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의 일기 37 - 착한 사람
2023년 3월 10일 금요일
잠이 오지 않아서 영화를 보며 밤을 지새우고 오전 8시가 돼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3시쯤이 되었을 때 잠에서 깼다. 일어나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영상 편집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유튜브로 영상을 보면서 눈으로 익힌 다음 어플을 켰다. 분명히 눈으로 볼 땐 쉬웠는데 막상 따라 하려니 생각보다 쉽지 않다. 편집을 하다 보니 번거로운 작업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일일이 모자이크 하는 건 고역이었다. 편집을 하는 게 아직 서툴다 보니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편집에 열중하다 보니 밥 먹는 것도 제쳐두고 어떻게 영상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불편한 자세로 있다 보니 손가락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기나긴 사투를 벌이는 중 엄마에게 기차를 탔다는 문자가 왔다. 결국 오늘은 영상편집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힘겨웠던 모자이크 처리는 다 끝냈다.
오랫동안 아이패드만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눈앞이 침침했지만 한번 시작한 편집을 멈출 수 없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작업을 하다가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8시가 넘었다. 엄마는 서울역에 8시 52분 도착이라고 했으니 지금 나가도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일단 하고 있던 것을 중단하고 마중을 나갔다. 엄마를 매주 마중 나가는 일도 한 달이 넘어간다. 솔직히 한 달 정도면 이제 집까지 혼자 찾아올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암만 생각해도 내가 요즘 화가 많아진 듯하다. 나는 아무래도 효녀랑은 거리가 멀지 싶다. 그래도 어쩌겠나 싶어서 마중은 나갔지만 엄마를 보자마자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모든 게 불편하다. 가족들도 너무 자주 만나다 보면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특히나 동생의 사고로 해결해야 될 일이 자꾸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화가 늘어났다. 혼자 있을 땐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예민해진다. 혼자만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특히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 보면 더 그렇다. 5평 안에 화장실, 부엌, 방 그리고 침대까지 있으면 겨우 두 명만 앉을 수 있는 여유공간이 생긴다. 이동할 때마다 서로의 신체가 맞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공간이 협소했다. 살다 보면 누군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짜증이 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인 것 같다. 이럴 때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죄스럽다. 엄마도 매주 서울에 올라와야 하는 게 고될 텐데 그럴수록 딸인 내가 다정하게 대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어렵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내 생각과는 다르게 신경질을 부리게 된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라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때면 죄책감도 함께 동반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그런 나 자신에게 제일 화가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에게 누군가는 착하다는 말을 한다. 아무래도 동생의 간병을 자발적으로 한다니깐 착하다고 말을 하지만 나는 내가 착한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순수하게 좋은 마음만 있었던 건 아니기에 더 그랬다. 솔직히 내가 간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엄마가 일을 그만두도록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간병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연령이나 체력, 경제력을 여러모로 따져 봤을 때 집안에서 가장 젊지만 경제력은 월등히 부족한 내가 제일 적임자였다. 그리고 가족들 모두 지방에 있고 나는 서울에 있으니 다른 가족들보다 병원에 가기도 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간병을 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또한 가족이 옆에 함께 하면서 자극을 주는 것이 의식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니 더 이상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그전에는 간병인 비용과 병원비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그 말을 듣고 간병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하는 건지 반항심이 생겼다. 그런데 의식을 빨리 차리기 위해선 가족이 옆에 있는 게 가장 좋다는 말을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특별한 이유가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자주 익숙한 얼굴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주며 뇌에 자극을 주는 것. 다른 사람들이 대신할 수 없고 오로지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간병을 직접 하면 아무래도 익숙한 대상이 24시간 동안 붙어 있으니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체력과 시간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이 하루빨리 의식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동생이 의식을 차려야 가족들도 나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으니 간병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결코 순수하지도 불순하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나는 세상을 볼 때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 안에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고 여긴다. 한 없이 착한 행동만 하는 사람도 한 없이 나쁜 행동만 하는 사람도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같은 행동이라도 개인적인 잣대를 가지고 다르게 평가하게 된다. 아니면 그 사람의 일부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숨겨진 속내는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보다는 나처럼 상황에 따라 착함과 악함의 경계를 드나드는 애매모호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엄마한테 짜증을 내는 것을 보면 마냥 착하다고 할 수도 없고 동생을 간병한다는 것을 보면 마냥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마냥 착하지도 마냥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다. 단지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모두에게 최선이 될 만한 선택을 하려는 것뿐이다. 그 최선의 판단이 간병이었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고 그냥 나다.
영상편집
마중
감자탕과 만둣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