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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Sep 12.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160 - 로또

2023년 7월 11일 화요일


 오늘은 용인에서 부산으로 온 지 정확히 3개월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식단이 변경되는 날이기도 하다. 되돌아보니 콧줄을 빼고 죽을 먹기까지 5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동생이 한 단계씩 발전할수록 가족들은 불안을 덜어낸다. 가족뿐만 아니라 병실생활을 함께 하는 사람들도 축하를 해준다. 참 기쁜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과는 다르게 하늘은 어두컴컴하다. 비까지 세차게 내린다. 이번주 주말에 친구들과 합천을 가기로 했는데 전국에는 호우특보와 산사태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이럴 때 보면 병원 안에 있는 게 안전해 보인다. 궂은날에 비바람을 뚫고 출근을 할 필요도 없고 피해도 없다. 뉴스에서는 곳곳에서 폭우로 인한 사망소식이 들린다. 인생은 뭐랄까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한 끗 차이로 결정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이번주에 비가 온다는데 여행이 가능하겠냐는 친구와 엄마의 말을 듣고도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굳이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행동을 하지는 않겠지만 죽음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나타나기에 애를 쓴다고 피할 수 있을까 싶다. 차라리 놀다가 죽으면 그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까지는 즐겼다는 의미니깐 일하다가 과로사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글쎄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럴까 싶다.


 이승이 낫다는 건 저승에 갔다 와봐야 아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비교를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닐 텐데 어떻게 확신하는 건지 의문이다. 물론 세상은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다채로운 곳임은 분명하다.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그런 걸 체험해 보기 위해서라면 나는 더 이상의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건 죽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억울해하면서 이승을 떠돌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남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나의 죽음은 괜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어차피 언제, 어떻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 사람은 무조건 죽을 텐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예전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걸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 사람들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었다. 한번 사는 인생 아무 뜻 없이 길게 사는 게 뭔 의미가 있을까. 짧게 살더라도 후회 없이 자신의 뜻을 펼치면서 사는 게 더 멋진 것 같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나아질 거니 나 또한 힘닿는 데까지는 후회 없이 살아보려고 한다.


 그런데 하필 후회 없이 살기 첫 번째가 로또 사기다. 창 밖에는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지만 왠지 오늘 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귀찮아서 사러 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원에서 힘들었던 기억 말고도 소소한 추억으로 남을 만한 것들을 하나씩 만들어주고 싶었다. 로또 하면 옛날에 가족들끼리 동네 로또명당이라고 불리는 편의점애 가서 번호를 찍었던 게 기억난다. 항상 편의점이 있는 거리를 지나칠 때면 굳이 들려서 로또를 샀었다. 물론 당첨이 안 된 날이 더 많았고 된다고 하더라도 본전만 건진 수준이었지만 그런 소소한 일상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추억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밖을 나갔는데 로또를 사러 나가는 길은 역시나 험난했다. 우산은 썼지만 비바람에는 무용지몰이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채로 로또 판매점에 도착했다. 정신이 혼미했지만 뭔가 안 하던 걸 해보니 새로웠다. 로또용지를 받아 들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동생이 불러준 숫자를 칠해나가는데 누가 봐도 로또를 안 사본 티를 냈다. 6개만 칠해야 하는데 보너스 번호까지 7개를 칠해버렸다.


 사장님이 마킹을 잘못한 것 같다며 새로운 용지를 다시 주었다. 어떤 숫자를 빼야 할지 고민을 한다고 멍하니 서있었더니 사장님이 번거롭게 새로운 용지에 칠하지 말고 뺄 숫자에 엑스표시만 하라고 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5줄 모두 같아서 숫자를 직접 입력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괜히 번거롭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죄송해졌다. 사장님이 도움으로 무사히 3의 배수가 나란히 찍힌 로또용지를 받아 들었다. 로또는 총 2개를 샀다. 하나는 어젯밤이 동생이 이상한 말을 하면서 불러준 숫자를 그대로 입력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동생 느낌대로 찍은 번호였다.


나는 동생의 말대로 3, 6, 9, 12,15, 36로 5줄을 똑같이 채웠다. 그리고 다른 로또는 3, 6, 9, 12,15,18로 3줄을 채웠고 나머지 두 줄은 3, 6, 9, 12,15, 21과 3, 6, 9, 12,18, 21로 채웠다. 이 로또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에 남는 경험이긴 하다. 말도 안 되게 대충 찍어준 번호를 가지고 굳이 비를 뚫고 사온 걸 보면서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겠지만 재밌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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