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사실 괜찮지 않을지라도
한국 영어 교육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가 인사말이다.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I'm fine. too. Thank you.
Fine은 잘 지내, 가 아니라 사실 ‘나 그냥저냥 괜찮다' 정도밖에 안된다.
안 힘들어? 아픈 데는 없어? 괜찮아? 물으면 어 뭐 괜찮아, 정도.
그래서 사실 fine보다는 good < great! < wonderful! < super!! 등이 주로 쓰인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굿!이냐, 하면 별로 안 좋아도 영어 기준으로는 그냥 굿이다. 그레잇도 그저 별 일 없이 밥 잘 먹고 일 잘하고 있으면, 아침에 엄마한테 혼났어도, 애인하고 헤어질 위기에 처해있어도, 감기 기운이 있어도 그레잇이 될 수 있다. 어 그래그래 좋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How are you 에는 그렇게 대충 기계적으로 답을 할 수가 있지만, 기타 변형의 How are you doing?, What's up? What's new? What's happening? 등을 들으면, 특히 후자의 세 가지의 경우는 마치 뭔가 자세한 일상의 내막을 전해야 할 것 같은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때때로 만나는 what are you doing? 같은 걸 들으면 화들짝, 뭣을 하고 있느냐고? 하고 내가 하고 있었던 행동을 되짚어 보게도 된다.
I'm fine. 어, 나 괜찮아.
학교에서 배운 영어 중 '대충' 가장 비슷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참으로 생각보다는 나오기 힘든 말이다.
일단, 처음 만나 하는 말이라는 How do you do, 는 이제 미국에서는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쓰이지 않지만, How are you, 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매일같이 지겹도록 쓰이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고작 인사하는걸 왜 지겹다고 하느냐 하면, 물음을 받았으니 늘 괜찮다고 답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습관적으로 안녕하세요, 안냐세여, 하고 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대충 꾸벅거리고 지나다니는 인사하고 달리, 어느 날 문득 살이에 지쳐있을 때 슈퍼마켓이 직원이 밝게 웃는 얼굴로 눈을 마주치며,
How are you doing, today?
라고 묻기라도 하면, 사실은 말이지, 내가 지금 속상한 일이 있어서, 하고 속내를 털어놓기라도 할 기분이 된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슈퍼마켓에서라면 그 밖에, Have you found everything alright? 살 거 다 잘 찾았어? 등도 묻게 되어있는데 한국의 친절과 또 달리 역시 뭔가 마찬가지로 우리네 사람들은 씩씩하고 구체적인 답을 돌려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되지만, 어 내가 이런 종류의 치약을 찾고 있었는데 어째 안 보이더라, 같은, 캐셔는 별반 도움도 줄 수 없는 불평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그냥 웬만하면 예스 땡큐, 하고 말도록 하자. 안 그래도 감정노동으로 힘든 그분이 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사과하고 그대의 하소연을 들어줘야 하는가. 혹시 정말 불평할 일이 있으면 각 슈퍼마켓에 마련되어있는 고객관리 센터에 가서 정식으로 정중하고도 강력하게 불평을 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는 사실 정말이지 good은커녕 전혀 fine하지조차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스트푸드 직원에게는 삼갈지라도, 혹시 룸메이트나 조금 가까운 친구가 있으면 그래도 진심 어린 안부를 좀 물어주기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그런 경우,
I'm OK.. 괜찮아, 뭐..
하고 말 꼬리를 흐려볼 수 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숨도 좀 쉬어보자. 그러면
Are you Ok?
(Is there) something wrong? what's wrong? 문제 있어?
등을 물어올 것이다. 왜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의뭉스럽게 구는가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먼저 말했듯이 미국인들은 흔히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개인주의고 사적인 영역이 확실해서 아무에게나 속내를 내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쯤 눈치를 보였는데도 눈치껏 묻지도 않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Actually, 사실은 말이야
You know what? 저기 있잖아..
하고 문제를 마구 털어놓으면 썰렁해지면서 피차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우울하지도 않고 조금 자신이 붙은 듯한 날이면 슈퍼마켓 직원에게라도 먼저 헬로, 하이, 하고 먼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어차피 하와유부터 주거니 받거니 same old same old 만날 천날 똑같은 ‘대사’ 주고받기가 다시 시작되지만 그래도 뭔가, 대화를 Initiate 먼저 시작했다는 분위기가 날 수 있다. 물론 아주 친한 친구라면 그저 Hi! Hey! 하고 서로 다가가는 걸로 본론이 시작될 수도 있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What's up 등으로 다시 처음부터 인사 의례가 시작될 수도 있다.
+참고로 :
용건을 시작하는 데 있어 실제 대화가 아니라 이메일을 쓸 때는, 입사 인터뷰나 선생님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업소에 간단한 이메일을 보내 뭔가를 문의할 때라면, 영어학원에서 배우는 let me introduce myself, 필요 없이, Hello, Hi, 하고, I am 캡틴 마블, 하고 바로 용건을 쓰면 된다. 한국인들은 전화 문의를 할 때, 저 뭣좀 여쭤볼게요, 등등 preamble 미리 조금 늘어놓는 말들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전화를 해서도, Hi, Hey, 하고 바로 용건으로 들어간다.
강조 또 강조, Please와 Thank you는 물론이다.
끊을 때도, 선생님이나 교수님이라도 그럼 끊겠습니다. 들어가세요(어딜), 등등 고민하지 말고 Ok. Thank you. bye. 하고 끊으면 된다.
문의전화 같은 사무적인 전화는 보통 상대방이 is there anything I can do today 더 도와 드릴 것이 없으십니까?라고 묻게 되어있는데 이 역시 들으면 가만있자 무엇이 있을까 하지 말고 웬만하면 No, thank you, That will be all. bye(bye) 하면 된다. 미국인들은 특별히 자기가 주연공이 아니라 그냥 여럿이 모이는 파티라면 집주인에게 집에 간다는 인사 따로 안 하고 그냥 조용히 나오는 경우도 많다. 혹시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으면 모를까 사람을 찾아 일부러 시끄럽게 인사를 하고 나오면 분위기도 깨지고, 어, 왜 , 너 가는데 나, 뭐 어쩌라고, 이런 눈치다. 처음에는 '다정하게 굴기는 잘하는데 은근히 쌀쌀맞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살다 보면 괜히 친하답시고 쓸데없는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그래서 불쾌해하면 사람이 말이야 속이 좁다,고 구박하는 한국사람들보다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기도 하다.
물론 내 '괜찮지 않은' 문제를 술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말할 수 있으면 이런 글 따위는 읽고 계시지 않겠지만, 나는 이들의 대화의 '문화'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두고두고 가장 많이 쓰인 것은, 결국 내가 익혀야 하는 단어나 문법이 아니라 문화를 배운 것이었다. 99년 당시에는 한국에서는 할로윈도 잘 모를 때였고, 땡스기빙, Fat Tuesday(사순절 시작 전날), Easter 부활절, 그리고 민족 대명절(!!?) Black Friday(추수감사절 바로 다음날 대대적인 세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날) 등, 종교와 상관없이 미국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즐기는 명절(?)들부터 각종 요리 재료와 요리법까지 말이다.
...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냥 괜찮고 만다.
(barely) getting by (근근이) 그저 살아만 있는 중, 이라도, 신세타령을 해도 될 대상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다른 각도의 '괜찮다'는 뜻의 말을 알아보도록 하자.
사과를 받았을 때는 너그럽고 근사하고 우아하게 '괜찮다'라고 말을 할 수 있어야 말은 안돼도 대인(!)이라도 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