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 하세요?

혹시 ”국제회의 기획사“라는 직업을 아시나요?

by 이 실장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첫 만남은 보통 명함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명함에는 1) 회사 정보, 2) 업무 정보, 3) 개인 정보 (이름, 직책, 연락처 등)가 담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잘 알려진 기업이나 기관에 다니는 사람들과 명함 교환을 할 경우, ‘1) 회사 정보’만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진다. 명함에 기재된 ‘2) 업무 정보’를 통해서는 명함을 교환하는 이의 전문 업무 분야를 파악하고, 나아가 향후 업무 협업 가능성 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997년 시작한 사회생활 동안 난 4-5개 정도의 회사를 경험했고, 업무 분야로 보면 딱 두 분야에서 일을 했다.


대학 졸업 후 받은 내 첫 명함은 1년 6개월이란 짧은 기간 밖에 사용하지 못했고, 신입 사원이라 외부 업무가 많지 않아 퇴사 때까지 회사에서 만들어준 1 팩의 명함을 미처 다 사용하지도 못했다. 내 첫 명함은 ‘1) 회사 정보‘만으로 충분히 나를 대변해 주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여자의 명함은 어디에서 월급을 받는지 알려주는 명함에 인쇄된 회사 로고 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했다. 누구도 내가 그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일이 잘 맞는지,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 까지도…. 아이러니하게도 첫 직장에서 앞으로 무슨 일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숨 막히게 힘들었다. 그렇게 난 첫 업무 분야였던 “금융계”를 떠났다.


감사한 기회와 용감한 결정으로 20대 후반에 만나 만 50세가 된 지금까지도 몸 담고 있는 두 번째 업무 분야는 내 성향에 잘 맞고, 꽤 오랜 기간 지루하지 않게 일을 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내 두 번째 직업엔 한 가지 issue가 있다.

동종 업계나 잠정적인 client 가 아닌 이상 내 명함을 받고, 명함 속 정보로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내 업무가 무엇인지 “를 알아채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아니다 거의 소기업이다)이니 회사 정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명함에 친절하게 “국제회의 기획사”라는 업종을 기재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명함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제”, “회의”, 그리고 “기획사” 이 세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명확히 알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이 단어들이 합쳐진 나의 직업인 ”국제회의 기획사“를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올해로 25년째 “국제회의 기획사”로 일 해 오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내 업을 설명하는 방식은 보통 이러하다.

“아 좀 특이한 업종이죠^^. “

“혹 호텔이나 코엑스 같은 곳에서 큰 회의장 앞에 ‘OOO학회 제 OOO차 국제학술대회‘ 이런 현수막 보신 적 있으세요? 아 있으시죠! “

“저는 그런 행사를 한국으로 유치 (월드컵이나 올림픽 유치와 비슷하죠^^)하는 업무, 유치해 온 후 행사를 기획하고, 현장 운영까지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획자입니다. “

이 정도 설명하면 상대의 반응은 열에 아홉,

“아 그런 거 본 거 같아요! 와 그러면 할 일이 되게 많겠네요.” 내지 “그럼 외국도 많이 다니고 외국 사람도 많이 만나고 하니 영어도 잘하시겠네요.”이다.

그렇다.

국제회의 기획사로서 해야 할 일을 item 별로 손꼽아 본다면 상상 이상으로 많은 업무를 진행해야 하고, 유치나 홍보를 위한 해외 출장, 행사 운영을 위한 현장 출장도 많은 직업이다. 또한 우리가 진행하는 행사가 ‘국제 학술대회‘이기에 project의 공식 언어는 영어이며, 제 정보와 공지는 모두 영어로 작성되어야 하고, 참석자들과의 communication, 현장 진행도 영어로 진행되기에 영어를 잘한다기보다는 못하면 업무 진행이 어려운 업종이 맞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이기에 이 업의 market은 제한적이고 이로 인해 비즈니스의 확장성이 떨어지는 업종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난 올해로 25년째 국제회의 기획사로 일하고 있다.


첫 직장 퇴사 후, 감사하게 주어진 외국 생활 중 교수님이 주신 Convention 산업 개론서를 읽으면서 이 업을 알게 되었다. 그 책에 기술된 Characteristics of Convention Organizer를 읽었던 그 순간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도 생생히 기억한다. 교재 속의 단어들이 봉인 해제되어 눈앞에 3D로 떠오르며 자체 강조되는 만화처럼, convention organizer의 업무 특성, 이 업무에 적합한 성향 등이 생동감 있게 내 눈앞에 펼쳐졌고, 그 순간 “아! 이거 나를 위한 직업인데 “ 하고 운명적인 깨달음이 왔었다 (그렇게 믿는다). 이 신기한 경험을 한 다음 날, 바로 지도 교수님께 난 이 분야를 공부해서 업으로 삼고 싶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업을 선택했다.


첫 직장은 고마운 곳이었지만, 학력고사 성적에 맞춰 대학을 골라 갔던 것처럼, 대학 4학년 2학기까지의 성적에 맞춰 나름 인지도가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급여를 많이 주는 회사를 고른 결과물이었다. 대학 4년 동안 성취해 낸 정량적인 결과인 학점, 입사 시험 결과 그에 적합한 보상의 정량적인 값인 급여를 최우선으로 두고 직장을 선택했었다. 그 결정의 과정 속에 정작 일을 해 나가야 하는 나란 사람에 대한 정성적인 이해 (성향, 가치관 등)를 포함시키지 않는 오류를 범했다는 걸 나이가 들어가며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첫 직장에서 부여받은 업무에 애정을 쏟을 수 없었고, 아무 문제가 없어도 그렇게 출근을 힘겨워했던 것임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깨닫게 되었다.


올해로 25년째인 나의 두 번째 직업 ’국제회의 기획사’는 비록 명함 교환만으로 업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적지만, fit이 딱 맞아 입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재킷처럼 내게 최적화된 직업이라고 확신한다. 그 긴 시간 동안 분명 업무 상 힘든 순간도 수없이 많았지만, 그 길을 헤쳐나간 과정이 고단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내게는 버거웠지만 첫 직장에서 업무의 무게를 견디며 버텨 이제 꽤 높은 자리에 있는 옛 입사 동기들과 비교해 보면 경제적 보상은 부족할지 몰라도, 다른 많은 보상을 내 인생에 주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 업의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project base 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계약서 사인을 시작으로, 수 차례 업데이트된 운영계획서에 따라 opening ceremony를 시작해 3-5일 후면 closing ceremony로 끝이 난다. 끝이 명확하다.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했던 client 라도 계약이 끝나면 다시 볼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제는 오늘도 내일도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업무는 절대 못 할 것 같다.


두 번째 장점은 많은 사람을 대면하면서 인생 참고용 archive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Project에 따라 clinet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5-7년 동안, 수많은 미팅을 통해 조율하면서 행사를 준비해 나간다. 업의 특성상 client 대부분은 그들이 종사하는 분야의 top leader 인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해 네이버 인물검색에 나오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분들과의 업무 진행 과정 속에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그분들이 본업을 대하는 자세 등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이를 토대로 내 인생의 방향성을 조정해 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다. 또한, 행사에 참석하는 수십에서 수백 개국에서 온 해당 분야 전문가들 수 백 명에서 수 천명을 일주일여의 기간 동안 행사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마주하며 쌓은 친근하고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너무나도 다양한 삶의 모습과 세계관을 경험하게 된다.


이외에도 많은 소소한 에피소드가 발생하는 것이 이 업의 치명적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업종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소위 “행사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차차 시간을 두고 글로 풀어볼 까 한다^^.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을 만나 그 일을 20여 년이 넘게 흥미와 보람 가지고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깨달을 때마다, 앞으로 더욱 일에 집중하면서 이 일이 내 삶의 중요한 한 축임을 잊지 않기를 다짐해 본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일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지 않을 때 깔끔하고 미련 없이 내 두 번째 업을 정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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