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묵상은 레위기 1장이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13). 번제단에서 타오르는 제물의 냄새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묵상집 적용란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나는 향기로운 산제사를 온전히 드리고 있습니까?"
산제사.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살아있는 제사, 일상의 예배, 지속적이고 전인격적인 헌신.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직장에서 마주하는 한 동료가 있다. 몇 년 전 오해로 시작된 서운함이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나보다 한 참 어린 동료가 지금은 같은 부장급이 되었다. 매일 같은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데, 행동 하나하나가 거만해 보인다.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회의에서는 말을 딱딱 끊으며 잘난 척하는 것 같다.
"산제사를 드리라"라고 하시는데, 이 마음으로 어떻게?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더 화가 난다. 나이도 많은 내가 왜 이렇게 속 좁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싶어 자책도 든다.
산제사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것이다. 억지로 "사랑해야지, 용서해야지" 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짜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신뢰가 깨진 상처, 인정받고 싶은 마음, 불편함과 화남... 이런 것들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자아가 살아있어서?" 잘못된 것일까?
레위기의 "향기로운 냄새"는 단순히 좋은 냄새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사장의 진정성, 순종하는 마음, 전적인 헌신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표현이다. 완벽한 제물이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마음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산제사는 "완벽한 나"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나, 하지만 변화되기 원하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닐까?
감정을 인정하되, 그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님께 정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하나님, 저 동료가 너무 싫어요.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지도 않아요. 제 마음을 바꿔주세요."
그리고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내일부터 "주님, 도와주세요" 기도하고 먼저 인사해 보기로. 억지로가 아니라 주님께 의지하면서.
어쩌면 이런 상황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훈련장일지도 모른다. 힘든 사람과의 관계야말로 우리를 더 예수님 닮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니까.
향기로운 산제사는 완벽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부족하지만 주님께 의지하면서, 작은 순종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의 솔직한 고백과 내일의 작은 시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향기로운 냄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