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아내대로 딸에게 화를 낸다. "아침에 늑장 부리더니 결국 늦었잖아!"
주일 아침, 교회 가는 차 안에는 서로의 불만만 가득하다.
이게 신앙인 가정의 모습인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배드리러 가는 길인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예배당에 들어서니 평소와 달리 유난히 시끄럽다.
깡마른 60대 할머니 한 분이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계신다. 안내하시는 권사님들이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시죠"라고 정중히 말씀드리지만, 할머니는 안하무인처럼 맥락 없는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신다.
안내 위원들이 당황해한다. 교회에서 못 보던 분이다. 옷차림도 일반적이지 않아 보인다. 나중에 알았지만 노숙인이라고 했다.
다행히 예배 시간에는 조용히 예배를 드리셨다. 그런데 또 식당에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셨다. 결국 교회는 어쩔 수 없이 경찰을 불러야 했고, 할머니는 경찰과 함께 교회를 떠나셨다.
주일 아침에 일어난 두 가지 일을 생각한다.
교회 오는 길의 가족 간 불만. 예배당과 식당에서 벌어진 사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비기독교인들이 봤을 때 "기독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웃을 품으라고 하셨지만, 가족 간에도, 이웃 간에도 그 '사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숙인 할머니 사건'을 보면서 내 마음속에 두 갈래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나는: "성경에서 힘없고 나약한 자를 잘 돌보라고 하셨잖아."
또 하나는: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꾸짖으셨잖아."
그럼 이번 상황에는 어떤 말씀을 적용해야 할까?
삶의 문제를 만날 때 난처할 때가 많다.
첫째는 성경의 논리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할 때이고, 둘째는 어떤 성경 말씀을 적용해야 할지 모를 때다.
성경의 내용 중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다른 내용을 적용할 수 있어서, 어쩌면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럴 때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로 해결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답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오늘 주일 아침의 이 모든 상황들을 어떻게 보셨을까? 우리 가족의 모습을, 할머니를, 그리고 당황한 교회 성도들을...
궁금하다.
완벽한 신앙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신앙인의 한 모습일까?
불완전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일이 질문의 연속이다. 정답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질문하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