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빠, 바다, 노래

기억하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by 생각책가방



거실 방에 우두커니 앉은 채로 현관을 바라본다.

저 문을 열고 아빠가 곧 들어올 것만 같다.


긴 여행을 마친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빠!"


놀란 나는 아빠를 향해 뛰어간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아빠는 늘 그랬다는 듯 안방으로 들어간다.

아빠를 따라간 나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본다.

아빠가 짐을 풀며 이야기해 준다.


흐릿하면서도 선명한 상상의 세계.



무뚝뚝한 딸이었던 나는,

퇴근 후 집에 온 아빠에게 "다녀오셨어요." 외에 다른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시 저 현관문을 열고 아빠가 들어오는 날이 온다면,

아니 저 현관문을 열고 아빠가 들어왔던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빠를 따라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 장면을 그리다 보니 아빠와 여행을 갔던 2022년 기억이 떠오른다.






사춘기 이후로 엄마, 아빠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던 나는,

아빠의 건강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2022년 신우요관암 수술을 받은 지 세 달 후쯤 되는 6월이었다.


아빠에게 여행을 갈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아빠는 바다를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러 가고 싶다고 하였다.


여행 날짜를 정하고 숙소를 예약하였다.


여행지에서 아빠에게 통증 등 돌발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1박 2일만 다녀오기로 했다.

짧은 일정인데도 약과 필요 물품을 챙기다 보니 짐이 늘어났다.


아빠는 여행 며칠 전부터 준비 목록을 작성하며 가져가야 할 것을 챙겼다.

특히 블루투스 마이크를 소중히 챙겼다.



여행 당일.

기차를 타고 강릉으로 갔다.

강릉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 후 짐을 풀고, 좀 쉬다가 이동했다.


바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은 후 모래사장을 걸었다.

비가 오고 비수기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몇 분 더 걷다 보니 아무도 없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주변 바위에 짐을 놓고, 아빠는 블루투스 마이크를 꺼냈다.

우리 쪽에만 들리도록 볼륨을 작게 줄인 후 아빠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찾았다.


모자를 쓰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우리에게 신호를 주었다.


비가 그쳐서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파도 소리에 묻혀 반주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빠는 가사에 따라 아빠가 만든 동작을 하며 트로트를 불렀다.


아빠의 바람대로 바다가 배경이 되어주었다.

아빠만의 뮤직비디오였다.


엄마와 나는 그 모습을 핸드폰에 담았다.

그렇지만 영상을 찍는 데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나는 계속 주변을 살폈다.

행여 누군가가 볼까 봐 걱정되었다. 시선을 받는 것이 엄마와 나에게는 곤혹이었기 때문이다.


이왕 온 김에 많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아빠에게 빨리 마치라고 재촉했다.

결국 아빠는 두 곡을 부르고 부랴부랴 노래를 끝냈다.


떠나려고 자리를 정리할 때까지도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괜한 염려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던 아빠의 모습이 핸드폰 속에 남아있다.


영상 속 아빠는 아프지 않은 듯이 보인다.

가사에 맞춰 손을 움직이는 동작에서 쑥스러움과 긴장이 느껴진다.

아빠는 바다에서 찍었던 영상을 숙소에서 여러 번 보았다.


영상 속 아빠를 바라보니 그날, 그때가 더 또렷이 떠오른다.


'빨리 끝내라고 재촉하지 말걸. 아빠 노래에 호응을 크게 해 줄걸. 아빠 소원이었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며 주위만 두리번거렸을까.’



후회가 기억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빠의 첫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