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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은의 리뷰닷 Jan 06. 2024

플랫폼이 궁금해서 집어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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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에 아들과 여행을 갔다가 작은 책방에 들렸습니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 비교적 작은 판형의 책들을 보았는데 '시집일까?' 했더니 잡지였습니다. 민음사에서 나오는 '인문잡지 한편'이었습니다. 격 월로 묶여 나온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잡지, 잡지라니. 그러고 보니 제가 종이신문을 보지 않게 된 것도 벌써 수년이 지났더라고요. 잡지는 더하고요. 매주 기다리던 씨네 21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사 모으던 리뷰라는 계간지가 생각납니다. 여러 권 뽑아 들었다가 집에 쌓여있는 책들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플랫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딱 한 권만 집었습니다.



 제 브런치를 구독하시는 분은 알고 계시겠지만 최근에 썼던 SF소설에 회수되지 않은 떡밥이 있었고 그게 바로 '플랫폼'이었기 때문입니다. (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번주에는 토요일의 SF를 쉬어갑니다. 다른 SF 소설 하나를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 진도가 한 회를 내놓기까지 못 갔습니다. ) 플랫폼이란 키워드로 인문잡지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예상할 수 있었던 글도 있었습니다. <독점으로 향하는 급행열차>와 <알고리즘을 대하는 자세>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최근 한 5년 정도 미디어 쪽 일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묶어진 다른 글들을 보고는 인문학 서적 편집자의 신선한 생각을 칭찬해주고 싶었습니다. 택배문제, 보행보조 외골격 로봇, 플랫폼으로 변화되는 세계와 주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 AI와 창작자의 권리, 체제 밖에서 하는 비평 작업의 의미, 한국 시를 여러 종류의 번역으로 공유한 경험에 대한 서술, 시민단체 활동가의 자기비판적 고백, 히잡에 저항하는 이란 여성들이 어떻게 인스타그램을 이용했는지 등등 굉장히 너른 분야의 이야기들이 '플랫폼'이라는 실에 꿰어서 보배가 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제 사고가 너무 딱딱한 틀에 갇혀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정관념이라고도 하죠. 예를 들어 언뜻 생각하면 하반신 마비가 온 장애인에게 보행을 보조하는 외골격 로봇은 축복일 것 같은데 장애인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단 거였습니다.


"로봇은 장애인의 취약한 경제적 상황에 비해 너무 비싸고, 밖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으며, 대소변 관리와 통증 완화 등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에서 로봇을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첨단 기기의 의학적 효과가 불명확함에도 비장애중심적인 사회의 선호에 따라 걷도록 요구받는 피해자였다."  강미량, <걷는 로봇과 타는 사람> [한편 11호] p.43

  번역은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도 달리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피아니스트에게 '눈앞에 있는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를 뿐인데 그게 어떻게 예술이냐'라고 묻지 않는다. 뮤지션의 해석이 다른 연주를 만들어 낸다는 걸 이해하기 때문이다. 번역가가 누구인지는 번역문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번역은 정치적인 행위이며,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형태의 예술이다."
문호영, <번역을 교환하는 놀이터> [한편 11호] p.157


  그리고 요즘 소설에 대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지점과 약간 맞닿아 있는 내용도 발견했습니다. 소설가 엘레나 페란테가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랍니다.


"나는 읽히기 위해 출판을 한다. 그것이 내가 출판에 매료되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페이지를 최대한 밀도 높고 최대한 넘기기 쉽게 만든다. 그러나 일단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은 후에는 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갈 권리가 있다고 본다. 독자를 소비자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독자는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의 취향을 맞춰 주는 문학은 저하된 문학이다. 내 목표는 평소와 같은 기대를 낙담시키고 새로운 기대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문호영, <번역을 교환하는 놀이터> [한편 11호] p.161


  <잃어버린 시민을 찾아서>는 엮인 여러 편의 글들 가운데 가장 마음이 답답해지는 글이었습니다. 12년 차 상근 활동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자는 이른바 시민단체들이 여러 겹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시민들과의 접점을 잃고 있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언급하지만 소셜미디어의 부상으로 완전히 달라진 뉴스(콘텐츠) 유통 방식도 거론합니다.


"다른 활동가들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홍보 방법에 무엇이 있는지, 요새 반응이 좋은 뉴미디어 콘텐츠가 무엇인지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시민 참여를 높이기 위해 새로 배워야 할 것은 왜 이렇게 많은지 가끔 활동가의 주요 직무는 마케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김예찬, <잃어버린 시민을 찾아서> [한편 11호] p.181 


  그런데 엉뚱하게, 위에 인용한 두 대목을 읽으면서 영화 <서울의 봄>이 생각났습니다. 저도 며칠 전에 보고 왔거든요.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노장(김성수 감독)의 솜씨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몇 가지 질문도 떠올랐습니다. 우선, <서울의 봄>을 받아들이는 MZ의 방식, 그들이 플랫폼에서 한 놀이 같은 것들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과연 이 정도의 성적을 냈을까? 두 번째, 하나의 동일한 경험(놀랍게도 옛날에는 대박 드라마는 시청률이 60%는 금방 넘었고 메인 뉴스 시청률이 50% 가까이 되기도 했습니다)이 아니라, 파편화된 경험(OTT는 물론이고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 유튜브, 소셜미디어 등등)을 하는 지금 세상에서 영화는 하나 남은 진정한 매스미디어인 걸까?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습니다. 뭐라도 하나 쓸모 있는 대목을 발견하셨길 기대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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