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글못소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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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베리아 왕국의 국왕, 휴버트 3세는 단상 위에 올라갔다. 단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광장에는 백성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휴버트 3세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이 우리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우리 실베리아 왕국에 승리를 안겨주고 주변 국가들로부터 식량을 구해왔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는 밥을 먹었으며 그가 있었기에 우리는 안전했습니다.”
실베리아 528년 몇십 년째 지독한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계속되었다. 사람이 먹을 농작물이 없으니 가축은 진즉에 잡아먹거나 굶어 죽었다. 백성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메마른 나무뿌리를 씹거나 이웃에게 무기를 겨누고 음식을 빼앗아가는 범죄를 저질렀다. 가뭄은 실베리아 왕국에만 찾아오지 않았다. 주변 국가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실베리아 530년 제1차 식량 대전이 일어났다. 동쪽 나라에서 먼저 공격을 당한 실베리아 왕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국방력에 힘을 집중했다. 그렇게 모인 실베리아군은 동쪽나라에 복수를 하고 크게 승리를 하였다. 전쟁의 전리품으로 동쪽 나라의 식량을 실베리아로 가져와 백성들에게 먹였다. 그렇게 그 시대에는 강한 국가만이 굶지 않을 수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검술은 ‘붉은 검 [헤르온]’과 호각을 다투는 전사였다. 그러나 동쪽 나라의 일개 병사의 기습에 목숨을 잃었다. 평소에 그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공격이었음에도 그는 적의 어설픈 기습에 당황하여 검도 이상하게 휘두르다 심장에 칼이 꽂혔다. 그렇게 그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온 휴버트 3세는 국왕실로 걸어갔다. 그가 왕좌에 앉자 곁에 있던 하녀가 쟁반에 한 조각의 과일을 내밀었다. 그러자 휴버트 3세는 하녀의 뺨을 세차게 때리며 소리쳤다.
“이 천한 년아, 내가 이 나라 국왕이다. 과일을 한 보따리 싸서 대접하지 못할지언정 한 조각을 주는 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더냐! 내가 [아크 에반]이라도 이따위로 대접을 했을 것이냐?”
바닥에 쓰러진 하녀는 빨개진 볼을 감싸며 눈물을 흘렸다.
“폐하, 최근 동쪽 나라의 전쟁에 패하여 그들이 대부분 식량을 약탈하였습니다. 하여 지금 국고가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전쟁에 패한 것이 내 탓이란 말이냐? 너희가 그렇게 위대한 전사라고 칭송하는 [아크 에반]이 죽어서가 아니더냐! 밖에 누구 없느냐 이 년을 옥에 가두고 물 한 모금도 주지 말아라!”
붉으락푸르락해진 휴버트 3세는 병사들을 불러 하녀를 끌고 가게 했다. 끌려가는 하녀 옆을 지나 실베리아 왕국의 늙은 책사가 들어왔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눈엣가시였던 [아크 에반]이 죽었는데 왜 그리 성을 내십니까?”
휴버트 3세는 책사를 보며 못마땅한 듯이 말을 했다.
“눈이 있으면 밖에 백성들을 보시오. 이 나라 국왕은 나이거늘 어째 백성들은 나보다 일개 병사인 [아크 에반]을 더 존경하지 않소? 아마 내가 죽어도 저렇게 슬퍼하지 않을 것이오!”
“옛말에 ‘성군은 백성을 굶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야 [아크 에반]이 전쟁으로 식량을 구해와 굶지 않으니 존경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휴버트 3세는 기분 나쁜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어째 그대도 나보다 [아크 에반]을 좋아하는 것 같소? 밥도 구하지 못하는 나보다 [아크 에반]이 성군이다?”
책사는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전사라고 칭송해도 일개 병사이며 병사의 주인은 폐하이십니다. 무지한 백성들은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만 보이고 작물을 품은 땅의 고귀함을 모르지요. 제가 어찌 고귀하신 폐하보다 한낱 농부보고 성군이라 하겠나이까?”
만족한 대답을 들은 휴버트 3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다가 이내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그래도 그놈이 쓸모가 많았는데 죽었으니 아쉬운 감도 있소. 그놈이 죽고 자꾸 전쟁에서 패하니 말이오.”
“제가 병사들의 훈련에 참관하여 쓸만한 놈을 더 찾아보도록 하겠나이다.”
책사는 영웅의 중요성을 안다. 영웅은 그의 힘이 아닌 군사들의 사기를 좌지우지하는 존재이다. 지금 [아크 에반]의 죽음으로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이다. 그를 대체할 만한 영웅이 다시 나타난다면 군사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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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은 죽어서도 국가를 지키는 존재라며 국경 근처 초원에 시신을 매장한다.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의 시신 역시 실베리아 전통에 따라 국경 근처 넓은 초원에 매장하기 위해 몇몇 병사들이 땅을 파고 있다. 다만 지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초원은 풀이 아닌 모래로 가득했다.
“콜록콜록, 아 모래 엄청 날리네. 이런 곳에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을 매장하라니 국왕도 너무한다. 아무리 그래도 영웅인데 특별대우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루디는 말라비틀어진 땅을 파내며 한마디 했다. 이어 그와 같이 땅을 파는 동료 병사가 말했다.
“전통이라고 하잖아. 뭐 국왕이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을 시샘했다는 소문도 있어 수상하다만 어쩌겠어.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나저나 어쩌다 돌아가시게 된 거지? 검술로는 붉은 검 [헤르온]님과 호각이라고 들었는데, 일개 병사의 검으로 돌아가실 분이 아니었잖아?”
“검술뿐이야? 창술, 궁술, 승마, 전략 술까지 다 갖춘 분이셨지. 심지어 무기와 방어구도 직접 제작하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고 했어. 그래서 위대한 전사라고 불리게 된 거라고. 전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능력들을 다 갖췄으니까. 근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
코가 유난히 큰 동료 병사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신기하듯 말했다.
“바로 각 분야의 일인자들과 실력이 비등했다는 거야. 붉은 검 [헤르온]님과의 대전에서도 항상 무승부였고 창, 궁, 말타기도 최고라고 불리는 자들과 비슷한 실력으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어.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은 각 분야의 일인자들을 배려한 것이라고, 자신이 이기면 그들은 일인자 자리를 뺏기게 되니까 말이야. 천재의 배려심이지. 나는 뭐든 걸 다 갖췄으니 너희가 잘하는 1가지를 뺏지 않겠다. 이런 거 아니겠어?”
루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누워 비단으로 덮여 있는 [아크 에반]의 시신을 보았다. 실력뿐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그분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직 믿기지 않았다. 루디는 삽을 내려놓고 몰래 [아크 에반]의 시신 쪽으로 슬금슴글 낮은 자세로 기어갔다. 살아생전 그를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의 시신의 얼굴이라도 가까이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비단을 내려 그의 얼굴을 보려는 순간 뒤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이놈!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장례를 담당하는 감독관이었다. 말을 타고 있는 감독관은 따가운 눈초리로 루디를 내려보았다. 깜짝 놀란 루디는 차렷 자세를 하였다.
“그, 그게 아니라 저는 얼굴을 한 번 직접 보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찰나에 동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땅이라 모래가 쉽게 날렸고 모래는 감독관이 타고 있는 말의 눈을 때렸다. 깜짝 놀란 감독관의 말을 히힝 거리며 앞발을 높게 치 세우자 루디 역시 놀라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의 머리에 박치기하고 말았다. 시신을 덮고 있던 비단 역시 바람에 날려 시신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머리를 부닥친 루디는 통증을 호소하며 눈을 뜨자 깜짝 놀랐다. [아크 에반]의 핏기없는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나 놀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시신은 눈을 번쩍 뜨더니 이상한 기운이 루디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으악 뭐, 뭐야!”
루디는 앉은 채로 뒷걸음을 치며 도망쳤다. 그러자 말을 진정시킨 감독관이 와서 물었다.
“뭐냐? 이놈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루디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 방금 시신이 눈을 떴습니다. 저랑 눈을 마주쳤다니까요? 그러더니 소름이...아니 무슨 기운이 저한테 온 것 같은데...”
감독관은 혀를 차며 한심한 듯 말했다.
“이미 심장이 멈춘 시신이다. 아무리 위대한 전사라 할지라도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순 없어! 어서 돌아가 땅이나 계속 파거라!”
루디는 멍하니 시신을 바라보았다. 분명 눈을 뜨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다시 감겨 있었다. 그리고 아까 받은 이상한 기운, 분명 묘한 기운을 느꼈다. 여전히 주저앉은 채 두 손을 펼치며 바라보고 있는데, 아까 얘기를 나눈 동료 병사가 와서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언제 여기 와서 사고 친 거야. 빨리 와 하던 일 마저 끝내야 숙소로 돌아가지.”
또다시 그 느낌! 동료 병사의 손을 잡자 그 느낌이 다시 흘러들어왔다.
“어? 그런데 너도 코를 벌름거리네 나도 그런데 하하”
이상한 소리를 듣자 루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뭘 벌름거려?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모르긴 지금도 계속 벌름거리고 있잖아. 우리 동네에서는 코 벌름거리는 것도 아무나 못 하는 재능이었는데, 나만큼 잘 하네 하하.”
루디는 손을 코에 대보니 정말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있었다. 코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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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책사는 실베리아의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그중에는 붉은 검 [헤르온]도 있었다.
“아시다시피 [아크 에반]이 죽자 군사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소. 동쪽 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이 시기에 군의 사기가 떨어진 것은 큰 재앙이오. 하여 나는 사기를 높이고자. 대련 대회를 열어보자 하오.”
“좋은 생각이십니다. 영웅이 사라졌다면 영웅을 만들어야지요. 대회의 우승자는 틀림없는 실력자일 테니 그를 영웅으로 만든다면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질 것입니다.”
붉은 검 [헤르온]은 그 말을 듣더니 비꼬듯이 말했다.
“어째 장군은 나 따위로는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질 수 없다는 듯이 들리오?”
붉은 검 [헤르온], 명실상부 그는 실베리아 최고의 검이었다. 웬만한 병사들 수십이 공격을 해도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리는 그였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아크 에반]에 의해 그의 평판은 내려가고 말았다. 검술로는 호각을 이루었지만 뭐든지 잘 하는 [아크 에반]이 위대한 전사의 칭송을 받으며 일인자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헤르온]은 이인자로 밀려났다.
“아, 아니 헤르온 장군이야 이미 실베리아 최고의 검 아니오? 내 말은 영웅의 공석이 생겼으니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명 더 채우자는 것이지 절대 헤르온 장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오. 많은 군사가 헤르온 장군은 존경하는 것은 여기 장군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않소? 내 말이 맞지 않소. 다들?”
“당연하지.”
“물론이오. 헤르온 장군이 진정한 영웅이지 사실 아크 에반은 출신이 천하지 않았소.”
다들 붉은 검 [헤르온]의 눈치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붉은 검 [헤르온]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왕의 외가 친척이었다. 그의 권력도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럼 이번 대련 대회 저도 출전하겠소. 내 위상을 다시 한번 세울 좋은 기회 같으니 말이오.”
대련 대회에서 우승하면 계급상승과 함께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출전하는 병사들은 우승하기 위해 더 훈련에 임하고 대회 분위기로 인해 사기가 높아지는 효과 또한 얻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아크 에반]의 죽음은 잊혀지고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름이 알려지고 계급도 장군인 [헤르온]이 출전 한다면 다른 병사들은 기대가 한풀 꺾일 것이다. 실베리아에서 붉은 검 [헤르온]을 이길 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는 아직 일반 병사이지만 실력이 출중한 자를 선출하기 위해 하는 대회요. 이건 폐하의 뜻이기도 하오. 헤르온 장군이 출전한다면 대회 취지가 어긋날 것 같소 이만.”
늙은 책사는 턱수염을 만지며 한마디 했다.
“제가 직접 병사들과 겨뤄본다면 실력이 출중한 자를 더 선출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압니까? 나와 실력이 비슷한 병사도 있을지요? 그럼 그대가 그렇게 바라는 우리 실베리아 군의 사기가 높아질 것입니다. 나 헤르온과 대등한 사람이 또 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하하.”
붉은 검 [헤르온]은 자존심이 강한자 였다. 웃으면서 호탕한 척했지만 [아크 에반] 때문에 짓밟힌 자신의 위상을 다시 찾고 싶었다. 그리고 절대 자기가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 또한 실베리아의 군인인데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늙은 책사는 눈을 찌푸렸다. 국왕은 명령하는 자이지 부탁을 들어주는 자가 아니다. 국왕의 처남이란 것을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헤르온]의 교만함이 못마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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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는 활시위를 당겼다. 50m 거리의 과녁에 겨냥하고 쏘려는 순간, 미세한 바람의 변화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그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화살은 루디의 손을 떠나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처음에는 과녁에서 어긋나게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바람으로 방향이 바뀌더니 정확히 과녁에 꽂혔다.
“확실히 내가 미친 건 아닌 것 같네.”
10발 중 9발을 명중했다. 평소 루디라면 2발도 잘 한 것이다. 그만큼 궁술에는 소질이 없는 루디였다. 루디는 활을 내려놓고 두 손을 펼치며 쳐다보았다.
“능력을 뺏는 거? 아니지 궁술 교관의 실력이 그대로 인 것 보면 능력을 복사하는 거겠지?”
위대한 전사 [아크 에반]의 시신에서 묘한 기운을 받은 후 타인의 능력을 복사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번 시험해본 결과 능력 복사는 누적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복사하면 이전 사람의 능력은 사라졌다.
“아크 에반의 행적이 이제 이해가 가는군. 어쩌다 그 능력이 나한테 옮겨 온 건지 모르겠지만 잘만 하면 나도 이번 대련 대회에서 우승하고 그처럼 영웅이 될 수 있을 거야.”
신분 상승. 평범한 그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 행운은 야심이 되고 야망이 되었다. 붉은 검[헤르온]의 검술 능력을 복사만 한다면 대련 대회의 우승은 문제도 아닐 것이다. 문제라면 [헤르온]의 손을 잡아야 능력이 복사될 텐데 장군급인 [헤르온]을 마주하기에는 신분 차가 너무 컸다.
“루디야 너 그 소식 들었어? 이번 대회에 붉은 검 [헤르온]님도 참전한 데, 이거 대회를 하나 마나 아니야? 실베리아 왕국에 [헤르온]님을 이길 자가 어딨다고 참.”
동료 병사가 뜻밖에 소식을 전해주었다.
“뭐? [헤르온]님도 참전한다고? 그럼 [헤르온]님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겠네?”
“너도 참전한다고 했으니 가까이 볼 수는 있겠지. 넌 그게 중요하냐? 우승은 물 건너간 거 라고. 아 뭐 네가 우승할 확률은 아예 없었겠지만 말이야 흐흐.”
“무슨 소리야? 난 적어도 결승에서 무승부까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하하.”
루디는 동료 병사의 약 올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머릿속에는 온통 붉은 검 [헤르온]의 검술 능력 복사만 있었다. [헤르온]의 능력만 복사만 한다면 준우승까지는 노릴 만했다. [헤르온]이 출전한다면 그가 우승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대중의 관심은 자신에게 쏠릴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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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당일, 출전 병사들은 광장에 모여 정렬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국왕 휴버트 3세가 와서 연설하였다.
“현재 우리 실베리아 왕국은 동쪽 나라뿐 아니라 주변 국가와 전쟁 중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의 두려움도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용맹한 실베리아 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전하는 병사들과 관중들은 환호를 질러댔다.
“이번 대련 대회는 우리 용맹한 실베리아 군에서 특출난 병사를 선출하기 위하여 열었습니다. 대회 우승자에게는 장군으로 올라갈 기회와 수많은 상금을 주어질 것입니다.”
다시 관중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출전 병사들은 우승자의 포상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승은 붉은 검 [헤르온]이라는 생각에 다들 노리는 것은 준우승이었다. 준우승만 되어도 눈에 띄기 때문에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다들 붉은 검 [헤르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단 한 사람, 루디는 [헤르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능력을 복사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디는 [헤르온] 장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헤르온] 장군 옆에서 호위를 하는 병사가 막아섰다.
“누구냐 왜 다가오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저는 [헤르온] 장군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루디에 말에 호위 병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같은 대회에 출전한다고 해서 네놈이 함부로 말을 걸 분이 아니시다. 물러가서 대회 준비나 하거라.”
옆에 있던 붉은 검 [헤르온]도 루디를 한 번 쓱 쳐다보다 흥미 없다는 듯 개인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루디는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소리쳤다. [헤르온]의 관심을 끌 말로 말이다.
“붉은 검 [헤르온] 장군님이시라면 전투에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크 에반]이 죽은 그 전투에서 말입니다.”
자신의 라이벌 [아크 에반]이라는 말이 나오자 [헤르온]은 루디에게 눈을 돌려 말을 했다.
“네 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루디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크 에반]에게 위대한 전사라는 칭호는 과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베리아 왕국의 전사는 오직 [헤르온] 장군님뿐인데 말입니다. 일개 병사의 검에 죽은 자가 무슨 위대한 전사라는 말입니까? 그가 죽자 엄한 실베리아 병사들이 그 전투에서 전멸을 당했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 [헤르온] 장군님이 계셨더라면 우리는 그렇게 허무하게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붉은 검 [헤르온] 장군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을 드리고 싶어 무례하게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헤르온]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은 루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일어나거라 네 말이 맞다.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전멸당하는 자들은 동쪽 나라의 병사들일 것이고 전투에 승리한 자는 우리 실베리아 군이었을 것이다. 그대같이 뛰어난 병사가 우리 실베리아 군사인 것이 자랑스럽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루디라고 합니다.”
“내 너의 이름을 기억하마. 그럼 대회에서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헤르온]은 루디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루디는 그가 어깨를 다독이건 이름을 기억하건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손길에 그의 검술 능력이 복사된 것을 느끼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회는 1:1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창(槍)이든 검(劍이)든 도(刀)이든 무기는 상관없었으나 나무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게 했다. 전쟁 시기인 만큼 한 명의 병사들이 소중하다. 대회 중 사상자나 부상자가 나오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루디의 순서가 되자 목검을 들고 대련 홀 중앙으로 나갔다. 상대는 창을 들고 있었다. 루디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하였다.
“상대를 제압하여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거나, 항복이라는 소리를 듣는 자가 우승이다. 그럼 시작!”
교관의 시작 소리에 루디는 눈을 떴다. 상대도 창끝을 앞으로 내세우며 낮은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루디의 눈에는 헛점투성으로 보였다. 들고 있는 목검도 무기가 아닌 마치 자신의 팔이 연장된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이럇!”
상대가 먼저 달려와 찌르기를 공격했다. 평소 루디 실력이라면 당황하여 허둥지둥 피해겠지만, 붉은 검 [헤르온]의 능력을 복사한 루디는 달랐다. 공격 전 상대의 보폭이 훤히 보였다. 빠르게 달려와 왼발을 앞으로 빼니 왼쪽 허벅지에 근육이 뭉쳐지는 것이 보였다.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내 두 어깨는 살짝 뒤로 젖히고 반동으로 앞으로 내밀어 찌르기를 하였다. 루디는 날아오는 창을 가볍게 옆으로 반원을 그리며 피하였다. 그리고 그 회전력을 이용해 목검으로 상대의 뒷덜미를 가격하였다.
- 퍽
일격. 상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기절하였다. 경기 시작 1분도 안 된 시각이었다.
- 와 아아아
“뭐야 방금 어떻게 된 거야?”
“쟤 루디 맞아? 언제 저렇게 실력이 늘었지?”
루디의 경기를 지켜보던 다른 선수들과 관중들은 얼떨떨하더니 이내 환호를 질러댔다. 휴버트 3세와 늙은 책사도 높은 상석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움직임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군. 게다가 저 여유와 침착함이라... 전투 경험이 많은 자요?”
늙은 책사는 국왕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자입니다. 실력이 출중한 자는 제가 조사한 바가 있었는데, 처음 보는 병사입니다. 숨겨진 보물이군요. 제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루디 또한 자신의 움직임에 놀랐다. 마치 온몸의 근육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런 세계에 살고 있었구나….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세계였어.’
놀라는 것은 처음 순간뿐이었다. 이내 자신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루디는 잇따른 경기에도 순조롭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붉은 검 [헤르온]의 경우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결승전은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었다.
*
“누가 이길 거 같아? 루디? 헤르온님?”
“당연히 붉은 검 [헤르온]님이지 아무리 루디가 지금까지 잘 했다고 해도 여기까지야 [헤르온]님을 어떻게 이기냐?”
“에이, 그래도 기적이란게 있잖아. 안 그래?”
관중들과 병사들은 웅성웅성하며 결승전을 기대했다. 본래라면 당연히 붉은 검 [헤르온]이 우승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껏 보여준 루디의 경기는 그 생각을 흔들리게 했다. 그만큼 루디는 압도적인 승리를 하며 결승까지 올라왔다.
“허! 좋은 성과가 있길 바란다고 했는데 정말 네가 결승까지 올라올지는 몰랐구나.”
붉은 검 [헤르온]은 루디를 결승에서 보자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다 헤르온 장군님 덕분입니다.”
루디는 가볍게 묵례를 하며 대답하였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대련 홀 중앙에서 단상에 앉아 있는 국왕 휴버트 3세를 보며 경례를 하였다. 이어 휴버트 3세가 말을 하였다.
“이렇게 실베이라아 훌륭한 인재들이 많으니 과인은 참으로 기쁠 따름입니다. 이제 마지막 경기만 남았으니 각자의 실력을 뽐내어 우리 실베리아 군의 위상을 드높여 주기를 바랍니다.”
휴버트 3세가 말을 마치자 [헤르온]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헤르온 장군”
“결승에 올라온 저를 비롯한 저 병사 역시 가히 실베리아의 우수한 인재로 판단됩니다. 하여 각자의 진짜 실력을 끌어올려 대련하는 것이 많은 병사의 귀감과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소. 이대로는 진짜 실력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그게 아니옵고 무릇 전사라면 이런 장난감 같은 목검이 아닌 진검으로 승부를 겨뤄야 상대의 진짜 실력을 판가름할 수 있으며 급박한 긴장감 속에서의 대련이 자신의 한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이옵니다.”
휴버트 3세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고 고민하며 말했다.
“허나, 진검은 잘 못 하다간 죽음에 이를 수 있소. 이는 상관 없단 말이오?”
붉은 검 [헤르온]은 미소를 지으며 웃더니 관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용감한 실베리아 군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관중들은 [헤르온]의 말에 소리쳐 대답했다.
“말도 안 됩니다. 실베리아 군은 대륙 최고의 병사들입니다!”
“죽음조차 벌벌 떨며 도망가게 하는 것이 실베리아 군입니다!”
관중들이 [헤르온]의 말에 호응하며 [헤르온]장군의 이름을 외쳐대자 휴버트 3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감정을 감추고는 말하였다.
“모두의 뜻이 그렇다면 결승전은 진검으로 승부를 겨루도록 허락하겠소.”
관중들은 다시 한번 환호를 질러댔다. 이어 휴버트 3세가 자리에 앉자 늙은 책사가 와서 물었다.
“폐하 한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오?”
“왜 자꾸 [헤르온] 장군의 청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아무리 왕비 마마의 혈육이라고 하나 폐하 앞에서까지 기고만장하는 꼴이 폐하의 권위에 해가 될까 걱정이 되옵니다.”
휴버트 3세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맞소 [아크 에반] 다음으로 내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 [헤르온] 놈이었지. 실력이 아깝지만, 저놈도 그냥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했소. 그래서 이런 묘안을 생각했지. 대련 중 사고로 인해 죽음. 결승을 진검으로 하자는 소리는 본디 내가 먼저 하려 했는데, 저놈이 먼저 꺼낸 것이 뜻밖이었지만 말이야. 하하”
늙은 책사는 국왕의 말을 듣고 헤르온과 루디에게 진검을 나눠주는 병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헤르온에게 준 진검에 미세하게 금이 간 것은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었다.
*
‘미치겠군. 진검이라니.’
이길 생각까진 없었다. 실력이 똑같은데 어떻게 승부를 내겠는가? 적당히 실력행사를 한 뒤 붉은 검 [헤르온]에게 아깝게 졌지만 거의 호각이었다. 마치 죽은 [아크 에반]과 같은 실력이었다. 라는 것이 루디의 시나리오였다.
‘어차피 똑같은 실력. 목검이든 진검이든 상관없겠지. 사고로 죽는 일 따윈 없을 거야.’
전투경험이 많이 없어 떨던 루디는 긴장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반면 여유가 넘치는 [헤르온]이었다.
“루디....라고 했던가? 아무쪼록 잘 해보세.”
교관의 신호와 함께 시합이 전개되었다. 먼저 달려오는 건 [헤르온]이었다. 검을 높게 올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자 루디는 자신의 검으로 막으며 흘려보냈다. [헤르온]의 검은 아래로 흘러갔고 이내 방향을 바꾸어 루디의 다리를 노리며 베기를 시도했다. 루디는 검의 움직임을 보고 다리를 올려 피했고 백 텀블링을 하여 거리를 벌렸다.
실베리아 제일검 [헤르온]이다. 그는 두 합만 겨뤄봐도 상대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실력자이군. 운으로 올라온 것은 아니야.’
[헤르온]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진지하게 임할 각오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헤르온]의 검의 금은 점점 더 갈라지고 있었다.
이번엔 루디가 먼저 공격을 했다. 큰 동작은 피하며 짧게 그리고 위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 챙, 챙, 챙
대련 홀에는 두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루디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말한 사람들도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헤르온]과 호각을 이루는 것을 보고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점점 당황하는 [헤르온]. 그는 당황, 조급함 그리고 어쩌면 [아크 에반]과 같이 자신과 호각인 루디의 등장에 자신의 위상이 또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루디였다.
- 챙!
두 검은 서로 맞대고 힘겨루기를 했다. 실력은 비슷하나 근력까진 복사할 수 없던 루디가 조금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힘겨루기를 버티지 못한 [헤르온]의 검이 균열이 심하게 가더니 깨지고 말았다. 검이 깨지자 그대로 루디의 검이 [헤르온]의 상체를 갈라 피가 솟구쳐 나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전개가 또 생겼다. 깨진 검의 파편이 빙글빙글 돌아 추진력이 가해지더니 루디의 손목을 자르고 가버렸다.
“커, 커억”
붉은 검 [헤르온]은 피를 토하며 가슴의 상처를 손으로 막아보았지만, 이미 크게 베인 상처에 너무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쓰러지고 말았다.
“크아악!”
자신의 잘린 오른 손목을 보며 루디도 소리를 질러댔다. 믿기지 않은 현실과 고통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잘리지 않은 왼쪽 손에 무언가 물컹하고 잡혔다. 지나가던 도마뱀이었다. 루디는‘설마’라는 생각을 하며 왼손으로 도마뱀을 꽉 쥐었다.
*
“어떻게 되었소?”
두 사람이 크게 상처를 입자 휴버트 3세는 급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대회를 마무리 하고 상처 입은 두 병사는 치료하게 했고 관중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국왕은 국왕실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책사에게 물었다.
“헤르온 장군은… 결국 목숨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헤르온]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휴버트 3세는 딱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미 예상했고 또 바라기도 했다. 그가 궁금해하는 건 루디였다. 눈엣가시인 [헤르온]이 죽은 건 상관없지만 그래도 국가의 전역에 큰 일조를 하는 자였다. 그런 자와 대등하게 싸운 루디는 앞으로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자는 어떻게 됐소? [헤르온]과 호각이었던 그자는 말이오? 손목이 날아갔으니 이제 다신 검을 못 잡겠지?”
휴버트 3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한탄하였다.
“그게 사실…. 들어오너라!”
늙은 책사는 말을 아끼고 밖에 대기하고 있던 루디를 들어오게 했다. 그의 오른 손목은 피로 물들어 붉어진 천에 감겨있었다.
“보여드려라.”
책사의 명령에 루디는 붉게 물든 천을 풀었다. 그곳에는 분명하게 베어나간 오른손이 자리를 잡고 붙어 있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내 분명 손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대로 고하겠나이다.”
루디는 바닥에 엎드려 지금까지의 있던 일들을 모두 고했다. [아크 에반]의 능력이 자신에게 옮겨왔고 그로 인해 자신이 [헤르온]과 호각으로 대련한 사실. 그리고 그 복사 능력이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통하여 마치 도마뱀 꼬리처럼 자신의 손이 돋아나 새로 생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사실이긴 하나, 내 눈으로 확인을 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래, 어쩐지 그 [아크 에반] 놈 수상하긴 했었는데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었군.”
“폐하 감히 제가 한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루디는 계속 엎드린 채로 휴버트 3세에게 물었다.
“말해라.”
“아마 [아크 에반]도 동물의 능력을 복사하는 것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의 행적에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허나 소신이 이 능력을 발견한 만큼 우리 실베리아를 위해 쓰고 싶습니다. 제가 코뿔소의 능력을 복사하면 능히 동쪽 나라 성문을 맨손으로 부술 수 있을 것이고. 원숭이의 힘을 복사하면 나무를 자유자재로 타서 적국을 염탐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입니다.”
“음… 확실히 쓸모있는 능력이긴 하도다.”
실베리아를 위해서라면 분명 필요한 능력이긴 했다. 허나 명예욕이 많은 휴버트 3세는 또다시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 인물이 등장한 것 같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물러나 몸을 추스르도록 하라. 그리고 너의 비밀을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내 조만간 다시 부를 일을 있을 것이니라.”
루디는 기뻐하며 휴버트 3세에게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자신의 출세가 기정사실인 것처럼 느꼈다.
“책사는 어떻게 생각하오?”
루디가 나가자 휴버트 3세는 책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휴버트 3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늙은 책사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곧 자신의 걱정이기도 했다. 왕권이 강해야 국왕에게 신임을 받는 자신의 권위도 유지된다. 또다시 민심과 권위가 일개 병사에게로 간다면 자신도 곤란하였다.
“폐하 제게 한가지 묘안이 있습니다.”
“묘안 말이오?”
휴버트 3세의 눈은 반짝거리며 책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이내 무릎치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성안에 울려 퍼졌다.
*
“실베이아의 국왕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동쪽 나라의 국왕 마틴 2세는 실베리아 성에 보물을 가지고 찾아와 휴버트 3세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였다.
“어서 오시오. 동쪽 나라 국왕께서 이리 직접 인사를 하러 찾아오시니 내 감격했소이다. 허허”
“아닙니다.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는데, 직접 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사람의 예의이고 도리이지요. 보내주신 고기 다섯 가마는 잘 받았습니다. 폐하 덕분에 우리 동쪽 나라의 백성들이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고기는 계속 보내 드리겠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나라끼리 매번 전쟁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참으로 못 할 짓 아니겠소? 우리 두 나라가 친하게 지내자는 화친의 의미로 건배나 하는 것은 어떻소? 하하”
휴버트 3세는 빈 잔을 들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는 화친이라고 했지만 엄연한 상하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눈치 빠른 마틴 2세는 술병을 들어 휴버트 3세의 술잔에 따라주었다. 동쪽 나라의 국왕이 실베리아 국왕에게 술을 따라 준다는 것은 이미 복종을 의미했다.
“고기를 나눠주신 은혜에 보답하여 저희나라에서도 매년 선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동쪽 나라 국왕의 선택을 어쩔 수 없었다. 매번 전쟁하는 것은 백성들의 배고픔을 더 촉진 시키고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식량이 풍부해진 실베리아와 전쟁은 피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폐하 궁금한 것이 있사온데, 어떻게 하여 요즘 같은 가뭄에 실베리아 왕국은 고기가 풍족하게 된 것입니까? 실베리아의 축산업에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휴버트 3세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대답하였다.
“루틴 국왕은 궁금한 게 많소이다. 우리가 조금 나누어 주어 배가 부르니 이제 전체가 탐이 나는 겁니까?”
휴버트 3세의 말에 루틴 2세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동쪽 나라의 국왕이 떠나고 휴버트 3세는 광장이 보이는 단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자신에게 환호하는 백성들을 보며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국왕 폐하 만세! 국왕 폐하 만세!”
풍족해진 고기를 백성들에게 나눠주자 백성들은 국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매일 만세를 외쳤다.
“하하 보이시오? 책사 이제 백성들이 나를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소.”
“‘성군은 백성을 굶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매번 고기를 나눠주시어 백성들이 이제 굶는 일이 없고 하물며 이웃 나라의 백성들까지 고기를 나눠주시니 실베리아 역사이래 폐하 같은 성군은 없었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풍족해진 고기 덕분에 전쟁은 끝이 나고 모든 백성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태평성대가 찾아온 것이다.
*
실베리아 성 깊은 지하실. 이곳에서 누군가의 신음과 함께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부탁합니다. 죽여줘요. 제발….”
커다랗고 평평한 돌에 누워 몸통이 묶여있는 자는 다름 아닌 루디였다. 그의 두 팔과 다리는 잘려있었다. 옆에는 도끼와 큰 식칼을 들고 있는 병사 2명이 있었다.
“안 되지 안돼 자네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단 말이야.”
“좋게 생각하라고. 자네 하나 덕분에 우리뿐 아니라 대륙 전체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있잖아. 성군은 백성을 굶기지 않는다며? 자네야말로 우리에게 성군이지 않겠나 하하하”
“그럼 뭐야? 내가 이 자식한테 폐하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농담을 주고받는 2명의 병사의 웃음소리는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루디의 도마뱀 능력으로 인하여 잘려나간 팔과 다리에서 새로운 팔과 다리가 돋아났다. 이어 익숙한 듯 도끼를 든 병사가 팔과 다리를 잘라냈고 식칼을 든 병사는 잘린 팔과 다리의 가죽을 벗기고 손질하였다. 지하실 한쪽 구석에는 그렇게 손질한 인육이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가죽과 수백 개의 손가락, 발가락들이 흩어져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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