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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벙돈벙 Mar 20. 202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보호자의 일기 20 - 감정의 가뭄

2023년 2월 21일 화요일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동생의 대변에서 피가 발견되어 위내시경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출혈부위는  상부소화기관이 의심된다고 하였다. 피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고 아주 소량의 출혈이라고 했지만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정확한 건 내시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에서 동생을 만나고 미션도 받았다. 물티슈와 기저귀 그리고 보습크림이 필요하다고 해서 사러 가야 한다. 지하 1층 편의점으로 가면 웬만한 건 전부 있다. 면회가 끝나고는 교수님께 설명을 해주셨다. 더 자세한 설명은 동의서를 작성하면서 들으면 된다고 했다. 일단 교수님과의 면담이 끝나고 간호사를 만났다. 중환자실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간다고 하니 갔다 오면 바로 동의서를 작성할 수 있게 준비해놓고 있겠다고 하였다. 그 말만 믿고 마음 편히 편의점을 들려서 물품을 사고 올라갔다.


 물품을 전해주기 위해서 중환자실 호출벨을 눌렀다. 조금 있다가 간호사가 나왔다. 해당 구역을 이야기하며 동생 이름을 말하면 거기로 갖다 준다. 동의서는 언제 작성하냐고 물어보니 물어보고 알려주겠다고 해놓고 감감무소식이다. 물론 평소 같으면 기다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3시에 줌 화상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으로 가야 한다. 구직촉진수당을 받으려면 성실하게 취업특강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하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이 바쁘겠거니 생각하며 20분을 기다렸다. 교수님이 조금 이따 도착할 것 같아서 잠시만 대기를 하란다. 그래서 마음은 급했지만 대기를 했다. 시간은 흘러서 벌써 1시가 넘어갔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호출벨을 마지막으로 눌렀다. 짜증이 밀려왔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당혹스러웠다. 여기서 집까지 가려면 잔혹하게도 버스 배차 시간이 길다. 그렇다고 지하철을 타고 가자니 2시간 가까이 걸린다. 잘못하면 강의를 놓칠 수도 있어서 그냥 병원에서 3시간 동안 강의를 듣고 갈까도 생각해 봤다. 더는 못 기다린다는 나의 말에 간호사가 교수님과 면담을 진행했냐며 나에게 물었다. 면회 끝나자마자 교수님을 뵈었고 바로 동의서를 작성하면 된다고 설명까지 들었다고 하니 그제야 나왔다. 상황을 제대로 전달을 안 했던 건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예의상 괜찮다는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냥 설명해 주는 것만 경청하며 대답을 했다. ‘S상 결장경 검사 및 치료내시경 및 진정 동의서‘, ‘상부 소화관 치료 내시경 검사 및 진정 동의서’ 동생 덕에 살면서 들을 일 없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된다. 설명을 들으면서 동의서를 작성하고 있었지만 40분이 넘는 시간을 날리는 바람에 머릿속으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정확한 내시경의 명칭을 외울 수가 없어서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가능하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급하지만 할 건 다 한다. 그러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왔다.


  내가 탈 정류장에서는 웃기게도 버스 도착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당황스럽게도 1, 2분 후에 오는 버스 시간만 표시되기에 까딱하면 놓치기 일쑤였다. 배차 간격 시간도 애매하게 18~50분이란다.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지하철로만 가면 1시간 48분이 걸리고 버스를 타면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문제는 버스가 언제 오느냐였는데 몇 분 전에 종점에 도착을 했으니 최대 30분 정도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버스를 선택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버스가 너무 늦게 도착하면 그때는 지하철이라도 타고 갈 생각이었다. 아니면 어느 카페라도 들어가서 3시간 동안 강의를 들어야 한다. 여기서 만약 3시 안까지 집에 도착하지 못하면 이건 진짜 누구 탓을 해야 할까. 괜히 애꿎은 세상을 원망했다. 그 정도로 하늘이 나를 버리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1분 1초가 지날수록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 초조하게 전광판을 바라보니 내가 탈 버스가 곧 도착한단다. 한 30분 정도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탈 수 있었다. 20분 정도 기다린 것 같다. 빨리 와서 다행이다. 버스를 타니 그제야 안도감이 느껴졌다. 오늘은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도착예정 시간보다도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집 앞에 새로 생긴 식당에서 점심을 포장할 시간도 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집으로 도착하여 아무 일도 없었듯이 평온하게 강의를 들었다.  


 걱정, 짜증, 분노, 불안, 초조, 안도라는 감정들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어난 것들이라니.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다니 최근 들어서 더 예민해진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감정을 쏟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곤하다.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미안하다는 간호사의 말에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내가 그 정도로 경우가 없는 사람이었나 싶었다. 예전에는 상대방이 실수를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게 사과를 상대방이 더 무안해질까 봐 무조건 괜찮다고 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상황이 오면 화를 내지는 않지만 그전처럼 괜찮다며 웃어주지도 않는다. 그냥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감정을 쏟아내야 한다는 것도 귀찮다. 아무래도 나의 감정이 고갈된 기분이다. 나 하나만으로도 벅차서 남의 감정까지 배려하기가 힘들어졌다. 사람이 너무 메말라가고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그렇다고 당장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안일하게 손 놓고 있는 중이다. 예전과는 너무도 다른 나의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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