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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일어나지 않지만 흘러간다

회복은 고정된 상태가 아닌 감정의 흐름 속에 머무는 방식

by 석은별

‘치유되었다’는 말은 무언가가 완전히 회복되었고, 다시는 그 문제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의 치유는 한 번 일어나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치유는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 흐르고 재방문되며, 달라지는 감정 리듬 속에 존재하는 과정이다.

이번 회차는 “흘러간다”는 표현 속에 담긴 심리적 의미, 그리고 치유가 감정의 흐름으로 이해될 때 어떻게 자기 통합과 감정 회복이 가능해지는지를 탐색한다.


완치가 아닌 통합을 말해야 할 때

많은 내담자들이 말한다.
“이제는 다 나았어요.”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다시 감정이 요동친다.
“나 아직도 이렇다는 게 너무 속상해요.”

이 문장 안에는 ‘치유=사라짐’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러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은 흐를 뿐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더라도,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면 그것은 치유가 흘러간 증거다.


감정의 순환 구조: 파동으로 이해하는 치유

심리학자 로버트 플러칭(Robert Plutchik)은 감정을 단일한 선형 구조가 아닌 원형적인 파동으로 이해했다. 슬픔-분노-공포-기쁨은 명확히 구분된 것이 아니라 상황과 해석에 따라 순환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상처와 관련된 감정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삶의 흐름 안에서 주기적으로 다시 찾아온다.

이때 핵심은 같은 감정이 돌아왔을 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이 바로 감정 리듬 속 ‘치유의 흐름’이다.


사례: 반복되는 무력감 앞에서

50대 여성 H는 아버지의 폭력적 통제 아래서 자란 경험이 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스스로를 강인한 사람으로 훈련했고, 직장에서도 단호하고 책임감 있는 상사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조직에 들어간 후, 상사가 강한 톤으로 피드백을 주는 상황에서 심장이 뛰고, 말문이 막히며,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말했다.
“이제 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나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왜 아직도 이러는 걸까요?”

그러나 상담을 통해 그녀는 이 감정이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자기 안의 어린 자아를 달래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자기를 비난하지 않고 감정을 ‘그냥 두는 법’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달라졌다는 걸, 같은 감정 안에서도 이제는 알 수 있어요.”


분석심리학 관점: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징화된다

융은 ‘치유’라는 개념을 상처(wound)의 제거가 아닌, 그 상처가 자기(Self)의 일부로 상징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치유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상징으로 전환하고, 자기 이야기의 일부로 통합하는 작업이다.

그 상징은 꿈이 될 수도 있고, 이미지, 언어, 반복적인 행동, 혹은 창조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이 더 이상 낯선 파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자리를 잡은 하나의 리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흘러간다는 것: 자기를 재구성하는 리듬

치유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파도 자기 자신을 놓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변화로 나타난다:

감정이 다시 찾아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인식한다.

고통 속에서 “왜 또 이래?”가 아니라 “지금 그렇구나”라고 말할 수 있다.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같은 상황에서 감정은 반복되지만, 반응은 더 이상 같지 않다.

이 변화는 빠르지 않다. 그러나 감정은 흐르고, 그 흐름을 따라가는 자기 또한 조금씩 다른 존재로 변화한다.


감정 리듬의 핵심은 ‘완결’이 아니라 ‘관계’다

치유가 감정의 완결로 이해될 때 사람은 자신에게 실망하게 된다. 왜 또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왜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는지를 자책하게 된다.

하지만 감정은 해결되지 않아도, 그 감정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예전엔 회피했던 감정과 지금은 대화할 수 있다면

예전엔 불편했던 감정과 지금은 함께 머물 수 있다면

예전엔 두려웠던 감정과 지금은 경청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완결’이 아닌 관계의 전환이며, 치유의 또 다른 방식이다.




치유는 고정된 완치가 아니라 감정과 상처가 흐르도록 두는 내면의 유연성이다.

감정은 파동처럼 순환하며 반복되며, 치유는 그 반복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타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치유를 상처의 제거가 아닌, 상징화와 통합으로 본다.

같은 감정이 다시 돌아와도, 내가 그 감정과 맺는 관계가 달라졌다면 그것이 곧 회복의 징표다.

치유는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흘러간다는 감정 리듬 안에서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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