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감정 리듬 속 자기의 중첩과 통합
과거는 지나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속의 과거는 지나가지 않고 머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른 시공간에 살지만, 하나의 자아 안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이번 회차는 감정의 리듬 속에서 ‘기억 속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교차되고 통합되는지를 다룬다. 감정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으며, 기억은 감정의 주파수에 따라 불쑥 되살아난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감정의 곡선 위에서 움직인다.
시간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개인이 경험하는 시간에는 다섯 가지 심리적 시간 프레임이 있다고 설명한다:
과거-부정적
과거-긍정적
현재-쾌락 중심
현재-운명론적
미래 중심
이 프레임에 따라, 같은 사건이라도 기억의 의미와 정서적 잔상이 달라진다.
기억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 기억이 현재의 정서에 개입하면 과거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과 연결된다.
이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감정의 밀도가 기억을 호출하는 방식이다.
30대 남성 G는 중학교 시절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한 기억이 있다. 그는 이 경험을 “뭐 다들 한 번쯤 그런 거 겪지”라고 말하며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직장에서 자신의 의견이 반복적으로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그는 격렬한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고, 퇴근 후에도 몸이 떨리고 수면이 어려워졌다.
이 사건은 중학교 시절의 감정이 현재 상황과 **‘동일 주파수로 울림’**을 일으킨 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잊은 것이 아니라, 그 기억과 함께 있었던 감정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채 지금도 ‘그 시간’ 속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자 엔덜 툴빙(Endel Tulving)은 기억을 서술기억(declarative memory)과 일화기억(episodic memory)으로 구분했다.
서술기억은 단순한 사실이나 지식
일화기억은 감정이 동반된 자기경험
특히 일화기억은 정확한 날짜보다 감정적 맥락, 관계, 상처, 성취감 등을 통해 저장된다.
그래서 기억을 떠올릴 때 우리는 “몇 년도 몇 월”보다 “그때 너무 외로웠어”, “너무 창피했어” 같은 말부터 한다.
감정은 시간을 정의하는 기준이고, 기억은 그 감정의 잔향이 살아 있는 장소다.
융은 자아(Ego)가 경험하는 시간과 자기(Self)가 경험하는 시간은 다르다고 보았다.
자아는 선형적 시간—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선—을 따른다. 그러나 자기(Self)는 상징적 시간, 즉 ‘시간이 응축된 상태’로 경험을 저장하고 전달한다.
예를 들어 꿈, 상징, 반복되는 관계 패턴은 자기가 과거의 감정 에너지를 현재의 자아에게 상징적으로 전달하려는 통로다.
이 관점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감정 리듬 안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감정 리듬의 통합은 두 개의 시간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과거의 나:
“그때 나는 정말 무서웠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나는 말하지도 못했지.”
현재의 나:
“그 감정을 이해해. 그땐 정말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 내가 여기 있어.”
이러한 내적 대화는 시간이 지나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안전해져야 가능한 것이다.
시간은 감정을 구조화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감정의 리듬이 먼저 안정되지 않으면 과거의 기억은 계속 현재에 개입한다.
감정 리듬을 조율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시간 안에 다시 정렬하는 작업이다.
그동안 감정은 순간의 생존 반응이었다면, 통합 이후의 감정은 연결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슬픔은 단절된 장면이 아니라, 지금의 공감 능력의 기반이 되고 분노는 억압된 파편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기준점으로 작용하고수치심은 방해물이 아니라, 자기 성장을 추동하는 통찰의 출발점이 된다
이것이 두 개의 시간—기억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한 사람의 자아 안에서 감정 리듬으로 통합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