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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숲

프롤로그

by 어니스트 정

김현우는 자신이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 생활 11년 차, 그는 늘 세부 사항에 집중했다. 보고서의 작은 오타, 회의 자료의 불일치, 프로젝트 계획의 미세한 허점. 그는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의 꼼꼼함을 칭찬하면서도, 때로는 “너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라고 농담 삼아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과연 자신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인가? 그것이 진정 약점인가?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김 부장, 이번 프로젝트 보고서 마감이 언제죠?”

옆자리 김 차장의 질문에 김현우는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금요일 오후 5시까지입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는 지난 분기 실적 분석 보고서가 열려 있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들, 수정이 필요한 곳들, 보완해야 할 데이터들.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이 보고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와닿지 않았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아직 떠나지 않은 듯했다. 김현우는 잠시 창가로 다가가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문득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여덟 살 때였을까. 겨울 방학에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산으로 등산을 갔다. 눈 덮인 산길을 오르며, 아버지는 말했다.


“현우야, 저기 봐. 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지? 하나하나의 나무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뒤로 물러서서 숲 전체를 바라봐야 한단다.”

어린 현우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눈 덮인 나무들이 예뻐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나무껍질의 패턴, 가지의 모양, 그리고 그 위에 쌓인 눈의 질감을 관찰했다. 아버지가 숲 전체를 보라고 할 때마다, 그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 나무의 세세한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현우는 부분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요.”


선생님들이 학부모 상담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칭찬이면서도 약간의 우려가 담긴 말이었다. 너무 세부에 집중하다 보면 전체 그림을 놓칠 수 있다는.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며, 김현우는 자신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정확히 제자리에 놓여있었다. 펜, 수첩, 달력, 심지어 포스트잇까지. 그는 항상 이렇게 자신만의 질서를 유지했다. 그것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요즘 그 안정감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감각이 그를 따라다녔다. 경력은 쌓여가는데, 왜 성취감은 줄어드는 걸까?

김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흔여섯. 이제 더 이상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얼마나 더 많은 보고서와 회의, 프로젝트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수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늘 일찍 들어올 수 있어? 지은이가 학교 프로젝트 도움이 필요하대.]

김현우는 미소 지었다. 가족.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들. 하지만 가끔은 그들에게도 자신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업무에서처럼,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일들에만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노력해 볼게. 7시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아.]


메시지를 보내고, 김현우는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생각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이 질문들은 그동안 그가 피해왔던 것들이었다. 세부 사항에 집중하다 보면, 이런 큰 질문들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질문들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김현우는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눈 덮인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건물들, 그리고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현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자신처럼 숲을 보지 못하고 있을까? 그리고 몇 명이나 그것을 깨닫고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창문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나무를 보는 사람.’

창문의 김현우는 그 글자를,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무언가 결심이 서렸다. 어쩌면 이제 변화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숲을 보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울 시간.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평생 나무만 보아온 사람이 갑자기 숲을 볼 수 있을까? 김현우는 자신의 모습을 창문에 비추어 바라보았다. 그 반사된 이미지 속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의문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불안 속에서도 어떤 기대감과 설렘이 느껴졌다. 마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 같은.

김현우는 천천히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의 일을 마무리하고, 딸의 프로젝트를 도와주러 가야 했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 하루가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제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창밖의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고, 김현우의 마음속에도 무언가 새로운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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