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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존경받는

by 어니스트 정

아침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사무실 풍경을 바라보는 김현우의 눈에 박 차장의 책상이 비어 있었다. 오늘부터 박 차장은 해외 파견으로 더 이상 이 자리에 없다. 어제저녁, 박 차장의 송별회에서 김현우는 평소보다 조금 많은 말을 했다. 박 차장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차장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지만, 김현우의 마음속에는 더 많은 말들이 맴돌았다. 박 차장은 김현우가 직속상관으로서 정말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업무 추진력과 팀원들을 독려하는 방식, 모든 면에서 본받을 만했다. 특히 파견을 하루 앞둔 어제까지도 후임자가 올해 업무를 잘 처리할 수 있도록 꼼꼼히 인수인계를 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어땠지?’


김현우는 몇 년 전 자신이 파견을 갔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그는 자신의 일만 끝내고 떠났다. 후임자가 어떻게 적응할지,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내 일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박 차장과 자신의 다른 모습에서 김현우는 리더십의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박 차장의 모습에 진심으로 고마웠다. 부하 직원들 사이에서 박 차장의 덕망은 높았고, 그것은 단순한 인기가 아닌 진정한 신뢰였다.

창밖으로 눈 발이 날리고 있었다. 곧 입춘인데 눈이라니. 날씨도 뒤숭숭한 것이 김현우의 마음 같았다. 그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박 차장이 남기고 간 업무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팀원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머릿속은 온통 질문으로 가득했다.

“김 부장, 잠깐 시간 있어?”

점심시간이 막 끝나고 자리에 앉았을 때, 인사과 이 부장이 다가왔다. 함께 승진했고 꽤 친한 사이였다. 김현우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 복지위원회 위원을 맡아줬으면 해. 신임 사장님이 특별히 김 부장을 지목하셨어.”

김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몇 해 전에 이미 사내 위원을 한 적이 있었고, 그때의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끝없는 회의와 결정권 없는 논의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보다는 형식적인 절차를 따르는 것 같았다.

“미안해, 이 부장. 나 몇 년 전에 이미 했잖아. 이번엔 다른 사람이 경험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김현우의 거절에 이 부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예민한 성격의 이 부장은 언짢아하는 눈치였다.

“신임 사장님의 요청이야. 김 부장을 높이 평가하셔서 직접 이름을 언급하신 거라고.”


김현우는 내심 의아했다. 어제 취임식에서 신임 사장이 말했던 ‘직원이 행복해야 고객이 행복하다’는 말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작년까지 사내 위원은 회의 자리에서 투표로 선출했는데, 올해는 사장이 직접 지명한다니. 왠지 직권 남용처럼 느껴졌다.


“신임 사장님이 왜 하필 나를…?”

“글쎄, 아마도 김 부장의 성실함과 중립적인 입장을 높이 샀나 봐.”

이 부장의 말에도 김현우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신임 사장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 어제 임명식에서 느꼈던 감동이 무색하게, 지금 김현우의 마음속에는 의구심만 가득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왜 회사의 절차를 바꾸는 거지?’

“일단 생각해 볼게. 언제까지 답변해야 해?”

김현우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질문했다. 이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달 마지막 금요일까지. 그때 최종 명단을 올려야 해.”

이 부장이 돌아간 후, 김현우는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내 복지위원회. 직원들의 복지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자리였지만, 실질적인 결정권은 거의 없었다. 그저 회사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그런 형식적인 역할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임 사장이 직접 자신을 지목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김현우는 복잡한 마음으로 손을 이마에 올렸다.

그날 저녁, 김현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창밖으로 흐르는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한편으로는 박 차장의 리더십을 배우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위원회 일을 어떻게 피해 갈지 고민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 특히 권위를 가진 상사와의 관계는 김현우에게 늘 어려운 과제였다.

‘사장님의 요청이라 거절하기 어렵겠지만….’


김현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한 번 해봤고, 그때의 경험은 그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형식적인 회의만 반복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임 사장이 진정으로 직원들의 행복을 위해 김현우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하철이 김현우의 집 근처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김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을 나와 아파트 단지로 향하면서, 그는 복지위원회 문제를 더 깊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 로비에서 나오는 따뜻한 불빛 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김현우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민우와 마주쳤다. 열 살 민우는 엄마가 심부름시킨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길이었다.


“아빠!”


민우가 김현우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김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맞이했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

민우는 신나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수학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이야기,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가장 빨리 했다는 이야기. 단순하고 순수한 민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현우는 잠시 회사에서의 고민을 잊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열다섯 살 지은이가 방에서 나와 인사했다. 지은이는 이제 중학교 3학년, 사춘기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다정했다.

“아빠, 오늘 선생님이 내 작문을 칭찬하셨어.”

김현우는 지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우리 지은이. 작문 솜씨가 뛰어나지.”


저녁 식사를 하면서, 김현우는 집에서의 평화로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회사에서의 복잡한 인간관계, 끝없는 업무 스트레스와는 달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식사 후, 아이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김현우와 수진은 거실에 남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들의 일상적인 시간이었다.


“뭔가 고민 있어? 오늘 좀 피곤해 보여.”

수진의 물음에 김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동안 회사 일로 아내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사내 복지위원회 위원을 맡아달라고 해서. 신임 사장님이 직접 나를 지목했대.”

수진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거 좋은 거 아니야? 사장님이 직접 지목했다면 당신을 인정한다는 뜻 아닐까?”

“글쎄, 몇 년 전에 이미 해봤는데,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어. 형식적인 자리였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힘들었거든.”

수진은 김현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잖아. 새 사장님이 정말로 변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그 변화의 일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김현우는 아내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가능성. 자신이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게. 고마워.”


그날 밤, 김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박 차장의 리더십, 복지위원회 문제, 신임 사장에 대한 의구심. 모든 생각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박 차장에게서 배운 것을 떠올렸다. 책임감, 팀원들에 대한 배려, 업무에 대한 열정. 만약 자신이 복지위원회를 맡게 된다면, 박 차장처럼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만약 맡게 된다면, 정말 직원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김현우는 그렇게 결심했다.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가짐은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잠이 들기 직전, 김현우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맴돌았다.


‘신뢰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하지만 한 번 잃으면 회복하기 어려운 것.’

박 차장이 동료들에게 얻은 신뢰, 김현우가 신임 사장에게 느낀 의구심, 그리고 수진이 김현우에게 보여준 믿음. 모든 관계는 신뢰를 기반으로 했다. 그리고 그 신뢰는 때로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김현우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또 다른 도전과 선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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