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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에서 지하까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나

by 어니스트 정

"띵동—"


엘리베이터가 내 코앞에서 문을 닫는다. 한쪽 신발은 질질 끌고 뛰었건만, 1초 차이로 놓쳤다. 또 지각이다.


"어, 잠깐만요!"


천만다행. 21층 아저씨가 열림 버튼을 눌러주신다.


"고맙습니다."

"뭘요. 그런데 부인이 집 근처로 옮기셔서 좋겠네요?"


아, 맞다. 예전에 아저씨와 아내 이야기를 했었다. 2년 동안 편도 60km씩 운전해서 다닌다고. 장롱면허 꺼내서 떨며 시작한 운전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글쎄요...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말하고 보니 정말 그렇다.


"여전히 아침은 제가 해요. 오늘도 아내는 지각 써서 집에 있는데, 아침밥은 제가 했거든요."


21층. 아저씨 얼굴에 '아, 그래?' 하는 표정이 스친다.


"여자들이 다 그래요. 한 번 해주면 당연한 줄 알아요."


"맞아요. 우리 아내도 제주도 출장 간다고 터미널까지 새벽에 데려다줬더니, 오늘은 집 청소까지 시키더라고요."


우리는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2년 동안 아침밥 해준 내 이야기, 아저씨의 청소 이야기. 남편들만 바보 같다는 이야기.


지하 1층 주차장.


"그래도 남자는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야죠 뭐."


아저씨가 웃으며 말한다. 나도 따라 웃는다. 속 시원하다. 이렇게 시원하게 털어놓으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각자 차로 향한다.


시동을 걸며 기분이 정말 좋다. 역시 남자끼리 이야기하니까 통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든다.


지난 주일, 목사님이 그러셨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나도 그러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방금 나는 뭘 한 거지? 내가 한 말이 자꾸 맴돈다.


아내 얼굴이 떠오른다. 요즘 너무 지쳐 보였다. 올해만 벌써 두 번이나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어제 또 터져서 오늘 병원에 간다고 지각을 쓴다고 했다. 직장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아침밥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내가 없을 땐 아이들 아침밥 해주고, 퇴근 후 저녁 차려주고, 숙제 봐주고, 재우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2년 동안 왕복 120km씩 떨며 운전한 아내를 이해한다면서, 21층 아저씨와 함께 아내를 평가했다. 그것도 '여자들은 다 그래'라는 한마디로.


14층에서 지하까지, 고작 20초 남짓.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남편에서 판사가 되었다가, 다시 한 명의 인간이 되었다.


21층 아저씨가 준 선물은 공감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감사하겠다고 다짐만 하고 살았구나. 이제는 정말 감사하며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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