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한 이태리 20일 #12 피렌체에서 주소 찾기
르네상스·피렌체·메디치
베니스에서 피렌체로 열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동행인에게 잔뜩 겁을 줬다. 피렌체에선 아침 일찍 깨워도 꼭 일어나야 하고 밤에 나가자고 해도 귀찮다 말고 따라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여행의 참 의미가 목표보다 그 과정에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서 인류 문명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변화의 흔적들을 살펴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르네상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 프랑스어로 Renaissance, 이탈리아어로 Rinascimento로 표기되는 르네상스는 14세기~ 16세기 유럽 문명사에서 일어났던 문예부흥운동을 말한다. ) 나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원근법의 소실점 구도, 인체의 해부, 다비드, 그리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나타나게 했던 메디치 가문이었다.
이런 거창한 생각을 하고 기획한 세 번째 목적지 피렌체. 하지만 막상 산타마리아노벨라(Santa Maria Novella)역에 내렸을 때 다른 생각은 없었다. Airbnb로 예약한 숙소에 어떻게 하면 잘 찾아갈 것인가, 그리고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주인장과 어떻게 접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역은 로마의 테르미니보다 분위기가 훨씬 좋다. 덜 붐비고 덜 불안해 보인다. 우리는 구글 지도를 보면서 '숙소로 예상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숙소로 예상되는 지점'에 도착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기 건너편의 사람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하지 않는가? 그 사람은 주인장이 아니라 주인장의 아들이었다.
나는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그에게 물어봤다. "도대체 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해당되는 번지수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전화기 건너편의 주인장 아들이 껄껄 웃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렌체의 번지수는 건물에 적혀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붉은색으로 표시된 숫자가 있고, 검은색으로 표시된 숫자가 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은 일반 가정집이 아니고 업소의 주소이다. 결국 한 건물에 같은 번호가 두 개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번호는 건너뛰고 없을 수도 있다. 유명 호텔에서 묵을 예정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Airbnb 같은 시설을 이용하려면 꼭 알아둬야 할 팁이다.
전화통화가 끝난 뒤 우리가 머물 집의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집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시간에 맞춰 주인장이 오셨다. 머리가 약간 벗어지고 턱수염이 덥수룩한,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 같은 넉넉한 인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페토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이 분은 우리를 이끌고 건물 2층에 있는 집으로 데려갔다. 좁은 복도가 침실 겸 방과 부엌 겸 거실을 연결하는 중간을 밟힌 디귿자 같이 생긴 구조였다. '그런데 어떻게 설명을 들을 것인가. 영어를 모르시는 이 분한테.' 막상 올라오긴 했어도 나는 아직 안심이 되질 않았다.
그때였다. 이 주인장 할아버지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듯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더니 구글 번역기를 실행시키고 나서는 휴대폰에 대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태리 말로 이야기를 했다. 아주 아주 큰 소리로. 그랬더니 구글 번역기에서는 그 이태리어를 영어로 번역한 텍스트가 나왔다. 그걸 나에게 보여줬다.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알겠냐고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가리켰다.
침구는 어떻게 쓰면 되고, 가스레인지는 어떻게 작동시키고, 쓰레기는 어떻게 처리하고, 케이블 티브이는 어떻게 보면 되고 이런 자잘한 안내사항들을 다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줬다. 시간이 약간 걸리긴 했지만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놀라웠다. 영화 <설국열차>가 생각났다. 이제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우리는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스쳐 지나갔다.
피렌체는 아담한 도시였다. 그리고 우리 숙소는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주변에 편의시설이 많이 있었다. 심지어 반경 50미터 내에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이 구멍가에 에는 쌀도 팔고 한국 라면도 팔았다.
동행인은 숙소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당연히 나갈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주변 거리를 감상했다.
연인과 함께였다면 달콤한 이야깃거리를 만들 아기자기한 풍경이었다.
#이태리여행_맛보기 #피렌체 #길을찾는특별한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