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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은별 Feb 07. 2024

기억 정리하기

좋은 이별

길을 걷다 문득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살다 보니 시끄러운 고가도로를 건너는 동안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크게 '아~악!' 소리를 쳐 봤지만 시원하지 않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

관계가 힘들다.

아니 떠나는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다.

관계 맺기는 괜찮다. 관계 유지도 괜찮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두렵다.

또 죽어버린 걸까...

두렵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사귄 남자친구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녀석이다. 과 친구에게 소개받았는데 첫인상에서 수줍음이 가득한 것이 순수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건달이었다. 중학교 1학년 이후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고 거친 일을 하면서 살았다. 싸우기도 하고 술집에서 아가씨들 뒤를 봐주기도 하며 음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본 녀석이다. 나 역시 그 당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만났다. 미래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에게 버거운 짐만 지워 놓은 것 같아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실컷 싸우고 죽어버리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무서울 게 없는 나는 상대방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살필 이유도 몰랐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주먹이 세다는 녀석이 내 앞에서는 얌전한 강아지 모드다. 화를 낸 적이 없다. 내가 하는 말은 다 맞다고 믿는 녀석이다. 하물며 내가 잘 못 알고 있던 연예인 소식마저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다 맞다고 우기다 친구들 사이에서 창피당했는데도 '실수할 수 있지!'라고 받아주던 녀석이다.


새벽 늦게 마치더라도 삐삐에 음성 메시지로 인사를 남기거나 노래를 불러주거나, 술이 한 껏 취했을 때는 보고 싶다고 여러 번 외치던 녀석이다. 늘 집 앞까지 와서 데려간다. 어디에서 만나기로 하면 늘 일찍 나와서 기다린다. 친구들에게는 내가 자신과 만나는 것에 대해 과분하다고 표현한다. 나랑 결혼을 한다면 자기 삶이 바뀔 거라고 한껏 기대하던 목소리도 생생하다.


그런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 나에게 소개해 준 과동기도 모른다고 한다. 아는데 말을 안 하는 눈치다. 주변을 수소문하고 아무리 메시지를 남겼지만 연락이 안 된다. 어디서 뭘 하느라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건가 걱정도 잠시 화가 났다. 다른 여자가 생겨서 떠난 거라면 차라리 낫겠다. 그런 불안과 두려움보다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걱정이 컸다. 누구라도 알면 알려주길 바랐지만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저녁에 집에 들어가는 길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낯익은 남자가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그 녀석이다. 손에는 종이가방을 들고 있다. 뭔가 살도 빠져 보이고 퀭한 모습이다. 깨끗하게 씻고 말끔하게 단장했지만 퀭한 모습은 숨겨지지 않았다.


화가 난 마음에 한참을 째려봤다.

'잘 있었나 보네. 얼굴 밝아 보인다.'라며 다가온다. 뒷걸음질 쳤다. 그날 처음 깨달았다. 그 녀석에게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거친 모습이 보였다.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손을 잡고 끌고 간다. 뿌리치려는데 깍지를 꽉 쥐고서는 놓지 않는다. 힘껏 붙잡는데 어쩐지 마음이 편하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자주 가던 분식점에서 만두와 쫄면을 시켰다. 떡볶이도 시켰다. 김밥도 시켰다. 누가 먹는다고 이렇게나 많이 시키느냐고 퉁명스레 말하는데 '제일 먹고 싶던 거라서...'라고 한다.

'아니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이제 나타난 거야! 이게 얼마만인지....'갑자기 눈물이 났다.

'보고 싶었냐?'

'그게 말이라고... 도대체 뭘 하다 이제 온 거냐고!'

'나중에 말해 줄게. 배고프다 얼른 먹자!'


쩝쩝 거리며 먹는 그 녀석을 보면서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계속 물었다.

'뭐 했냐고! 왜 연락이 안 된 거냐고!'


'말하면 실망할 텐데'


'왜... 누가 새로 생기기라도 한 거?


'아니. 그런 거 아니고...'


'그럼 뭐냐고!'


'나중에 말할게. 다 먹고... 다 먹고... 먹자 응?'


그 장면이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다니 놀랍다.


나에게 이별은 '고통' 그 자체다. 이유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죽음으로 사라지는 가족들을 경험하다 보니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지거나 단절될 때면 상당히 고통스러워진다. 버림받은 느낌이 이런 것이라면 차라니 죽는 게 나지도 모르겠다. 춥다 못해 뼛속까지 한기가 들어오는 기분이다. 언젠가 물리치료에서 아이스건을 맞아 본 적이 있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염증치료 한다고 쏜 부위의 감각을 온몸에서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별' 앞에서 그런 통증을 느꼈다. 대낮의 온도가 40도가 육박하는데도 온몸에서 냉기가 느껴져 덜덜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게 죽음 소식을 들을 때다. 그런데 그때 그 녀석이 사라지자 몇 달간 나는 배신감과 서러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분식점에서 나와 카페로 이동했다.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반대쪽 손에 든 종이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다. 힐끗 쳐다보니 '볼래?'라며 건네준다. 유리병이다. 유리병 속에 종이학이 꽉 채워져 있다. 일부러 그라데이션을 넣은 것인지 차곡차곡 채워져 있는 학을 보자니 '이건 왜?'라는 순간 길거리에서 와락 안는다.


'니 생각하면서 한 마리씩 접었는데 그중에 제일 예쁜 걸로만 담았지. 이거 세배는 넘게 더 있다. 그 정도로 보고....' 운다.


'야! 놔!' 밀쳐냈다.


카페로 들어가 씩씩 대며 앉아 있는 나에게 그간 왜 연락이 안 됐는지를 말한다.

오래전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단다. 알고 보니 집행유예기간이라 사건에 휘말리면 안 되는 시기였단다. 붙잡혀 들어갔단다. 친구 몇몇이 알고 있지만 나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단다. 나중에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사정했단다. 그리고 오늘 온 것은 사정을 이야기하고 헤어지려고 온 것이라고 한다.


'씨... 발...'


카페를 뛰쳐나오면서 종이가방을 내동댕이쳤다.


'꺼져!'


'미안...'


'가라고! 다 니 맘대로 네! 니 맘대로야! 뭘 이제 와서 헤어져! 이미 연락 안 되는 순간 우린 헤어진 거야!'


울음이 났다. 서러웠다. 이 녀석한테만 화가 나고 서러운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모든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터져버린 것이다.


'다 니들 맘대로 지! 다!'



이후 몇 번 집 앞에 찾아오기도 했고, 왜 맘대로 이별 통보하느냐고, 이별 통보는 내가 할 테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어림장 놓으며 괴롭혔다. 그 바보 같은 녀석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술값을 내라면 내고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몇 번 괴롭히다 헤어졌다. 괴롭힌 거 미안하다고 하니까 또 괜찮다고 한다.


'넌 나보다 괜찮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 내가 너무 못난 놈이라 미안.'



살다 보면 인생에서 전적으로 사랑받아 본 경험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결 같이 나를 바라보며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게 다 옳다고 맞다고 그렇다고 받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에게 그 녀석은 그런 녀석이었다. 싸울 때 그토록 끈질기고 잔인하다던 녀석이 나에게 보여 준 눈빛은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흐리멍덩했다. 한편으로는 고마운 녀석이다. 어쩌면 그 시절 그때 만나서 헤어졌기 때문에 고맙게 느껴지겠지. 함께하는 삶이 길었다면 우린 시궁창이었을지도 몰라.



처음 쓰는 일기에 그 녀석 이야기를 담게 된 배경이 있다.

좋은 이별이라는 것은 없다지만 나에게 그 녀석과의 이별은 좋은 이별이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싶었다.

서로에게 잠시 머물러야 될 뿐, 길게 가기에는 불행이 예고되는 만남이 있다. 그때에는 유종의 미를 남기고 잘 헤어지는 것이 각자에게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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