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여행지를 떠나 생각했던 것들
며칠을 굶은 탁발승이 나무 숟가락으로 밥을 입에 퍼넣듯이, 허겁지겁 둘러보았던 목포 원도심. 짧고 아쉬운 시간이었다. 놓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고양이를 만났던 카페에 우연히 한 번 더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듣지 못했을 얘기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일로 나는 적산가옥의 2층을 떠받치는 나무 보를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사장님과 77계단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혹시 77계단 아세요? 옛날 일본 신사로 가던 계단의 흔적이라고 하던데요."
"아, 여기서 멀지 않아요. 지금은 신사가 없는데, 옛날엔 거기가 섬이었고 신사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 집 리모델링하면서 그런 거 봤어요."
"집 안에서요?"
"네, 집 벽에 그런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없애고 거길 수납공간으로 개조했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식 발음으로 '불단', 일본식으로는 부쓰단(仏壇)을 말하는 거였다. 부쓰단은 일본의 절과 가정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조그만 사당이다. 카페 사장님은 리모델링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면서 건물을 산 돈만큼이나 많은 돈이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러다 문득 천장을 가로지르는 나무 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2층 지붕의 조형적 구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졌지만 1층 천장, 그러니까 2층 바닥을 구성하는 목재에 대해선 눈을 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저 나무요. 페인트 벗겨내고 옻칠을 두 번이나 올린 거예요."
왜 그렇게 했지?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가 보통 사는 집은 철골이나 시멘트 콘크리트가 층과 층 사이를 지탱하고 있는데 그런 건축재에 정성과 노력, 돈을 쏟아붓지 않는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나 보다. 사장님은 설명을 좀 더 이어갔다.
"적송이 이 정도 폭으로, 이렇게 곧게 나오려면 나무의 나이가 굉장히 오래되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거의 궁궐의 기둥으로 쓸 만큼 귀한 적송을 베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휘잉 휘잉 소리를 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나무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식민지 조선 일인들이 머물던 이 거리에 자리 잡은 그냥 보통의 상가주택에, 세월을 견디며 이 땅을 지켜왔던 조선의 적송이 동원되었구나. 직접 벤 것이 아니라면 필시 그것은 일제가 조선의 기존 건축물을 해체하고 뽑아낸 잔해일 것이다. 그제야 다시 보였다. 적산가옥의 실체가.
"목포역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호남철도는 논산-호남-나주평야와 목포항을 연결하는 간선철도로서 농산물의 수송 및 주변 개발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목포역의 시작에는 제국주의의 침탈 야욕이 담겨있는 것이다." <목포> 최성환 p.39
카페에서 읽었던 최성환의 책에서 '근대의 건물이 헐리는 것을 막아냈다'는 대목을 언뜻 봤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의 아픈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건물을 지켜낸다는 것은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일까?
카페 사장님은 창을 향한 자리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뭔가 일을 하고 있었다. 내려온 지 7년 정도 지났다는 이 분은 이곳 목포 원도심에서, 적산가옥을 고쳐 살고 있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건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할 얘기지 고작 커피 한 잔을 마신 뜨내기 관광객이 단도직입적으로 던질 질문은 아니었다. 그때 한 손님이 들어와 커피를 주문했다. 사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회전판이 달린 그라인더를 돌려 원두를 갈았다. 21세기 초에 만들어진 듯한, 빨간색 소화전에 마차의 바퀴를 단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살짝 눈치를 보고는 '이곳의 삶이 어떠시냐'라고 말을 건넸다. '이곳에 사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보다는 답하기 쉬울 것 같았다.
"글쎄요. 사람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내려왔던 사람들 가운데는 2~3년 만에 못살겠다고 올라간 경우도 있어요. 저는 내 안으로 침잠하는 스타일이라 이곳에 잘 맞나 봐요. 괜찮은 것 같아요."
어둠이 내렸다. 내가 주차를 했던 오거리 주변, 불이 꺼진 가게가 많았다. 그 쓸쓸함을 벌충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화려한 거리 조명이 불을 밝혔다. 목포에서 유명한 빵집들이 그 오거리 주변에 모여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작고 예쁜 서점도 있다! 내가 굳이 느낌표를 단 이유가 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데 (책을 사기만 하고 읽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떤 동네에서 서점을 만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느낌이 범상치 않았다. 책을 파는 곳이지만 넓지 않은 공간을 구획하고 책과 함께 색을 배치한 것이 나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참지 못하고 나는 책을 여러 권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사장님 앞에 섰다. 뭔가 비범한 느낌이 뿜어져 나왔다. 서점 안에는 컴퓨터가 두 대 있었는데 모두 베어 먹은 사과 로고가 붙어있었다. 난 직감적으로 여기 사장님이 미술과 관련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저는 그래픽 디자인을 오래 했어요. 귀농을 하고 싶었지만,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을 하다가 이곳에 왔어요."
사실 나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 귀농은 못하겠으니 지역의 소도시의 삶은 어떨까 생각을 했었고, KTX역과 예부터 이어져온 삶의 터전이 완전히 분리되어있지 않은 고장을 알아봤었다. 곡성, 순천, 목포 같은 곳 말이다. 사실 적산가옥을 찾아갔던 것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로망'일 뿐이었다. 실행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사장님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다 간파했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서울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 게 먼저입니다. 모든 건 그 뒤에 있는 일이에요. 그 결단을 먼저 하지 않으면 핑계가 많아지죠."
그렇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결정은 어떤 절실함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곳을 관광지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입장은 어떨까? 무엇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것일까? 그만한 매력이 있는 것일까?
목포에서 서울로 바로 가는 건 너무 멀어서 나는 전주를 경유했다. 전주에서 약 두 시간 정도 한옥마을을 둘러봤다.
날씨 탓이었을까. 전주 한옥마을의 첫인상은 봄날의 꽃처럼 화사했다. 목포역 근처에서 검정 상하의를 입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봤다면, 전주 한옥마을의 초입에는 곧 피어날 진달래 색을 꼭 닮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젊음들이 넘쳐났다. 관광객이 있으니까 그들을 상대로 한 콘텐츠가 유통된다. 가죽 공예를 하는 사장님은 1층에서는 활쏘기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2층에 올라갔다가 사장님의 유치원생 아들과 18년 살았다는 고양이를 먼저 만났다.
한옥은 우리의 것, 우리 고유의 건축양식이다. 그러니까 한옥들이 즐비한 한옥마을에선 한복을 빌려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목포라면?
한옥마을엔 한옥이 아닌 한옥도 많다. 기와지붕을 올렸다고 한옥은 아니니까.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떤 통일성을 가진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기와지붕만큼 쉬운 요소도 없다. 그래서일까? 전주는 고속도로 터미널도, KTX역도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나다 보니 심지어 다세대주택 지붕에도 기와지붕 모양을 흉내 낸 덮개가 씌워져 있다.
차를 몰고 올라오는 길에 곰곰이 목포를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쥐어짜봐도 상상력이 부족한 나에겐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을 단번에 살려낼 대박 아이디어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다크투어리즘'(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커다란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고 체험하면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으로 한계 지워진다면, 아마도 목포 원도심을 살려내는 데는 역부족일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슬픈 일이 많은 일상인데, 여행지에 와서까지 온종일 비극을 곱씹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목포엔 콘텐츠가 필요하다. 비극적인 과거를 연결시키면서도 밝게 웃으며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