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얼굴을 다시 그리다

그의 일기를 훔쳐 보다

by 석은별

나는 불안을 잘 숨기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은 나를 똑똑하다고 했다. 작은 시험에서는 실수 한 번 없이 정확했고, 남들보다 빠르게 이해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중요한 시험만 오면 어김없이 무너졌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끝이 얼어붙듯 떨렸다. 결국 나의 실력은 늘 '가능성'으로만 남았고, 그 가능성은 나를 믿는 사람들의 기대를 먹고 자라났다.


전교 1등을 해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내가 1등을 하지 않은 것에 늘 아쉬움을 표했다. 내겐 그 기대가 부담이었다. 아니, 공포였다. 한 번 부응하면 그다음엔 더 큰 기대가 밀려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렸다. 일부러 집중하지 않고,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자신을 비켜갔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런 나를 향해 끝없이 기대했고, 나는 그런 세상을 향해 조용히 저항했다. 억울함과 불만이 마음속에 차올랐지만, 정작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준 사람들을 미워하지 못했다. 그들의 믿음은 따뜻했고, 나는 그 따뜻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가리는 법’을 익혔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나를 거듭 감추게 했다.




불안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면접 자리에서, 발표 직전, 혹은 낯선 사람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도 그것은 스며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불안을 ‘당연한 감정’이라 여겼다. 누구나 중요한 순간엔 긴장하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불안을 억누르고 지나쳤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불안은 나를 향한 조용한 경고였던 것 같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나는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다. 스스로의 선택이라며 희망퇴직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짐이 아니라 버려짐에 가까웠다. 20년 가까이 몸담은 자리가, 숫자 하나로 정리되었다는 사실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무너뜨렸다.


처음엔 술에 의지했다. 밤이면 한 병의 소주가 나를 데려가고, 아침이면 괜찮은 척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친구의 말에 혹해 주식에 손을 댔고, 깊은 불안과 욕망 속에서 선물 거래까지 손을 뻗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참혹했다. 전 재산이 빠져나갔고, 아내와의 관계는 깊이 금이 갔다. 아이와는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려워졌다. 문득문득, 삶의 끝을 생각하는 밤들이 찾아왔다. 희미해진 자존감 속에서 나는 무너지고 있었지만, 무너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고등학교 시절 썼던 단편소설이 담긴 노트였다. 거기엔, 진심으로 자기 세계를 표현하려 애쓰던 소년이 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 소년에게 속삭였다. “넌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아무 말 없는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오히려 울림을 들었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한 번쯤은,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아보라고.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 불안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부모의 걱정, 사회의 기준, 타인의 기대 안에서 조각조각 빚어진 것이었다. 나는 그 불안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애썼지만, 동시에 그 증명을 거부하기 위해 스스로를 짓눌렀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숨었고, 기대에 짓눌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나는 그 불안을 다시 바라본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것들—창밖으로 들려오는 새소리, 오래된 책갈피 속 문장 하나, 길을 걷다 문득 떠오른 생각들—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기록한다. 물론 두렵다. 누가 이 글을 읽어줄까. 정말 괜찮을까. 하지만, 이 두려움은 과거와는 다르다. 지금의 불안은, 어쩐지 설레고 기분 좋은 긴장감을 품고 있다. 나는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그것이 지금 내가 다시 그리고 있는 인생의 밑그림이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가장으로서의 책임, 경제적 부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두려움은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불안의 진짜 얼굴을 본다. 그것은 나를 억누르던 그림자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던 존재였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고, 여전히 흔들리며, 여전히 불안하다. 그러나 그 불안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살아 있음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삶의 진짜 조건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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