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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r 19.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19 - 세상에서 버티는 자

2023년 2월 20일 월요일


 시험을 3일 앞두고도 공부가 손에 안 잡힌다. 평상시에는 어떤 시험이든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치러 가지 않았을 텐데 이번엔 조금 다르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나 할까. 어쩌면 준비가 되지 않은 시험도 그중 하나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하고 있으면 적어도 생각을 덜 할 수 있으니깐 밀아다. 그런데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펴놓고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번에도 아까운 원서비만 날릴 것 같은 예감이다.


 문득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일 초하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하루를 검색해 보니 이 날 기도발이 세다는 풍문이 들린다. 지금 내가 신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내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찰을 검색해 봤다. 옥상에 가서 정수를 떠다 놓고 달한테 소원이라도 빌어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왕이면 기도발이 더 좋은 곳에서 하면 내 정성이 하늘에 더 닿지 않을까 싶어 가까운 절을 찾았다. 고민을 하는 사이에 벌써 오후 6시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한다. 어차피 책상 앞에 앉아있어 봤자 공부도 안 되는 거 동생을 기도라도 드리자 싶었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만 이동하면 되지만 걸어서 20분이 걸린다. 지도를 보니 낮은 산을 조금 타야 하는 것 같다. 보통 절에 가면 양초를 피우는데 나한테 그런 건 없다. 그 대신 집에 있는 아로마 캔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같은 양초인데 상관없지 않을까. 그냥 향만 조금 더 나는 양초라는 생각에 주머니에 쑤셔 넣고 해는 지고 있는데 겁도 없이 무작정 나갔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사찰이 사당에 있는 관음사였다. 뭐 산이라고 해봤자 산책로 정도겠지만 그래도 목이 마를까 봐 포카리스웨트를 하나 사들고 갔다. 너무 뜬금없는 외출이라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하지만 가끔 가다 갑자기 어디론가 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는가. 오늘이 나에겐 바로 그날이었다. 아우터 주머니에는 양초와 라이터를 넣은 채로 말이다. 버스를 탄 지 5분 정도 돼서 도착지에 내렸다. 이제 걸어갈 일만 남았다.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는데 젠장 산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 무슨 이유인지 담장이 붕괴될 위험이 있다며 돌아가라고 한다. 이게 가장 지름길이었던 것 같은데 난감했다. 초행길이라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무작정 바로 옆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 쪽으로 들어가서 올라갔다. 역시 길은 여러 갈래였다. 관음사로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졌고 나는 남들이 하산하는 시간에 산책로를 걸었다.


 어두운 밤하늘과 나무들이 우거진 숲, 쌀쌀한 공기까지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렇다고 내가 그냥 돌아갈 줄 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나는 지금 이 어둠 따위 두렵지 않다. 지금 나의 두려움은 따로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산으로 올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를 온 사람이다. 어둠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얼른 가서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걸었더니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심지어 내 뒤에도 관음사에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입구에 도착하니 내가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무엇보다 절박했었다. 바깥을 지키고 있는 불상으로 다가가 음료수와 양초를 올렸다. 절을 하진 않았고 앉아서 두 손 모아 기도만 드렸다. 정석은 아니지만 마음만큼은  간절했다. 분명히 내 진심이 전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앞으로 동생이랑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테니 제발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의식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기도를 드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이 날 따라 달이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달은 보이지 않았다. 산속에서도 도시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날 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야경으로 빛나는 세상의 모습이었다. 반짝이는 세상은 멀리서 보니 화려하면서 고요했다. 나 혼자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기분이었다. 이 산을 내려가면 다시 저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내려가면 나를 맞이할 세상은 화려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이 오늘따라 더 빛나 보여서 더 외롭고 쓸쓸한 밤이었지만 악착같이 버텨낸다는 마음가짐으로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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