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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Jul 26.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142 - 평안한 저녁

2023년 6월 23일 금요일


 오늘은 엄마와 교대하는 날이다. 주말 재활 시간표를 받았는데 일정이 애매하게 나와있다. 8시 반부터 시작해서 10시 5분에 끝났다가 10시 40분부터 재활을 한다. 35분 정도 시간이 허공으로 떴다. 아니면 쉬는 쉬간에 산책이라도 나갔다 오거나 쉬다가 다음 재활을 들어가면 될 것 같다. 사실은 바꿔달라고 말하기 귀찮아서 그냥 뒀다.


 그러고는 엄마한테 시간표를 찍어서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중간에 비어있는 시간이 애매하다며 일정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하라는 말이었다. 그냥 그대로 하면 안 되겠냐고 하니 귀찮아서 그렇냐면서 그래도 한번 물어보라고 한다. 살짝 짜증이 올라왔지만 데스크로 가서 일정 변경을 부탁했다. 직원은 맨 뒤에 있는 재활을 빈 시간으로 넣어서 바뀐 일정을 메모지에다 적어주었다.


 메모지에 적힌 일정을 보니 운동 치료를 하는 치료사까지 바뀌어 있어서 의아했지만 엄마한테 메모지를 찍어 보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일정 하나 바꾸는데 실력이 좋은 치료사가 빠져버렸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다시 한번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답장을 하지 않고 데스크로 가서 치료사가 바뀐 것 같다고 말하니 수정을 해줬다. 그리고 엄마한테 이야기하니 그제야 만족한 듯 수긍을 했다.


 물론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건 좋은데 나라면 그냥 했을 것 같다. 신경 쓰기도 싫고 그냥 사소한 건 넘어갔으면 좋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사람 상대하는 게 너무나 귀찮다. 대화 한 마디 나누는 것조차 지친다. 이번에 교대를 하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손길도 다정한 말 한마디도 아니다. 그냥 혼자 있고 싶다.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동생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이 되고 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나만의 시간도 필요했다. 오늘 저녁이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우선 보고 싶었던 영화 ‘엘리멘탈’을 예매했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부산대를 가보기로 했다. 도대체 얼마 만에 가보는 건지 모르겠다. 대략 3, 4년 만에 가는 것 같은데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나갈 생각에 들뜬 기분으로 있었더니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오늘 교대를 해서 그런지 신나 보인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듣고는 그저 히죽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대한 오늘 처리할 일은 전부 끝내고 교대를 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오는 걸 보자마자 당장 나가려는 나를 보고는 바로 나갈 거냐고 물었다.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니 엄마는 일을 왜 다 안 끝내고 남겨놓고 가나며 말을 던졌다. 그 일이라는 게 동생의 저녁밥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피딩을 끝내고 두 번째 피딩으로 바꾸는 걸 말하는 거였다. 엄마식 농담이라는 걸 알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져서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실컷 할 만큼 했는데 농담이라도 저런 말을 들으면 맥이 풀린다. 결국은 또 내가 뭘 안 하고 가는 거냐며 싸늘하게 대꾸를 했다. 엄마는 그런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냥 하는 말인데 왜 짜증을 내냐고 말한다. 더 이상 감정소모를 하기 싫어서 빠르게 인사를 끝내고 나왔다.


 물론 엄마는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푸념이 섞인 듯한 특유의 화법을 듣고 있자면 기분이 가라앉게 된다. 심지어 장난스러운 말투가 아니라 차분한 말투라서 진짜 불만을 말하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감정 표현이 서툴다 보니 그런 듯한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부담감이 느껴진다. 의도가 어찌 됐든 나와는 잘 맞지 않는 화법이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병원 밖을 나오는 순간 갑갑했던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거리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 틈 속에 섞여 있으니 마치 아무 일도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 어느 누가 나를 보고 간병을 하다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잠깐씩 나와서 맛보는 이 평안한 하루를 계속 느끼고 싶다.


 오랜만에 들린 부산대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 자주 갔던 즉석 떡볶이 식당은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무인 사진관만 잔뜩 들어선 것 같다.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헛헛해졌다. 그래도 영화관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생각보다 혼자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는 스토리는 뻔했지만 재밌었다.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드는 요소도 있었다. 서로 다른 원소가 만나서 사랑을 이루는 것을 보니 서로 다르다고 배척하는 세상이 아니라 화합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껏 나와는 다르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주인공의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버리고 꿈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만족스러운 상태로 영화관을 나와서 근처에 있는 옷가게를 들렀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트레이닝 바지를 사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봐도 원하는 바지는 안 보였고 포기하고 딱 한 군데만 더 들러보고 집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이곳에 내가 찾고 있던 바지가 있었다. 행거에 걸려있는 옷을 보는데 갑자기 흥분이 되었다. 내가 열심히 찾아다니던 옷이 아닌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나에 이렇게 행복해하다니 나란 사람은 역시나 단순하다. 아주 만족스럽게 쇼핑을 끝내고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이번 주말에는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에 마음 들떴다. 상상만으로도 벌써부터 즐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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