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자는 수트를 입어야 하나?
도서 [정장입는 남자 & 수트입는 신사]의 일부 내용입니다.
에피소드 1. 왜 남자는 수트를 입어야 하나 ?
알렉스는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전체적인 핏을 확인했다. 거울 속에는 수트를 입은 댄디한 느낌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치감 있는 네이비 색상으로 입어서 전체 옷이 원래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넥타이에는 과하지 않게 사선 무늬가 들어가 있다. 브리프 케이스는 다크 블루 컬러로 매치했다. 수트 상의의 소매 끝은 손목 위로 살짝 올라와 있어서 흰색 와이셔츠가 살짝 보였다. 재킷 가슴 포켓에는 행커치프가 풍성한 카네이션처럼 입체적으로 꽂혀 있다.
거울에 비친 알렉스의 스타일은 TV 속 패셔니스타 이미지와는 달랐다. 패셔니스타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속에서 눈에 띄는 스타일이지만, 알렉스는 그다지 화려한 컬러로 눈길을 끌지도 특별한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지도 않았다. 그의 스타일은 기본에 가장 충실한 느낌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되어 마치 입고 태어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옷차림을 정돈한 알렉스는 시간을 확인하고, 구두를 신고 집 밖으로 나섰다.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강의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알렉스는 매주 수트 스타일링 강의를 하고 있다. 참석자가 남자만 있을 것 같지만 간혹 여성들도 참석을 하곤 했다.
알렉스는 지하철의 빈자리에 앉아서 이동하면서 금일 강의 참석자 명단을 확인했다. 성별이나 직업에 따라서 강의 및 컨설팅 진행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니 30대 남성이었다. 알렉스는 30대 남성이 주로 궁금할 만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정리했다. 그리고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자신이 강의 진행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번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몇 차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마쳤을 때, 지하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는 차분히 눈을 뜨고 내릴 준비를 했다.
알렉스는 한 손에는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깨끗한 구두 소리를 내며 강의 장소에 걸어갔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의 옷차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행커치프는 곡선이 그대로 살아있었고, 수트 역시나 구김 없이 깔끔했다. 방금 스타일링을 받은 것처럼 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화보 속 모델처럼 보였다.
강의실에는 30대 남성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알렉스는 손목에 찬 은색 시계를 확인했다. 자신이 늦었나 살펴봤지만 다행히 강의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 입니다.”
알렉스는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에 응했다. 알렉스는 안부를 건네며 남성 앞에 앉았다. 강의실은 소규모로 스터디 룸 같이 아담했다. 그래서 강사가 앞에 서서 연설하는 방식이 아닌,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편하게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자리를 정돈한 알렉스는 강의 시작 전에 강의에 온 이유를 물었다. 남성은 처음에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천천히 그를 리드했고, 남성은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30대 남성 이름은 ‘이기한’ 예비 사업가였다. 그는 수트 스타일링 강의에 왔지만, 사실 수트를 입어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그런 기한이 이번 강의에 오게 된 것에는 사연이 있었다.
기한은 사업을 준비하기 전에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의 회사는 복장 규정이 없어서, 회사원이지만 경조사를 제외하고는 정장 입을 일이 없었다. 정장을 자주 안 입어서 그런지, 기한에게 수트는 불편한 옷이었다.
그런데 사업을 준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주변 사람마다 “사업할 거면 제대로 된 수트 하나는 있어 야지.”라고 조언했지만, 처음에는 그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업 준비로 사람 만나는 일이 잦아지긴 했지만, ‘깔끔하게만 입으면 되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업 준비 과정은 매끄럽지가 않았다. 중요한 투자처와의 미팅은 결과가 좋지 않았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복장을 신경 쓰라고 말했다. 기한은 설마 복장 때문일까 싶어서 그런 말들을 무시했었다. 그런데 반복되는 투자처 불발은 불안을 야기했고, 점점 사소한 모든 것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투자가 지연되면서 사업 진행 속도는 점점 더뎌졌다.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옷에 대해 지적했고, 수시로 “남자는 수트지!”라고 말했다. 다른 조언을 얻으려고 만난 전 직장 동료 역시나 “중요한 미팅인데 정장을 입고 가는 게 낫지 않아?”라며 은근히 기한의 옷을 지적했다. ‘깔끔하게만 입으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기한은 자신이 없어졌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는 난생처음으로 옷은 어떤 걸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기한에게 정장은 단지 경조사 때 입는 옷이었다. 그래서 그가 가진 정장은 블랙 색상 한 벌이 유일했다. 주변의 조언대로 정장을 입으면 달라질까 싶어서, 투자처 미팅 자리에 입고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NO”였다. 정장을 입어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사업이 생각대로 안 되자 기한은 실의에 빠졌다. 술 먹는 날이 잦아지고, 자신감은 하락했다.
의기소침해진 그의 모습에 여자친구 유리는‘iSUIT’라는 명함을 건넸다.
“이 사람 강의 들어보는 건 어때? 우리 과장님이 여기서 수트 컨설팅 받고 계시거든. 그런데 컨설팅 받으니까 정말 몰라보겠더라. 우리 회사 사람들이 다 놀랐다니까?”
기한은 유리의 말에 울컥 화가 났다. 자신은 보통 체격으로, 잘생긴 것은 아니지만 준수한 편이었다. 옷을 잘 입는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게만 입어도 평균보다는 괜찮아 보인다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옷차림 지적을 하고 있었다. 보통이라고 생각했던 옷차림이 그렇게 문제였을까? 지금 힘든 게 정말 옷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뭐. 컨설팅이라도 받으라고?”
그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냈다. 얼굴에는 짜증과 화가 잔뜩 묻어났다. 불퉁한 말투에 유리는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화내지? 과장님 스타일 바꾸고 나서 영업 실적이 확 올랐어. 이번 달에는 팀에서 1등까지 했다니까? 그전에는 직책만 과장이지, 실력은 영 아니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야.
오빠가 요즘 사업 준비로 힘들어하니까. 과장님의 영업 비결이라도 알면 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어제 과장님한테 커피 사주고 비결이 뭔 지 물어봤단 말이야.”
유리는 말을 잠시 멈추고 기한을 흘겨봤다. 자기 맘도 모르고, 무작정 화를 낸 기한이 야속했다. 그래도 최근 기한의 상황이 안 좋으니. 착한 자신이 참아야 했다.
“과장님이 주신 명함이야. ‘iSUIT’에서 매주 하는 강의 컨설팅이 있다고 한번 들어보라고 하셨어. 내가 신청해 놨으니까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들어봐.”
기한은 유리의 말에 명함을 바라봤다. 믿음은 안 가지만, 스타일을 바꾸고 나서 실적에서 1등을 했다는 과장님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iSUIT’처음 듣는 브랜드였지만, 유리의 말 대로 속는 셈 치고 강의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시작 전에 기한의 고민을 들은 알렉스는 틈틈이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강의를 진행하며 추가로 이야기 해주었다. 하지만 강의가 끝난 뒤에도 기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유익하긴 했지만 영업하는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유리의 과장님이 왜 영업 1등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내용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는 사업에 도움이 될 것 같긴 하지만, 심장에 콱 박힐 만큼 다가오지는 않았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기한을 본 알렉스는 그를 위한 스타일링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강의가 끝나고 기한은 알렉스와 같이 카페로 향했다. 알렉스는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기한에게 주문을 해보라고 권했다.
“괜찮다면 커피 주문은 기한 씨가 해보겠습니까?”
기한은 알렉스의 말에 의아했다. 알렉스의 눈동자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그 속에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했다. 기한은 이유를 묻지 않고 건네는 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앞장서서 카페에 들어가 계산대 앞에 섰다. 여자 직원은 힐끗 눈동자만 움직여 기한을 보고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기한은 여자 직원을 신경 쓰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주문을 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네. 포인트 카드는 없으시고요?”
“네.”
주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자 직원과 기한은 서로 할 말만 하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주문하는 몇 분 동안 알렉스는 기한보다는 주문을 받는 직원을 관찰했다. 여자 직원이 특별히 무례하게 행동한 건 없었다. 카페 직원은 단순히 인사를 하고 주문을 받았다.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에 앉았다. 알렉스는 서두르지 않고, 기한이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질문을 던졌다.
“주문 받는 직원 태도가 어땠습니까?”
기한은 알렉스의 질문에 기억을 되짚어 봤다.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카페 직원은 평범하게 주문을 받은 것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었다.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이었기에 기한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기한을 보며 알렉스는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의 첫인상은 3초 만에 결정됩니다. 카페 직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님을 판단하고 상대하게 됩니다. 지금 기한 씨는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일반적인 캐주얼 차림이죠.
카페 직원의 태도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세요. 목소리 톤, 대하는 태도, 표정 모두 다요. 예를 들어, 친구에게 하듯이 편하게 대했는지, 손님에게 하듯이 응대했는지. 주문했던 당시의 전체 분위기를 떠올려보세요.”
알렉스의 설명을 들은 기한은 직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기억에 남을 만한 점은 없었다. 딱히 불친절하거나 무심하게 응대한 느낌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평범했다. 일반 카페에서 주문을 받았던 느낌 그대로였다. 대접받는 느낌이나 공손한 느낌도 없었다. 주문만 제대로 받아주면 되지, 대접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식당이나 카페 직원들 태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기한은 알렉스가 말한 전체 분위기를 떠올리려 애썼다. 방금 응대한 카페 직원과 다른 카페 직원들의 태도를 비교해 봤다. 이전에 봤던 카페 직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쾌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님 대우를 받았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응대한 느낌이었다. 기한은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씁쓸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네요. 그런데 그건 직원 교육 문제 아닙니까?”
“직원 교육의 문제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직원이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매일 수많은 매장 직원들이 똑같이 교육을 못 받고, 기분이 언짢은 상태에서 일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알렉스의 지적에 기한의 기분은 더욱 하강 곡선을 그렸다. 결국, 알렉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의 옷차림과 전체적인 느낌을 지적한 것이다. 기한은 새삼 고개를 숙여 옷을 살폈다. 잘 입은 건 아니지만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 대한민국 남성의 표준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입어서, 옷차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금 제 복장이 많은 문제가 있나요?”
“지금 모습이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첫인상은 3초 만에 결정이 됩니다. 3초 동안 무의식적으로 상대가 어떠한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거죠. 이 결과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결정됩니다. 가령, 상견례 자리에서는 보통 정장을 기본으로 입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신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상견례 자리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 상상해 보세요. 예비 장인어른과 장모님 표정이 밝을까요? 아마 기한 씨가 의사나 장관이라고 해도 첫인상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할 겁니다.
이런 판단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아까 카페 직원도 3초 만에 기한 씨를 판단했을 겁니다. 기한 씨가 말을 하기도 전에 판단이 끝나버린 거죠. 그 판단의 근거는 아쉽지만 짧은 시간에 보이는 기한 씨의 헤어스타일, 외모, 옷차림 같은 겉모습입니다. 직원의 태도에서 받은 느낌을 잘 되새겨 보세요. 그리고 다음에 같은 여자 직원이 근무할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수트 스타일링 된 모습으로 주문을 해보세요. 그럼 태도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겁니다.”
기한은 그의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다. 알렉스가 오늘 강의에서도 들었고, 그 전에 각종 패션 글이나 프로그램에서도 흔히 들었던 말이다.
기한도 사실 평소에 정장을 입어 봤다. 그러나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정장만 입으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저도 정장을 입어 봤습니다. 그런데 바뀌는 게 없었어요. 그 태도의 차이는 얼굴 외모 때문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보이는 제 얼굴은 바로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요?”
기한은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알렉스는 당황하지 않고, 덤덤히 대화를 이어갔다.
“실례지만 어떤 정장 스타일을 입으셨어요?”
기한은 기분을 가라앉히고 집에 있는 정장을 설명했다. 그는 간단히 컬러와 사이즈를 말했지만, 알렉스는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수트와 바지 컬러. 넥타이는 어떻게 매는지. 셔츠와 바지 기장. 구두 색상까지. 질문에 답을 하던 기한은 점점 답하기 어려워졌다. 컬러는 기억하기 쉬웠지만, 자세한 사이즈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매 길이나 바지 기장은 평소에 입는 옷들도 잘 모르는 정보였다. 기한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림잡아 대략으로 대답했다. 답을 들은 알렉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 위에 놓인 진동벨이 울렸다. 기한은 주문했던 계산대로 가서 아메리카노를 가져왔다.
“기한 씨 실례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정장은 기한 씨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정장도 어울리는 게 있습니까?”
패션의 ‘피읖’도 모르는 기한은 어울리지 않는 정장이 있다는 게 생소했다. 정장은 다 비슷비슷한데, 특별히 어울리는 게 있을까?
“음. 먼저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말씀 드릴께요. 여자들은 꾸며야 하는 종류가 많습니다. 메이크업, 헤어, 옷, 액세서리 등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로 꾸밉니다. 그래서 얼굴이 너무 예쁘지 않지만 왠지 모르는 시선이 가는 분들이 있죠. 그럼 남자는 무엇으로 꾸밀까요? 남성은 여성들과 달리 몇몇 포인트들이 정해져 있죠. 주로 신경 쓰는 건 헤어스타일, 옷차림 그리고 시계 같은 액세서리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알렉스 신의 질문에 기한은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시계 아닌가요? 액세서리는 바로 사서 착용하면 되니까요.”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계가 가장 빛날 때는 스타일링이 딱 맞았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기한 씨가 몇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시계를 착용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계와 기한 씨 둘 다 빛을 보지 못할 겁니다.”
기한은 상상해보지 않아도 알렉스가 말한 예시가 바로 이해되었다. 기분 좋은 예시는 아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네요.”
“사실 가장 쉬운 건 옷입니다. 옷이라고 하면 패션을 떠올리지만, 저는 수트를 말씀 드리는 겁니다. 수트는 기본적으로 젠틀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주고 신뢰감을 형성합니다. 수트는 격식을 차릴 수밖에 없는 의복입니다. 쉽게 다리를 벌리거나, 팔을 크게 벌리는 게 불편하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이 어느 정도의 긴장하게 됩니다. 적당히 팔을 올리고 다리를 벌리게 되죠.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앞에서 품위 있게 행동하게 됩니다. 기한 씨가 격식 있게 행동하면 상대방도 자연스레 격식을 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남성이 자신에게 맞는 수트를 입으면 분위기가 180도 바뀌는 겁니다.”
기한이 정장을 기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편해서 였다. 편하게 입고 싶어서 집에 있는 정장을 일부러 큰 사이즈로 구매했었다. 그런데 정장이 일부러 불편하게 입는 의복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수트는 꼭 사이즈에 딱 맞게 입어야 합니다. 기한 씨 경우에는 사업 준비로 사장님들을 많이 만나시죠? 그런 자리에서는 신뢰감 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의 체형에 딱 맞는 사이즈를 입는 게 기본입니다. 제가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기한 씨가 가지고 있는 수트는 체형에 비해 사이즈가 큰 것 같습니다. 크게 입으면 예전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럼 당연히 신뢰도도 떨어지겠죠.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는 큰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기한은 이제야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대학생들이 입을 법한 편한 옷만 입은 것이다. 하나뿐인 검은색 정장도 알렉스의 말 대로 예전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업 미팅에 있어서 신뢰가 기본인데, 가장 중요한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투자자 중에는 기한의 사업 계획서가 맘에 든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막상 만난 CEO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마지막 결정에서 유보된 거였다. 기한은 문제점을 파악했고 어떤 점을 고쳐야 하는지도 감을 잡았다. 기한은 자세를 바로 하고 수첩을 꺼내 메모할 준비를 했다. 그는 이전보다 더 자세하게 알렉스에게 질문했다.
알렉스와 대화하면 할수록 기한은 집에 있는 정장을 어서 버려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비슷비슷한 줄 알았던 수트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였다. 기한은 쏟아지는 방대한 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었다. 조언을 쏟아내던 알렉스는 아메리카노가 바닥을 보일 때쯤 말을 멈췄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지난 후였다. 알렉스는 앞에 앉은 기한을 바라봤다. 처음과 달리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도 제대로 된 수트의 필요성을 이해한 것 같았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한 씨. 일주일 뒤에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다시 이 카페에 와보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했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을 겁니다.”
기한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직 의아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기한은 스마트폰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행히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에 일정이 비어 있었다.
기한은 눈앞에 보이는 카페를 두고 긴장이 되었다. 이 카페는 일주일 전에 알렉스와 왔던 바로 그 카페였다. 그가 말한 대로 일부러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에 카페를 방문했다. 일주일 전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기한의 옷차림이었다. 일주일 전에는 체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남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이비 컬러의 제대로 된 기본 수트를 착용을 하면서 세련돼 보였다. 머리는 깔끔하게 넘겼고, 넥타이는 알려주었던 대로 수트와 톤온톤 매치로 선택했다. 그리고 구두는 브라운 컬러로 전제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포인트를 주었다.
기한은 일주일 만에 평범한 대학생에서 세련된 신사로 탈바꿈했다. 그는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굳어 있는 어깨를 풀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을 풀고 자연스럽게 천천히 걸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저번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주문을 받는 직원도 같은 사람이었다. 기한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자 직원을 처음 본 사람처럼 무표정을 유지한 채 카운터 앞에 섰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기한은 주문하면서 슬쩍 주문을 받고 있는 직원을 관찰했다. 기대와는 달리 여자 직원은 일주일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속으로 실망한 기한은 고개를 돌리는 데 우연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은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그 횟수가 잦았다. 일주일 전에는 힐끗 보고 고개를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시선이 몇 번이나 마주쳤다. 여자 직원의 달라진 모습에 기한은 그녀의 태도를 다시 살펴봤다. 꼼꼼히 놓친 부분이 없나 생각해보니 여자 직원의 목소리 톤도 미묘하게 달랐다. 기한은 진동벨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기한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알렉스의 말 대로 직원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기한은 혹시나 카페 직원이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서 태도가 바뀐 건가 싶어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손님에게는 어떻게 응대하는지 관찰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지만, 표정과 제스처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여자 직원은 평이하게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손님에 따라서 눈을 맞추는 횟수가 달랐고 표정도 미묘하게 달랐다. 여자 직원의 태도는 고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알렉스의 말대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하는 일부분 일 것이다.
기한은 유리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관찰했다. 얼굴이나 체형이 달라진 건 없었다. 바뀐 건 옷차림 즉, 수트를 제대로 착용한 것뿐이었다. 알렉스 말이 맞았다. 스타일의 변화는 일상생활에도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기한은 카페 직원의 변화만 확인했을 뿐이지만 마음이 두근거렸다. 왠지 다음 미팅은 성공적일 것 같았다. 기한은 알렉스가 말해준 내용을 다시 되새겼다. 그 내용을 참고해서 다음 미팅에는 어떤 스타일로 입고 갈지 기분 좋게 고민했다.
- 에피소드 1 끝 -
- 작가, 강사, 그리고 평범한 사람을 작가로 데뷔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대표 저서 : [글 못 쓰는 소설가] 외 9권
- 매주 '글 못 쓰는 소설가의 소설쓰기' 강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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