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마음을 덮으며
여행에서 돌아온 이튿날,
새벽인지 아침인지 분간조차 안 되는 시간, 창밖에서 들려오는 예초기 소리에 잠이 깼다.
귀를 기울이자 규칙적인 엔진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몸을 일으켜 창을 열었다. 삐걱, 작은 소리를 내며 창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공기에는 풋풋한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밖은 이미 환히 밝았고, 이웃집 태진 씨가 우리 마당에서 예초기를 돌리고 있었다. 남편은 분명 새벽같이 일어나 이웃집에 가서 예초기를 빌리려 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태진 씨가 “에이, 내가 깎지 뭐.” 하며 특유의 해사한 웃음을 짓고 기꺼이 우리 집으로 왔으리라.
태진 씨가 풀을 깎아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이제는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먼저 드는 풍경이었다.
예초기 소리가 지나갈 때마다 마당에서는 새 풀 향이 피어올랐고, 그 향은 내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내는 듯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손님들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으니, 오늘만큼은 늦장을 부려도 될 텐데 남편은 날이 밝으면 도무지 누워 있지를 못한다. 몸이 무겁고 피곤해도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개운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아픔을 잊기 위한 방편일 테지만, 나는 그 부지런함이 고맙고 또 안쓰럽다.
여행의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남편은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구멍 난 배추밭에 심을 배추 모종을 얻어오고, “이제 씨앗 뿌리기엔 늦었다”면서 무 모종을 사 오고, 며칠간 미뤄두었던 일을 하나씩 해치웠다. 마당을 오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하루를 깨우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월요일은 남편이 읍내 글로리아 합창단에 가는 날이다. 교회 찬양대와 동네 아버지 합창단만으로도 벅찰 텐데, 9월부터는 새로운 배움터까지 다니느라 그의 하루는 더 바빠졌다.
늦은 오후, 남편은 합창단에 가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는 푹 쉬겠다며 종일 뒹굴대는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심심하면 배추 모종 좀 심어.”
“안 심심해.”
말은 퉁명스레 했지만, 나는 결국 텃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심지 않으면 남편이 내일 새벽 또 허리를 굽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마당과 텃밭을 부드럽게 감쌌다. 노란 햇살이 땅을 따스하게 덮고, 공기에는 낮 동안 데워진 흙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침에 태진 씨가 예초기를 돌린 마당에서는 풀 향이 아직도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풀과 흙, 햇살이 함께 빚어낸 향기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배추 모종을 하나씩 조심스레 옮겨 심었다. 손바닥에 닿는 흙은 서늘했고, 그 감촉이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전해졌다. 어린 잎사귀들이 바람에 가볍게 떨렸다. 그 연약함이 왠지 내 마음을 조용히 진정시켰다.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지만, 그것마저 기분 좋게 식혀 주었다.
무 모종까지 심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해는 생각보다 빨리 기울고, 담장 너머로 어둠이 슬며시 내려앉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서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붉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이며 하루의 끝을 물들였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일이니 마저 해치우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흙을 적실 때마다 마치 작은 축복을 주는 듯했다. 내가 조금 더 수고하면 내일 아침 남편이 웃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모든 빈 구멍이 모종으로 채워지고 나자, 텅 비었던 텃밭이 다시 초록빛으로 가득 찼다. 어린 잎사귀들이 저마다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바람도 잠시 멈춰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텃밭 위로 저녁의 마지막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그 빛이 잎사귀 끝에 맺혀 반짝였다. 그 모습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내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지고 단정해졌다. 여행 전 설렘으로 가득했던 순간이 떠올랐고, 그 설렘이 이제는 깊고 고요한 평안으로 변해 있음을 느꼈다.
여행이 새로운 풍경과 기억을 선물했다면, 이 평범한 일상은 그 추억을 품고 살아갈 힘을 준다.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는 시간은 내가 이 땅에 단단히 발붙이고 있음을 일깨운다.
풀과 싸우고, 새로운 모종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또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무와 배추의 빈 구멍을 메우듯, 시간은 여행의 빈 마음을 채우고, 다시 한 뼘 더 단단해진 나를 남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흙 묻은 손바닥에, 바람에 살랑이는 어린 잎사귀에, 저녁놀로 물드는 오늘에 있었다. 그래, 나는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여기’에서 또 다른 계절, 또 다른 행복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