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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r 06.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6 - 각자의 자리

2023년 2월 7일 화요일


 오늘이 두 번째 면회 날이다. 아침부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의 혈액 수치가 떨어져서 긴급 수혈을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병원에서는 흔한 일이라며 큰 문제는 아니라면서 안심을 시켰다. 그 말에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오늘 상태가 어떤지 직접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았다. 엄마는 오늘 아들을 만나고 집으로 내려가야 한다. 함께 하고 싶겠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나 또한 내 할 일이 있었다. 준비하려고 했던 기사 자격증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내가 이 상태로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래도 결정을 해야 한다. 오늘이 추가 원서 접수일이라서 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기대는 못 하겠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큐넷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원서접수를 진행했고 이제는 돌이키지 못한다.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공부를 해야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힘들면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했다.


  버스를 타고 동백 이마트에 내려서 환승을 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우리가 탈 버스가 온다. 보행자 신호부터 초록불이 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한 끗 차이로 버스를 탔기에 병원에는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었다. 금요일에는 앉아 있느라 몰랐었는데 오전 11시 30분이 되기 전부터 중환자실 앞에는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의자는 이미 만석이고 앉지 못한 사람들은 벽 쪽에 일렬로 서있었다. 생소한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픈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많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을지가 느껴져서 마음이 무거웠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경호원들이 나왔다. 구역에 따라 방명록을 작성하고 사람들은 입장할 준비를 했다. 그 어떠한 대기보다 가장 애타는 순간일 것이다. 사람들은 많이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빈 의자는 없었다. 지친 나머지 복도 구석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20분 후에는 엄마가 나와서 설명을 해줄 것이다. 나는 금요일에 면회를 갈 거니깐 보고 싶어도 며칠만 참으면 된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엄마는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동생의 상태가 어떻냐고 물어봤다. 병실에서 교수님이 이야기해 준 것을 들려주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뇌 부기는 없어서 재수술을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너무 다행이었다. 젊을수록 부기가 발생하면 뇌압을 견디지 못해서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했는데 동생이 잘 버텨주는 것 같아서 기특했다.  지금은 뇌에 무리가 가지 않게 수면제를 투여하면서 일부러 재운다고 했다. 수면제를 줄여보니 동생의 몸에 힘이 들어가서 진정제를 투여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회복 상태를 보면서 수면제량을 서서히 줄여 나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 가지 걸리는 건 이 점이었다. 출혈이 발생한 오른쪽 뇌 부위가 아무래도 압박이 되다 보니 손상이 되어 깨어났을 때는 신체 마비가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물론 자세한 건 동생이 깨어나고 재활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알 수 있다고도 했다. 엄마는 이 말을 전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과연 동생이 나중에 일어났을 때 자기 몸을 보고 혹여나 충격을 받진 않을까, 장애가 생긴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며 말이다. 나도 물론 걱정이 되었지만 엄마한테는 그걸 왜 미리 걱정하냐며 지금은 깨어나는 것부터 생각해야 할 때라고 세게 말해버렸다. 솔직히 지금은 앞으로 다가올 고통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더 속상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동생이 그전처럼 일상생활이 가능할 거라고 장담한다. 그런 모습이 될 거라고는 믿지도 않았고 상상으로도 하기 싫었다.   


  병원 면회를 끝내고 보니 기 시간이 많이 남아 시간 때울 곳이 필요했다. 우선 수원역으로 가기로 했다. AK플라자에 들어가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역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평일 오후였지만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암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와 나를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분명 같은 곳인데 우리 주위를 둘러싸는 공기만 유독 다른  같았다. 아마 평일 오후 3시에 수원역에서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보면 사연 있는 사람들처럼 생각했을 거다. , 사연이 있는 사람들 맞지 . 아마 현실을 잠시 부정하고 싶었나 보다.


 기차 시간이 다 되고 엄마와 인사를 했다. 한참을 멀어져 가는 기차를 지켜보다 그 자리를 떠났다.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피곤하다. 결국은 지하철에서 졸다가 내릴 역을 지나쳐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로 다시 갈아타야 했다. 그래도 내려야 할 역에서 2군데만 지나쳐서 다행이다. 집으로 도착하니 집에서 배관 작업을 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행거에 걸려 있던 옷 순서가 많이 바뀌었지만 다시 정리하자니 귀찮아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쌓여있는 집안일을 보니 나의 일상으로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입맛이 없다고 하더니 결국 집에 가자마자 먹은 걸 다 게워냈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오니 기분 탓인지 너무 야위었고 몸에 살이 없어 보였다며 속상해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5일 만에 그렇게 될 순 없다며 딱 잘라 말했다. 도대체 어떻길래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동생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며칠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엄마와 같이 있다가 혼자 남겨지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우선 이 상황을 정리했다. 잊어버리면 안 되니깐 그날의 전화 내역부터 문자를 찾아내서 기록을 했다. 그리고 일기를 썼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동생이 잠들어 있던 순간을 남기는 것. 동생은 기억하지 못할 그 순간들을 기록해 놓는 것이다. 최대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서 작성했다.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응원하고 있었는지 나중에 알려 줄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간 이 글을 같이 읽고 있겠지. 내가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3일 후면 동생을 만나러 간다. 혼자 있다고 무서워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누나가 갈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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