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sdot | books
1996년 초였다. 살던 동네에서 인사성 밝기로 유명하던 젊은이 L은 혹독한 선배들의 가르침 덕분에 머리가 희끗한 형사반장을 '형님'이라 부르며 거리낌 없이 반말을 내뱉는 경찰기자가 되어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인 그때는 기자들이 경찰서를 제집 안방 드나들듯 하고 B4 크기 검은색 표지에 철끈으로 묶인 '당직사건 기록부'를 제 공책인양 맘대로 넘겨보던 때였다. '경찰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시민들을 대신해 기자가 그렇게 감시견 노릇을 해야 만연한 비리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사이카를 탄 교통경찰을 몰래 따라가 돈을 받는 현장을 포착하고 벗긴 부츠 안에서 배춧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 찍어 '카메라 출동'이라는 타이틀로 방송에 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침 보고를 마치고 아직 수습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L이 주 근거지로 삼고 있던 J경찰서 형사계에 들어갔다. 당직을 섰던 형사 1반이 퇴근을 하고 자리를 비웠어야 하는 시간인데 어찌 된 일인지 반장이 컴퓨터 앞에서 뭘 토닥거리고 있었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아직까지 퇴근도 안 하고." 그런데 형사 반장 표정이 썩 좋지가 않았다. 뭔가 감이 오는 상황이었다. L은 순식간에 형사 반장 자리로 접근해 모니터를 훔쳐봤다. 제목과 발생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변사 사건 발생 보고서였고 발생 시간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L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발생이 오늘 새벽이네, 따끈따끈한 사건이네!"
그런데 그 순간 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눈동자가 한쪽으로 움직였다. 그 특이한 반응에 L은 그제야 주변 상황이 보였다. 한 40대 남자가 형사 반장 옆, 그러니까 L의 앞에 앉아있었고 그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짓으로 나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몸의 통제력을 그에게 빼앗겼다는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형사계 밖으로 끌려나갔다. 형사 반장을 흘끗 바라봤던 것 같은데 그는 L을 외면하며 눈길을 주지 않았다.
J경찰서 정문 앞이었다. 대로변이었고, 멀쩡한 대낮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L의 뺨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L은 아무 말하지 못하고 그냥 매를 맞았다. 군대에서 선임들에게 맞을 때처럼 이빨을 꽉 다물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맞았다. 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그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그는 한참을 그렇게 L을 때리고는 다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변사자의 동생이었다. L은 그날 하루종일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퍼렇게 멍이 든 뺨 때문이 아니었다. 예의 바르고 정의감 넘치는 한 청년은 어쩌다 한 사람의 죽음을 '따끈따끈한 사건'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런 인간이 되었을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자살 사건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는 토막살인 사건의 용의자였다. 형사들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유서를 남기고 죽음을 택한 거였다. 왜? 그의 부인이 살인의 공범이었고 L의 뺨을 때린 그의 남동생도 시체 유기를 도왔다. 세 명 모두 전과가 없었다. 자살한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동생까지 살인자, 살인자의 공범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살인은 우발적인 이유로 벌어졌다. 피해자는 밀린 보험금을 독촉하려고 그의 집에 찾아왔다가 언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게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한영 피살사건, 아가동산 사건 등 이런저런 취재 현장에 나가봤었지만 이 사건이 경찰기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도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감히 그 사건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란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그 어떤 변화도 시작되지 않을뿐더러 기대할 수도 없다.
<형사 박미옥>을 읽으면서 아주 오래전 경찰기자 당시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많이 놀랐다. 너무 오래전에 경찰기자 생활을 해서 이겠지만, 나는 강력반은 물론 형사계에서도 여자 형사를 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거친 현장에 거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저렇게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온 여자 강력반장이 있었다니. 그런데 내가 더 놀란 건 따로 있었다. 책 안에 담겨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 그리고 문학작품 뺨치게 뛰어난 문장실력 때문이었다.
거친 현장에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힌 삶에 대한 성찰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예를 들어 부검 현장을 다녀와서 "오직 지금만이 나의 것이구나. 어제의 나, 내일의 나는 물론 오늘, 잠시 후의 나조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진짜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여형사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사건에 대한 겸손 이전에 사람에 대한 겸허한 한마음이 사건을 푸는 가장 큰 열쇠라고 봅니다. 형사 사건 현장은 사람의 감정이 불러일으킨 현장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포용력을 가지고 낮은 자세로 보아야 범인의 감정이 제대로 보이고, 결국 피해자도 제대로 도울 수 있습니다." (p.131)
형사는 어떤 사람일까? 그들 역시 두렵고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도 이 책을 보면 실감 나게 다가온다. "두려움은 항상 억눌려 있다가 범인을 체포한 후 자동차 엑셀 위에서 터져 나왔다. 달달 떨고 있는 발을 보면서 나의 두려움과 긴장을 을인정했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평정심을 찾은 후에야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다." (p.182)
박미옥 형사는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형사의 일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당장 '그게 뭔 소리냐'라고 반박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책에 소개된 사연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절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긍이 된다. 때로는 범인에게 그런 마음까지 가져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책을 덮을 때쯤에는 수긍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절도를 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이 있었던데, 진술을 거부하는 그의 거친 손을 박미옥 형사가 잡아준 뒤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 절도 건에 대한 진술조서는 잘 받았는데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박 형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즉 사랑얘기에 대해선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상한 낌새를 챈 형사들은 DNA를 채취했고 그가 절도 외에도 강간을 저질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도 박미옥은 이렇게 말한다.
"입과 마음에 철문을 쳤던 그는 자신의 손등을 읽어준 사람에게 본인을 표현해 주었다. 다만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과 결점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난 그 순간 결국 형사로서의 근성만 발동시켰다. 그와 마주 앉아 당신의 손을 내가 잡아도 되느냐고, 세상은 이 손처럼 따뜻하고 부드럽다고 말해놓고도 나는 결국 그의 솔직한 모습을 통해 사건만 해결했다." (p.208)
지금 내가 기자가 아니라도 기자였던 내 과거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내 과거의 직업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박미옥 형사의 지적이 날카로운 칼처럼 섬뜩하다. "어떤 자들은 꼭 자기 사고만큼의 언어로 한 사람의 생을, 나아가 세상을 더럽힌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p.267) 바로 그 언어 때문에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형사 박미옥은 지금 제주에서 이름 없는 책방을 열고 있다. 나는 조만간 그곳에 찾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