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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의 회식

by 어니스트 정

겹겹이 쌓인 서류 더미 사이로 벽시계의 초침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김현우 부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마지막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오늘은 2025년 회사 임명 수여식이 있는 날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복도는 분주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김 부장님, 시간 다 됐어요. 대강당으로 가야 해요.”


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젊은 사원의 말에 김현우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11년 차 직장생활, 이런 행사는 이제 익숙했지만 늘 어색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녹아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숲보다 나무를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체를 파악하기보다 세세한 부분에 집중하는 성향이 때로는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대강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김현우는 자신이 이 회사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교육부서의 부장으로, 직원들의 역량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꼼꼼하고 세심한 그의 성격은 업무 처리에 있어서는 장점이었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종종 걸림돌이 되곤 했다.

대강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김현우는 조용히 뒷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회장과 새 신임 사장이 단상에 올랐다.


“오늘 우리 회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신임 사장을 소개합니다. 제 딸, 박지연 사장입니다.”


회장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박지연 사장이 단상으로 올라가 임명장을 받는 순간, 김현우의 가슴에 무언가 뭉클한 감정이 일었다. 아버지와 딸. 자신도 열 살 된 딸 지은이가 있기에, 지금 회장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견함, 뿌듯함, 감격…. 그리고 아마도 걱정까지.’


모든 감정이 뒤섞인 회장의 표정을 보며 김현우는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언젠가 우리 지은이도 저렇게 성장해 어딘가에서 빛날 날이 올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신임 사장의 취임사는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직원이 행복해야 고객이 행복합니다. 저는 이 원칙을 항상 기억하며 회사를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김현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직원의 행복.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는 자신의 직장 생활을 돌아보았다.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아니, 행복을 기대했던 적은 있었나?

식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인사과 이 부장이 김현우에게 다가왔다.


“김 부장, 오늘 저녁에 축하 회식 있어. 꼭 참석해.”


김현우는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자리. 그가 가장 불편해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장급이면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김 부장님도 술 한 잔 하셔야죠! 오늘 축하 자리인데!”

퇴근 후 이어진 회식 자리. 김현우는 이미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술잔을 들이미는 동료 부장의 얼굴에 미소로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건배만 할게요. 오늘 운전해야 해서요.”


김현우에게 술은 악연 그 자체였다. 입사 초기, 두 번의 흑역사는 아직도 생생했다. 신입사원 시절,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 마셨던 양주. 그날 밤의 기억은 없고, 다음날 현장 견학 버스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만 선명했다. 또 한 번은 팀장의 축하 파티에서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못해 결국 결근까지 했던 일. 그 후로 김현우는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아이고, 우리 김 부장 항상 그래.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회장은 술을 좋아했고, 다른 부장들도 자연스럽게 술잔을 기울였다. 김현우는 이 자리가 너무나 불편했다. 회장과 신임 사장에게 잘 보이려 아부하는 듯한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걸까?’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이라고들 했지만, 이런 종류의 ‘업무’에서 김현우는 늘 낙제점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속내를 드러내는 일, 술기운에 편해지는 대화에 김현우는 늘 이방인 같았다. 예전에는 이런 자리에서 완전히 위축되곤 했지만, 이제는 조금 나아졌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김 부장, 회사 생활은 어떠세요? 교육부서가 요즘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들었는데.”

신임 사장 박지연이 갑자기 김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네,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역량 개발이 회사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김현우는 최대한 자신감 있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사장의 관심이 갑작스럽게 부담스러웠다.


“다음 달부터는 돌아가면서 각자 사는 지역에서 회식 어떨까요? 다양한 지역 맛집도 알아가고 좋을 것 같은데요.”


인사과 이 부장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른 부장들이 겉으로는 좋다고 호응했다. 김현우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미친…. 좋으면 너만 하지, 왜 우리까지? 난 싫은데.’


회식 자리는 편안해야 하는데, 김현우에게는 항상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복잡한 사람 관계, 겉도는 대화, 정치적인 말들…. 이런 자리에서 김현우는 늘 입을 다물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럼 다음 달에는 김 부장님 지역에서 한번 해볼까요?”

이 부장의 말에 김현우는 하마터면 물을 뿜을 뻔했다.


“아, 제 지역은 특별한 맛집이 없어서….”


그의 변명은 공허하게 들렸고, 이미 주변에서는 웃으며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김현우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운전한다고 했지만, 한 잔 정도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회식은 마무리되었다. 김현우는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그는 오늘의 일들을 정리했다. 신임 사장의 취임, 그리고 어색했던 회식 자리. 내일부터는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올해는 이 회식들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어쩌면 자신이 회사에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이런 자리에서 빛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면 되는 거야. 모든 걸 다 잘할 필요는 없어.’

택시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김현우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곧 열 살 딸 지은이가 “아빠!” 하고 반갑게 맞아줄 집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힘든 하루였지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김현우는 다짐했다.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될 거야.’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임 사장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 단순한 호의였을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부장이 제안한 지역별 회식,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김현우는 현관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냈다. 집 안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아직 깨어 있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 수진이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늘 회식 있었어? 늦었네.”


김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었다. 수진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도 자신의 직장에서 충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새 사장님 취임식 있었어. 나쁘지 않았어.”


수진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김현우는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오늘의 피로를 씻어내고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직원이 행복해야 고객이 행복하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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