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 박힌 감정, 기억을 다시 꿰매는 리듬의 재구성
사람은 종종 기억을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기억은 단지 과거에 속해 있지 않다. 기억은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오늘의 감정으로 다시 나타난다.
기억은 시간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기억은 감정을 따라 반응한다.
이 회차는 '일기'라는 장치를 중심으로 기억과 감정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그 기억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감정 리듬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탐색한다.
사람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할 때 그 사건보다 그때 느낀 감정을 더 생생히 떠올린다. 기억은 논리적 사건의 흐름이 아니라 감정의 흔적, 감정의 농도, 감정의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은 10년이 지나도 생생하고, 어떤 일은 지난달 일이지만 이미 흐릿하다.
이것은 기억이 시간에 의해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의미에 의해 정렬된다는 심리적 원리 때문이다.
심리학자 댄 시걸(Dan Siegel)은 이러한 기억의 정서적 구조를 “감정적으로 조직된 자기 기억(emotionally organized autobiographical memory)”이라 불렀다. 즉,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이 ‘나에게 어떤 감정으로 각인되었는가’이다.
일기는 감정이 시간 위에 눌러쓴 흔적이다. 그 일기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감정이 다시 교차되는 작업이다.
"그때 왜 나는 그렇게 느꼈을까?"
"지금 내가 다시 그 글을 읽으니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가?"
"그 감정은 지금의 내가 감당 가능한가?"
이 질문들은 기억을 재배열하고, 감정 리듬을 다시 조율하는 심리적 과정이다.
30대 여성 F는 고등학생 때의 일기를 다시 꺼내 읽은 경험을 나눴다.
“기억나는 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외로웠더라고요. 제가 적은 문장 중에 ‘오늘은 하루종일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라는 게 있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어요. 왜 그 문장을 보고 그렇게 울었는지는... 아직도 설명은 안 돼요. 그런데…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녀는 그 당시의 기억을 ‘그저 조용한 아이였다’고만 말했었다. 그러나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말하지 못했던 감정, 표현되지 않았던 외로움, 기억에서 지워졌던 감정의 결을 다시 만난 것이다.
그 만남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화 과정이었다.
융 심리학에서는 기억을 ‘재해석의 도구’이자 무의식이 의식에 보내는 상징적 회로로 본다.
꿈이나 일기 같은 무의식적 산물은 과거의 감정 상태를 현재의 자아가 새로운 시점에서 통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융은 말한다: “기억은 단지 과거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자기(Self)와 연결될 수 있도록 무의식이 건네는 상징적 지문이다.”
기억을 다시 읽는 일은 단순히 ‘아 그랬지’가 아니라 ‘그 감정을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면 통합의 과정이다.
기억은 희미해질 수 있지만 기록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기, 편지, 메모, 문자, 녹음 파일... 이런 사적인 기록들은 지금은 ‘이야기되지 않은 감정’이지만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그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감정은 기록될 때 당시에는 감당되지 못했던 정서를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리듬으로 전환시킨다.
기억을 다시 본다는 것은 기억을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기억의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감정 리듬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감당할 수 있는 감정 리듬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너무 무거워서 다루지 못했던 감정이 지금은 ‘이야기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고’, ‘감싸질 수 있다면’ 그 감정은 재배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