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듯 말 듯한 어딘가의 끝에서

말라죽은 지렁이를 기억함

by 루씰

오이를 따러 마당으로 나갔다.

애오이 따려면 대문 밖 담장 너머로 가야 한다.

덩굴이 담장을 훌쩍 넘어 안쪽에는 늙은 오이들만 주렁주렁 달렸다.


며칠 비 오고 난 뒤, 햇살은 맑고 강하다.

담장 아래 좁은 길에 덩그러니 누운 지렁이들이 보였다.

꼬부라진 몸, 젖은 채 말라붙은 흔적.

굳어버린 생명들이 널브러져 있다.

비가 오면 땅속에 물이 차서 숨쉬기 어려워져

공기 있는 지상으로 나왔는데,

쨍한 햇볕에 젖은 몸이 순식간에 말라버렸을 거다.

그곳은 분명 흙이고,

숨 쉴 수 있는 땅이었는데도

그들은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너무 느렸던 걸까.

지치고 미끄러지다 결국 힘이 다했던 걸까.


애오이 따 들고 마당을 살폈다.

사실, 어제 햇볕 아래 느릿느릿 기어가는 커다란 지렁이를 보았다.

집어서 부드러운 밭고랑 풀숲 그늘에 데려다 주려는데

때마침 창 너머로 핸드폰 소리가 들렸다.

끊어질까, 급히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받았다.

큰딸이었다. 그리고 지렁이를 잊었다.

끊어지면 다시 걸면 되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아마 그 녀석도 마당 한구석에서 죽었을 거다.

조금만 더 마음 썼더라면 분명 살아남았을 텐데.


돌아갈 곳 있어도, 걸어갈 길 보여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 막막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서정주의 시처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늙은 누님이 되었지만

내 삶에 물이 차올라 숨쉬기 어려웠던 날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 여름,

햇볕은 뜨겁고, 세상은 너무 빠르다.

나도, 우리도 그렇게 닿을 듯 말 듯한 어딘가의 끝에서

조용히 멈춰 설 때가 있겠지.


말라 죽은 지렁이.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빗물 하나를 두고, 고민하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