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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Oct 28. 2019

알래스카 겨울 이야기(3)

무스와 산책을

10월 중까지는 혹 이른 눈이 와도 다시 녹기도 잘하지만, 11월이 들어서면 알래스카에는 분명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다.

나는 1년 내내,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아침저녁으로 두 번 20-30분씩 나가서 걷는다. 내가 사는 도시의 위도에서는 ( 64.83° N - 서울 37.56° N), 9월 23일경 추분이 지나면 낮의 길이가 본격적으로 짧아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겨울이 깊어질수록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점점 늦게 나가게 되고, 그래서 첫 번째 걷기와 두 번째 걷기의 간격이 좁아져 조금 바쁜 감이 들지만, ‘기온’에는 상관없이 무조건 나간다.


알래스카가 오지라서 물 길으러 나가는 게 아니다.

차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Planet Fitness, Alaska Club 등, 수영장과 스쿼시 코트, 암벽등반 시설까지 갖춘 좋은 피트니스 시설들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마라톤도 트레드 밀로만은 훈련할 수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개인 도전으로 시작한 것이 일과가 된 것이다.


한창 걷다 보면, 추운 날에는 목도리에 입김이 두껍게 얼어붙고, 속눈썹이 짤까닥 짤가닥 들러붙고, 오디오북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려고 매고 나간 아이패드는 견디지 못하고 인사도 없이 중간에 잠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지만 인간은 더운 피 동물이다. 얼굴을 싸맨 만큼 숨이 차기도 하고, 아직 어스름에 나가 아직 길에 눈을 안 치워 놓은 날은 조금 더디 걸린 적은 있어도 코스를 중간에 그만두고 돌아온 적은 없다.


이렇게 걷다 보면 간혹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본래 있었긴 한데, 내가 모종의 지역 명물(!)이 되어있다는 것을 안 것은 알래스카 7년 차에 안식년으로 한국에 10개월 동안 다녀온 후였다. 걸으며 만나는 이웃마다, 어디 갔었느냐고, 왜 한동안 걷지 않았느냐며 말을 건네 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몇몇 가까운 이웃이나 어쩌다 날 기억했나 보다 했는데, 무뚝뚝한 아파트 관리인부터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만나는 사람들까지, 2년이 지난 지금도 한 번씩 아직도 걷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더 심각한 스포츠맨들도 있는데 고작 한결같이 몇십 분 걸은 정도를 가지고 그러는 게 나도 이상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겨울의 어스름 저녁에 눈만 내놓고 온몸을 똘똘 싸맨 채 걷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칸트 선생을 보듯 시계를 맞추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재미있다.

해 뜨고 지는 시간이 매일 현저히 달라지는 알래스카에서는 천하의 칸트 선생도 매일 정확한 시각에 나가긴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어느 날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씩씩하게 걷고 있다가, 눈을 덮고 누워서 안 보였던 거대한 무스가 바로 눈앞에서 눈을 털고 훅 일어나는데 정말이지 과장 없이 ‘놀라 나자빠질’ 뻔했던 적이 있다.

물론, 베이비 무스도 청소년 무스도 있고, 우리는 무스 외모의 다양성과 무스권을 존중해야 하지만, 무스는 특히 다리가 정말이지 엄청나게 길기 때문에, 큰 녀석은 웬만한 대인 철조망은 겅중겅중 넘어버리고, 과장을 아주 조금만 보태서 전체를 다 보는 데 오래 걸릴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이지 무스가 무서워서는 아니다.

언젠가, 메인주에서 온 관광객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양반에 따르면, 메인에도 무스가 있지만 알래스카 무스처럼 거대한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또 한 번은, 아직 어스름 이른 아침에 에 나무 뒤에서 갑자기 쓱 나온 게 사람이 아니라 무스라서 외려 덜 놀란 적도 있다. 하긴, 사람이 무스보다 무서운 세상이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 놀라면 무스도 서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물 기회만 생기면 물고 마는 인간처럼 눈이 앞에 달린 포식동물과 달리, 무스는 눈이 얼굴 양쪽에 달린 초식 먹이 동물이기 때문에 대개는 그렇게 만나도 슬쩍슬쩍 얼굴을 돌려가며 곁눈으로 바라보다 뚜걱뚜걱 가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귀찮게 굴면 그 큰 녀석이 앞발로 찰 수도 있다고 하니까, 괜히 대화를 통해 분단을 해결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좋다.

그 긴 발로 차면 모르긴 몰라도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보다는 아플 것이다.


여기서 잠깐.

알래스카는 '동네에 무스가 막 다니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정말이지 사람들은, 알고 싶지도 않고, 답을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을 잘도 묻는다) 무스는 주로 산에 즈이들끼리 조용히 살다가 주로 먹이가 떨어지는 겨울에나 먹이를 찾아서 어스름에 잠시 마을에 내려오기도 할 뿐이다.

그대 같으면 인간들과 같이 살고 싶겠는가.

하지만, 겨울이 아니더라도 나무가 울창한 길을 달리다 보면 가끔 무스 출몰지 Moose Xing (Xing은 cro‘ssing’의 약자로 즉 ‘무스 건널목’쯤 되는 말이다. 귀여워) 푯말이 있는데 (lower 48에는 주로 사슴 건널목 푯말이 보인다), 그 언저리로는 길을 잘 살피며 달리는 것이 좋다.

무스를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스를 치면 무스도 아프겠지만 큰 무스라면 차가 박살이 나기 때문에, 타고 있는 그대의 건강에도 좋은 일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름의 고속도로에서는 무스 외에도 길의 갓길을 따라 걷고 있는 히치하이커들도 가끔 만날 수 있으니 커브 길에서는 이 또한 주의해야 한다.

히치하이커를 태워줘라 말아라 하는 것은, 총도 없고 몸집도 조그만 내가 할 조언은 아니지만, 이들은 본인들도 본인들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어서 그대의 깨끗한 렌터카가 서 줄 것이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주로 큰 장거리 트럭 같은 것을 지향하므로 그냥 지나치는데 그렇게 마음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고 그저 안전운행을 하시면 된다.

중요한 것은, 히치하이커는 물론이지만(!), 혹시라도 갑자기 뛰어든 무스나 기타 동물을 치었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버리고 가면 절대 안 되고 ( 알래스칸 스포츠 1-사냥 참조), 911에 전화해서 반드시 보고하도록 한다. 졸지에 뺑소니가 되는 수가 있다.

물론 만약 그대가 전화를 할 수 있는 건강 상태라면 말이다.  


아 본인이 히치하이커시라구요 슨생님 왜 알래스카까지 와서


눈에 직접 보이는 무스 외에도 마른 열매 같은 것을 따 먹으려 녀석들이 나 모르게 다녀간 날에는 단박에 알 수 있다. 동물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로 다니지 않기 때문에 너른 눈밭에 발자국들이 어지러운 것은 물론, 앞서 말한 금덩어리처럼 역시 nugget너겟이라고 불리는 무스 똥들이 군데군데 수북하기 때문이다.

어쩐지 내가 이유 없이 조금 미안해지지만, 맥도날ㄷ의 그 너겟과 같은 스펠링이다. (영어로는 동물의 우는 소리도, 집을 가리키는 말도, 새끼를 가리키는 말, 집단을 가리키는 말도 다 다른 데 이어, 똥을 가리키는 말도 다 다르니 정말  은근히 배우기 까다로운 언어다. 일례로 염소똥이나 쥐똥은 pallet인데 새똥은 dropping인 식이다)

초식동물이라 그런지 신선한 것(!)도 별 냄새는 나지 않지만, 기괴하게도 이 실제 너겟을 사용한(!) 귀걸이나 열쇠고리, 아니면 '모양만' 본뜬 (무스 똥을 먹는 것이 건강에 특별히 해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초식동물이라 별로 맛이 없을 테니 간식으로 팔 것 같지 않으니 믿어주자) 초콜릿 간식 등의 알래스카 기념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있으니, 비위가 강한 분들이나, 본인은 비위가 약하지만, 비위가 강한 상사에게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알래스카에 와서 무스 똥 몇 개는 가지고 돌아가야 알래스카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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