렸지만, 답답할 때마다 혼자 찾아와 생각을 정리하기엔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지수와 함께 있기에는 이곳만큼 제격인 장소가 없었다.     


“어? 여기 저번에 왔던 그곳이네요!”     

“기억하느냐?”     

“당연하죠! 제가 처음 전하를 뵈었던 곳인걸요. 너무 좋아요.”     

“네가 좋아하니 다행이구나. 들어가자꾸나.”     


정조와 지수는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눴다. 그날 밤 그 방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자다 깬 지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조는 이미 방에 없었다. 정조가 덮어주고 간 곤룡포만 남아 있었다. 정조가 집무를 보러 간 사이, 지수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하고 방을 나섰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시장을 구경하고 싶어 한양에 가장 큰 시장을 찾아갔다. 지수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시장을 홀로 활보하며 주막에서 국밥도 먹어보고, 예쁜 노리개, 비녀 구경도 하고, 사람들의 말도 엿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깜깜해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나 정조가 자신을 찾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얼른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역시나 정조는 지수보다 빨리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는 지수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지수에게 다가왔다.    

 

“기다리셨…”     


정조는 지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지수를 팔을 당겨 자신의 품에 꽉 안았다.     


“가버린 줄 알았다.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죄송해요. 근데 조금 살살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저 너무 숨이 막히는데…”     

“아.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처음 보는 시장 구경이 너무 재미있어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시장이 나보다 좋더냐?”     

“아하하. 당연히 아니죠. 전하가 제일 좋아요!”     

“거짓말!”     


정조는 지수의 머리를 살짝 때리며 웃는다. 그리고 지수는 정조가 때린 머리를 문지르며 바보처럼 웃는다.      

“종일 돌아다니느라 고단하겠구나. 어서 들어가서 밥부터 먹자.”     


지수는 왕이 먹는다는 진수성찬을 정조와 같이 먹는다. 배고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던 지수는 정조와 마지막 남은 닭 다리 하나를 먹겠다고 서로 수저 싸움을 하다가 정조의 품으로 미끄러져 넘어진다. 갑자기 그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지수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놀라 얼떨결에 정조에게서 떨어져 앉는다.     

“풉. 갑자기 너답지 않게 내외하는 것이냐.”     

“아니… 그런 게 아니오라…”     

정조는 그런 지수가 너무 사랑스러워 밥상을 저 멀리 물리고, 돌아앉은 지수를 뒤에서 안아버린다.     

“악!”     

“내가 싫은 것이냐. 그럼 놓아주겠다.”     

“아니. 싫지 않아요. 너무 떨려서 그랬어요.”     

“음… 그렇다면 오늘은 너를 그냥 보고만 있기가 힘들 것 같은데.”     

“네? 그게 무슨…”

“이 나라의 아비이기 이전에 나도 한 남자이니라.”     

정조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바라보는 지수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입을 맞춘다.      

“읍…”     


지수도 지그시 눈을 감고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받아들이며 팔로 그의 목을 감싼다. 정조는 불을 끄고 지수의 옷고름을 푸른다. 그리고 어제는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그곳에 지수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또 하루의 밤이 지나가고, 아름다운 새소리가 지수를 깨웠다. 아직 날은 밝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은 정조의 품 안에 있었다. 물끄러미 정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쓰다듬다가 그의 입술에 살포시 굿모닝 키스를 한다. 지수가 가볍게 키스를 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정조가 지수를 꽉 껴안고 딥키스를 퍼붓는다.  

    

“뭐에요! 언제부터 깨어있었어요!”     

“음. 잔적이 없는데?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줄곧 너를 보고 있었다. 네가 뒤척거리기에 잠깐 자는 척을 한 것뿐.”     

“으휴. 이 엉큼한 사람!”     

“또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구나.”     

정조는 지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너를 이곳에 묶어둘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그냥 네가 웃는 것만 봐도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는구나. 할 수만 있다면 너를 아무 곳에도 보내지 않고 싶다. 그저 내 옆에만 묶어두고 싶다.”     

“실은 저도 전하의 마음과 같습니다. 전하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모든 걸 버려도 상관없을 만큼.”     

“그게 가능한 일이더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서 한번 알아봐야죠. 제가 이곳을 택한다면, 저는 어떤 사람인 걸까요. 이 세상에서도, 저 세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겠죠? 그것이 조금 두렵습니다.”    

 

정조는 지수가 자신 때문에 모든 걸 버리는 것만큼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써 단호한 척하며 말했다.     

“아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모두 잊거라. 너의 세계로 돌아가 나를 잊고 살거라. 나의 이기심으로 너의 행복을 뺏고 싶지 않다.”     


정조는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지수도 그런 정조에게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둘은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계속 붙어있자며 작전을 짰다. 정조가 집무를 보는 시간에는 편전 뒤편에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 그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궁을 산책할 때는 상궁의 옷을 입고 그의 최측근에서 그를 보좌했다. 그리고 밤에는 오로지 그와 단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지만, 야속한 시간을 그 둘의 사랑을 질투라도 하듯 지나 가버렸다. 그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시 다가왔지만, 둘은 마지막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마지막 입맞춤을 나눌 뿐이었다.      


그렇게 지수는 연기가 되어 사라지듯 사라져버렸다. 여인으로 인해 이렇게 마음이 아플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정조는 마음 한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지수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울다 지친 지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회사를 찾아갔다. 직원은 눈이 퉁퉁 부은 지수를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무슨 일 없어요. 한가지 문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네. 말씀하세요.”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말인데요. 혹시 평생 이용권도 있나요?”     

“아예 그곳으로 가실 작정이신 겁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요.”     

“아예 그런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추천해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왜죠?”     

“예측하셨겠지만, 평생 이용권을 사용하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후회한다고 해도 다시 돌아올 방법이 없어요. 지금은 돌아오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곳에서 적응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숨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당신은 그 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보세요.”     

“아니요. 주세요. 저 이제 그 사람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어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좋습니다. 그게 그 사람 곁이라면요.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그 사람만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치 사약을 내미는 사람처럼 서명지를 내민다. 지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명하고 캡슐을 받아왔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의 현재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걸 모두 포기해야만 했으니까. 지수는 당장 그 캡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후회가 되지 않을 만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이별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때부터 지수는 더 열심히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현재에서 하고 싶었던 일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정조에 대한 그리움만은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이제 더는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시간을 보낸 지수는 친구 영미를 찾아간다.     


“나 부탁이 있어. 무조건 들어줘야 해.”     

“너 무섭게 왜 그래.”     

“나 우리 가족들한테 외국으로 유학 간다고 거짓말할 거야. 그니까 나 대신 부모님께 매년 편지 좀 부쳐줄래. 잘 지내고 있다고. 거기서 결혼해서 잘 정착해서 사는 것처럼 부모님 좀 안심시켜줘. 그리고 자주 좀 찾아가 봐줘. 나 대신.”     

“너 왜 그래. 어디 가는데.”     

“역사 속으로.”     

“뭐?”     

“3년 전, 그날 밤 기억해?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전광판 본 거? 나 진짜로 그걸로 정조대왕을 만났어. 그리고 이제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가 됐어. 내 모든 걸 버리면 그와 함께 살 수 있대. 그래서 그러기로 했어.”     

“야! 신지수!! 너 진짜!!”     

“네가 아무리 말려도 갈 거니까 말리지 말고, 내 부탁 들어줘라. 그래야 내가 편하게 가지.”     

“아…흑…이 나쁜 년아. 너 진짜 나쁜 년이야. 흑…”       

“미안해. 영미야.”          


지수는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친구와도 가족들과도. 그리곤 유학 간다는 핑계를 대며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부모님을 보니 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캡슐을 삼켰다.        



   

지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저 멀리 보이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었다. 지수는 한눈에 그가 정조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있는 힘껏 뛰어가 그를 안았다. 정조는 놀라 칼집을 잡았다가 낯선 향기에 지수임을 눈치채고는 지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     

“헤헤. 저예요. 전하!”     

“여기에 네가 어떻게… 아니.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헛것이라뇨! 보고도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조는 그제야 지수를 힘껏 안았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슴이 사무치도록 네가 그리웠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라. 어명이다. 이제 내가 너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구나.”     

“저도요. 저도 그랬습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다시는 전하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진심이냐. 정말 다시는 떠나지 않는다는 말.”     

“그럼요.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     


지수는 두 팔로 정조의 목을 끌어당겨 먼저 입을 맞췄다. 정조도 그런 지수의 허리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 둘의 뒤로 멋진 노을이 그들을 축복하듯 붉게 빛났다.      


“네가 모든 걸 버리고 내게 온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전하만 옆에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다오.”     


정조는 이 왕궁에 더는 자신도, 그녀도 가둬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모든 걸 버리고 자신에게 왔듯 자신도 모든 걸 버리고 그녀에게 가고 싶었다. 새장 안에 갇힌 새가 아닌 자유로운 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이 아름다운 조선을 여행하고 싶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그녀와 함께라면 그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정조 재위 24년. 6월 28일 영춘헌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방에서 조용히 글을 쓰던 지수는 뜬금없는 곡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영춘헌이라면, 전하가 계시는 곳인데. 설마… 안돼!”     


지수는 털썩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정조였다. 정조는 지수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런. 누가 우리 공주님을 울렸을까. 누가 보면 사랑하는 낭군님이라도 잃은 줄 알겠네.”     

“어…떻게 된 거예요?”     

“내게 시간을 달라고 했던 말. 기억나느냐? 내가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었다. 지금 곤룡포를 입고 누워있는 건 내가 아니다. 네가 모든 걸 다 버리고 내게 왔듯 나도 나라 정도는 버려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이 답답하고 위험한 궁 안에 너를 가둬둘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멋진 왕이 아닌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당연하죠. 당신이 왕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당신이 좋은 거니까요. 전하야말로 이대로 떠나도 괜찮으신 겁니까.”     

“나도 당연히 괜찮다.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그곳이 천국일 테니. 자. 가자. 이 조선 팔도를 평생 여행하며 살자꾸나.”     

“네!!! 가요.”     


정조는 하얀 백마에 올라타 지수를 번쩍 안아 말에 태웠다. 그리고 힘껏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 둘을 태운 말을 저 멀리 서서히 사라졌다. 모든 걸 버렸지만, 그 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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