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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Feb 19. 2019

이 단어, 알아야 해?

영어로 '생각'하기까지 20년

영어는 한국어보다 단어 수도 많고 한 문단에서 같은 단어나 표현을 반복해서 쓰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전을 찾아도 자꾸 비슷한 의미의 단어가 나와서 영어 입문자들을 좌절스럽게 하기 쉽다. 그래서, '그런 단어' 꼭 알아야 하냐, 외워야 하냐, 자주 질문을 받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일반명사라면 모를까 조금씩 다른 단어 중에 다른 어느 하나는 몰라도 할 수가 없는 게 문제다. 색의 정도 차원에서 미묘한 차이의 아름다운 색 이름들은 차치하고 어감상의 파르라니는 분명 파랑과 다르니까. 자기 나라 말 잘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잘 배운다는 느낌이다. 누가 너 미국 사니 영어 잘하냐고 물으면 나는 너는 한국 살아서 한국말 잘하냐고 묻기도 한다.

너 이제 20년이나 되었으니 미쿸살면 지나가는 미쿸 사람 대화나 팝송 가사가 다 들리냐는 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나도 처음에 5년 만에 한국 방문해서는 식당이나 버스에서 남들 얘기 다 엿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화는 본래 맥락을 모르면 잘 안 들린다. 그리고, 본래도 그렇지만 요즘은 한국 노래 가사도 통 안 들린다. 하지만, 한 마디로 답하라고 그러면, 답은 '정말 듣고 싶으면'이다. 지나가다 들을 수도 있지만, 잘 안 들리는 말은 한국어 하고 똑같이 집중해서 반복해서 들으면 들을 수 있고, 그리고도 잘 못 알아듣는 수도 있다 물론. 꼭 한국 노래처럼.

하지만 역시, 나 그림 그린다 그러면 나 그려 봐라, 개그맨한테 나 웃겨봐라 하는 것처럼 의미 없고 무례한 질문이니 누구에게든 부디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언어란 게 그렇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영어 점수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영어를 '잘했다'라고 말 하기에는 실제로 영어를 ‘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정말 특이한 케이스인 게, 나는 외려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보다 단어도 부족하고 문법도 그놈의 '법칙'이라는 걸 외우기 싫어서 잘 몰랐다.

그런데 그냥 영어가 언어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거다. 아직 한국에는 흑백으로 밖에 방송이 안 나오던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디서 선물로 받아오신 조그만 소니 컬러 티브이가 있었는데, 당시 미국용 방송 AFKN에서 일요일 아침이면 만화 보여주는 걸 컬러로 몇 시간씩 볼 수 있었다. 물론 톰과 제리는 말이 필요 없지만, 세서미 스트리트와 이런저런 쇼도 볼 수 있었다. 어려서 잠시 부모님이 호주 이민을 생각하셔서 집에 브리테니커 영어회화 테이프가 있기도 했고, 블론디나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은 이런저런 영문책자들도 돌아다녔고, 그래서 다른 나라 말로 이것들이 뭐라고 하는지 더욱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때는 요즘과 달라 초등학교에서 6학년 말쯤에 중학교 영어 선생님을 모셔다가 영어를 알파벳 정도를 가르친 정도가 상당히 앞서간 거였고, 그렇게 중학교 들어가니 담임은 도덕 선생님이었는데 무조건 영어는 외워야 한다는 주의였다. 방과 후에 교실 밖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아우성인데도 이 선생님은 강력한 전라도 사투리로 부르는 뽀이! 걸! 단어 시험부터, I am Tom, I am a student로 시작하는 교과서 전부를 다 외우는 시험을 보곤 했다.

그게 비결이라는 둥, 시작이었다는 둥, 할 수도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싫었을 수도 있는데도 나는 그게 좋았던 것 뿐이다. 암호를 푸는 열쇠 같기도 동시에 암호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기도 했던 것 같다. 외국어를 하는 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달까. 본래 한글도, 언니 말고도 내 밑으로 동생이 둘이라서 바쁜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못 기다리겠어서 3살 때 혼자 깨쳤던 나였으니 결국 다른나라 말도 그냥 책을 읽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던 걸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좋은 학생은 아니어서, 이 날까지 '고의적인 암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모든 문장을 순순히 외우고 있었던 것도 자주 사용하려고 하고, 실제로 되는데로 기회만 닿으면 아무데나 써먹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계속 틈만 나면 AFKN의 Guiding Light, General Hospital등 Soap Opera의 키스씬를 열심히 봤고, 공부 안 하고 팝송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를 올라 갔는데 내가 간 학교에서는 언니가 쓴 것과 다른 문법책을 사라고 그랬지만 나는 엄마께 말하기 미안해서 그냥 언니에게 물려받은 책으로 같은 문제를 풀고 또 풀었다. 그러면서 문장은 외워졌고 그걸로 영어가 그냥 잘 '되었다'. 문법이고 뭐고 그냥, '이런' 단어 다음에는 '이런' 단어가 나온다는 시스템이 내 머릿속에 그렇게 구축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별로 관심 없는 수학을 제쳐놓고 좋아하던 국어와 영어 점수로 버티고 있었는데도 국영수 등수를 내면 절대로 안 빠질 정도로 영어 성적이 좋았다. 당시의 낮은 시험 수준으로는 영어시험이 어렵다 쉽다가 내겐 없었던 것 같다. 감히 비유하자면 아무리 공부 못하는 아이라도 미국 아이가 한국 영어시험을 보면 잘 볼 거라는 개념이랄까. 나는 영어가 무섭지 않았다. (수학은 어렵고 무서운 게 아니라 잘 모른다. 재수를 하면서 너무 늦었지만 일단 대학을 가야겠어서 조금 손댈 때까지는 전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나머지 과목도, 전반적으로, 화학 생물 등 좋아하는 과목은 만점, 역사와 사회같은 암기과목 들은 형편없는 점수를 받는 식으로 아주 바람직하지 않고 편향적인 학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들은 학교에서 문법을 배워가지고 실용영어를 미국에 와서 배울지 모르지만, 나는 영어 문법을 미국에 와서 미국 ESL 영어 클래스에서 배웠다. 그리고, 나는 책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는데 1999년 당시는 미국에서 한국책을 구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고 그래서, 빨리 영어를 익히고 싶어서 가능한 모든 회화 클래스를 찾아다니는 동시에 궁여지책으로 도서관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걸' 읽기 시작한 것이 영문 책 읽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다니엘 스틸, 로빈 쿡, 존 그리샴 처럼 쉬운 통속소설을 도서관 중고도서 세일에서 10센트, 25센트에 사가지고 사전이 반으로 쪼개져 낱장이 떨어져 나올 때까지 찾고 또 찾으며 버케블러리를 늘렸다. 당시에 인터넷 정보 없이는 참 힘들었던 크로스워드 퍼즐도 거의 고시공부 하듯이 여러 권 풀었다.

오히려 남들보다도 단어가 딸린다고 생각했던 내가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영어로 어휘력으로 IQ test를 하는 곳에서 130정도가 나온다. https://openpsychometrics.org/tests/VIQT/  밝혔다싶이 워낙 책은 아주 좋아했지만 한국에서 읽은 영문 책은 아르바이트로 번역한 책 말고는 중고로 산 시드니 셀던 책 두 권 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 옛날에도 대도시에는 한인타운에 한국 서점이 있긴했었만 지금은 한국 도서를 파는 인터넷 서점이 생겼고 미국 공공 도서관에도 한국서적들이 더러 갖춰져 있는 걸 아는데, 전혀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재작년에서 작년에 걸쳐 남편 안식년 10개월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도, 가지고 간 영문 책 읽고 이태원에서 영문책 사서 읽느라고 한국 소설은 열 권도 안 읽은 것 같은데, 그 중 네 권인가가 번역서였다.(일어는 한국어에서 번역한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는데 하루키 소설의 대부분을 일영역으로 읽은 나로서는 한국 문장은 역시 때로 어렵다. 아직 한국에 살 때 한국어로 읽은 책에 대한 사연도 기회가 닿으면 다시 얘기하겠다.)


지금 내가, 나는 그런 '수준'(무슨 수준?)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은 사실 의미 함축의 언어라 어려운 언어라서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긴 글은 어려워졌기도 하고, 또 가벼운 책은 영어처럼 문장의 맛을 집중해서 읽게 되지 않아서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 또한 긴 얘기라서 다음 기회에 하겠지만, 나의 '죽기 전 1000권 읽기 프로젝트'로 나름대로 엄선된 도서를 읽느라고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읽기에는 절대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다. 한글책이 엄선된 도서에 '못 미친다'는 것이 절대 아니라, 한국의 많은 분들이 읽고 계시는 '좋은 책'은 어차피 번역서 거나 영문책이고, 한국 작가는 잘 모르는데 취향이 다들 달라서 무조건 추천을 따르기도 그렇고, 미국의 goodreads.com처럼 많은 사람들이 준 점수를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서 실패율이 높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라는 얘기냐, 고 멈추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영어 단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쓸 나의 입장이 이렇다는 얘기 같다. 영어를 잘했다, 즉 영어 시험성적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단어는 소위 '머리가 굵어진 후' 뒤늦게 많이 알면서 그 의미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동안 기록한 책만으로도 영문 책을 500여 권 읽었으니 같은 단어라도 작가마다 배경마다 그 깊은 의미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길어서 트위터에 쓰지 못하는 이런저런 단어 이야기를 써 볼까 한다는 것이다. 단어 이야기는 어느 나라 말이나 무조건 재미있지만, 외국어 단어는 연필이 닳도록 쓰고 또 쓴다고 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은 의미와 실제 쓰임과 느낌을 알고 '사용할 수 있으면' 모국어처럼 익혀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전에 다른 블로그(들)에 썼던 글을 정리해 업데이트하기도 할 것이고, 요즘 새로 생각하는 것들도 있고, 그래서 이제는 아마 나도 '정리'가 필요해졌다는 생각에서 시작해보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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