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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하루가 나를 바꾸고 있었다

by 석은별

오늘도 눈을 떴다. 알람을 끄고, 한숨을 쉬고, 이불을 다시 덮을까 하다가... 결국 부스스 일어났다.

별일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세수를 하고, 뜨거운 물을 내리고, 식은 밥을 데우고, 아이는 여전히 학교 가기 싫다고 투덜댔다.

어제랑 똑같은 하루. 그제와도 비슷한 하루.그러니까, 좀 지겨운 하루.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그 지겨운 하루가 조금은 고마워졌다.




‘별일 없는 하루가 선물이다’라는 뻔한 말을 믿게 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감사 훈련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요즘 덜 흔들리네?’

예전엔 하루라도 뭔가 틀어지면 금방 무너졌었다.

아이가 늦잠 자면 나도 하루 종일 예민했고, 반찬이 망하면 '왜 이리 안 풀리지' 하고 괜히 우울했다.

누군가 말 한 마디 삐딱하게 하면 곱씹고 또 곱씹고, 잘 자던 밤도 뒤척였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망쳐도 그냥 “어휴, 또 이러네~” 하고 넘긴다.

세탁기 돌려놓고 빨래 꺼내는 걸 까먹었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프라이팬 구분 또 안 했다고 바로 ‘결혼의 의미’까지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조금은 짜증나긴 한다.)


내가 무뎌진 걸까? 아니면 단단해진 걸까?

그 질문에 스스로 웃음이 났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다.


한때는 이 평범함이 지겨웠고, 숨 막혔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흐름 안에서 나 자신이 조금씩 정돈되고 있다는 걸 안다.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비슷한 순서로 움직이고, 비슷한 말과 행동이 이어지는 하루들.

그 사이에 마음의 ‘반복 내성’이 생긴 것 같았다.

동요하지 않고, 금방 무너지지 않고, 조금 천천히 숨을 고르는 법.

하루가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익숙한 리듬’으로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걸 조금씩 배우는 중이었다.


아이가 물었다.

"엄마, 왜 매일 똑같이 살아?"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니?"

아이는 갸웃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매일 비슷하게 산다는 건, 매일 나를 다시 다잡는 일이야.’

한때는 ‘일상이 지루한 사람’이 부러웠다.

감정이 널뛰지 않고, 사람에 휘둘리지 않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잠드는 일상이 한결같이 이어지는 사람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살면서 점점 알게 됐다.


이젠 조금은 알겠다.

드라마틱한 날보다 담백한 하루가 사람을 살린다는 걸.

눈부신 성장이 없어도, 버킷리스트를 이루지 않아도,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나는 아주 천천히 내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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