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한 이태리 20일 #15 메디치가의 집무실 우피치
Missing Link
남자아이, 그것도 자기 세계를 중심으로 이제 막 성벽을 세우기 시작하는 중학생과 함께 여행을 하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나의 동행인은 이른바 '중2병'으로 불리는 중병을 앓고 있지 않은, 매우 선하디 선한 성품의 소유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을 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즐겁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악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장 신경을 썼던 건 '일정을 강요하지 않기'였다. 그래서 대개의 날들은 아침 6시부터 정오까지 숙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마음을 다스렸다. 맘 같아서야 새벽밥을 챙겨 먹고 일찍 집을 나서 쏘다녀야 마땅하지만, 동행인은 여유로운 아침, 포근한 게으름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덕에 여행지 현지에서 여행기를 올리는 '신공'이 가능했다. 그 스케치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0일 일정 가운데 예외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우피치 미술관'이었고, 다른 한 번은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였다. 바티칸의 경우 '투어'를 예약했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었다. 예약을 한 것이니 아침에 깨우기도 쉽고, '가이드'가 해설을 할 터이니 나는 예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그런데 '우피치'는 예약한 투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었다. 나름 여행 책을 들여다보고 외워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마음을 비웠다.
생물학에서 '미싱 링크(missing link)'라는 표현이 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생물종을 뜻한다. 나는 동행인에게 '우피치 미술관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이어주는 미싱 링크 같은 곳'이라고 설명하면서 한 번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펴보라고 얘기해줬다.
우피치(Uffizi)는 '집무실'(Office)을 뜻하는 말로 1581년 완공된 이 건물은 원래 사법기관 관료들의 관청사 용도로 지어졌다. 그 강력했던 메디치 가문도 언제까지나 권력을 붙을고 있을 순 없었겠지만, 마지막 후손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1667~1743)의 결단으로 예술작품은 흩어지지 않고 피렌체에 남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피렌체 외부로 유출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조건을 달고 소유하고 있던 미술작품들을 모두 통치권자에게 기증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사실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일이다.
나 스스로도 교과서에 실렸던 보티첼리 같은 거장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게 대단했지만, 진열된 그림들을 시대순으로 관찰하면서 정말로 시대조류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는데 미술사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내가 우피치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한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내 맘에 다가온 그림들을 사진에 담았고, 이제야 정리를 시도한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우피치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과 <서양미술사/김성진>, <위키피디아> 그리고 Google Arts&Culture 사이트 등을 참조했다. 특히 Google Arts&Culture는 고해상도 카메라로 미술작품들을 촬영해 아카이빙하는 프로젝트인데, 박물관에 가서 직접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한 그림을 볼 수 있어서 깜짝 놀랐다.
중세 시대에는 개인의 초상화가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그래서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작품이다. 마치 이집트의 벽화처럼 옆얼굴을 그려낸 이 초상화에는 몇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선 오른쪽 남자, 공작 몬테펠트로는 전쟁 중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보이는 쪽은 시력이 온전한 눈이다. 왼쪽 여성은 얼굴색이 너무나 창백하다. 모델은 아내 바티스타 데 스포르차인데, 사실 그림이 그려질 당시 이 여인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림 속 남편은 이미 사망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그림만 보고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다른 그림들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미술사에 문외한인 내가 알아본 그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긴 사람이었다. 아래 링크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1475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천사 부분은 당시 그의 제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거장의 손길이 느껴지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직 베로키오의 공방에 머물고 있던 당시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의 주제, 등장인물의 복장 등은 특정한 양식을 중시하는 것 같은데 건물이나 사람을 관찰하면 느낌이 좀 다르다. 화면은 분명히 저 멀리 원경의 소실점으로부터 뻗어 나온 직선을 의식하듯 그려졌다.
이 그림은 볼 땐 몰랐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상당히 사연이 많은 그림이었다. 원래 우피치 미술관에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 그림 가운데 왼쪽 것만 전시되고 있다가, 다른 곳에 보관되고 있던 나머지 두 조각이 합쳐져 전시되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관련한 기사가 걸린다. 안타깝게도 이태리어로 된 것이 유일했지만,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았다. 2015년 11월의 글이니 그리 오래된 사연은 아닌 듯싶다. 이 글에 따르면 우피치 미술관에는 이런 형태로 15년간 전시되다가 그 뒤에는 Castello Sforzesco로 전시 장소를 옮긴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 안토넬로 다메시나(1430~1479)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 시칠리아 섬 출신이지만 남 이탈리아와 밀라노를 거쳐 1475년 경 베네치아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내가 이 그림을 사진에 담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이 그림은 중세시대의 그림처럼 형식미를 강조하는데 반해 인물에 대한 묘사에서는 매우 입체적이다. 여인의 얼굴을 보라. 이게 15세기의 그림으로 보이는지.
너무나 유명한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이다. 가만히 보면 보티첼리의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라파엘로와는 좀 달라 보인다. 가운데 서 있는 비너스를 보라. 어깨 선이 상당히 쳐져있는데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한 포즈다. 보티첼리는 신체의 묘사에 있어서 해부학에 기반한 정확성을 중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소실점으로 향하는 입체적인 구도는 보이긴 하는데 어쩐지 평면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시 '르네상스'로 가는 과정이다.
이 잘 생긴 청년의 얼굴을 보라. 요즘 세상에 데려와도 충분히 인기를 끌 미모다. 얼굴의 세부묘사나 머리카락의 묘사가 사실적이다. 이 그림을 그린 페루지노는 상업적으로는 매우 성공했지만, '자기복제'를 너무 많이 한 까닭에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서툴다"라고 비난했고, 이에 격분한 페루지노가 미켈란젤로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이 그림은 성모와 예수 등을 그린 큰 그림의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전반의 플로렌스 지방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을 마주했을 때 시대는 전혀 다르지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초상화인지 알 수 없으나, 여인의 표정과 눈빛은 묘한 비밀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라는 화가가 있었다. 이 화가는 목가적인 풍경 속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너스를 그렸다.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Sleeping Venus)이다.
베첼리오 티치아노는 이 그림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그런데 인물을 집 안으로 옮겨왔으며, 감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이 여인이 실존하는 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눈동자가 자신을 관찰하는 관객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여인의 몸매가 현대의 기준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조르조네의 비너스보다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왼편에 검은색 벽(커튼?)을 세워놓음으로써 시선을 여인의 상체에 집중하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이 티치아노의 그림은 이후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한 것 같다. 마네의 그림과도 비교해 보자.
이 그림은 '밤의 게라르도'라는 별명으로 불린 게라드 반 혼토르스트의 작품이다. 네덜란드 사람이라서 '헤라드 반 혼토르스트'라고 읽기도 하는가 보다. 이 작가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빛을 사용하는 기법이 아주 탁월하다.
이 그림의 제목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이다. 처음 이 그림을 보면 무슨 장면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게 되는데, 우피치에서도 그렇고 로마 바티칸에서도 그렇고 같은 주제를 담은 그림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카라바죠가 같은 그림을 그렸고, 후대에 클림트도 이 여인을 그림에 등장시켰다. 이 장면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기원전 2세기경 홀로페르네스를 대장으로 하는 앗시리아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베툴리아를 점령하고 근방의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젊고 아름다우며 신앙심이 깊던 유디트라는 여인은 남편이 죽어 상중에 있었는데, 아름답게 치장한 후 하녀를 데리고 적군의 기지로 들어갔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디트에게 반하여 저녁 만찬에 초대하였고, 유디트는 그녀를 탐하던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권하여 만취하게 한 후 그가 잠든 사이 목을 쳐버렸다.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음식 바구니에 넣고 하녀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와 그 목을 베툴리아 성벽에 매달았다. 다음날 그 장면을 본 앗시리아 군대는 서둘러 퇴각하였고 유디트는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는 서양미술사상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였다. 다음 글을 읽어보면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사실적인 표현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유디트'라는 같은 주제로 그린 다른 그림을 감상하려면 아래 링크를 보자.
이 그림은 "퐁텐블로 화파"의 그림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쌍둥이 그림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퐁텐블로 화파"가 워낙 이렇게 인간을 성의 없이 묘사하는 매너리즘의 화풍이라고는 하지만, 이 그림은 딱 보는 순간 수수께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여자가 함께 나체로 나타나고, 오른쪽의 여인은 엄지와 검지로 상대방의 손가락을 쥐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사인이 들어있는 것일까? 게다가 쌍둥이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 속 포즈는 더 이상하다.
학자들은 오른쪽 여인을 앙리 4세의 애첩 가브리엘 데스트레로 왼쪽 여인을 그녀의 자매로 추정할 뿐이다. 가브리엘 데스트레로는 앙리 4세의 아이를 가졌지만 아이를 낳기 전 죽었다. 이 죽음을 두고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뒷얘기들을 들으니 이 그림은 더 신비해 보인다.
참고로 여행안내책자엔 우피치미술관을 구경하려면 긴 줄을 서야 한다고 되어있었지만 사실과 달랐다. 비수기인 겨울이라서 그런지 오전 8시가 다 되어 도착했지만 별로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문을 여는 시간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미술관에서는 베키오 다리가 보인다. 베키오 다리는 원래 푸줏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만, 코시모 데 메디치가 보석 가계가 가득한 곳으로 바꿨다고 한다.
감상의 순서가 3층(이태리에서는 2층으로 부른다.) 먼저, 그리고 그다음 2층이다. 많이 촉박한 일정이 아니라면 중간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 잔(5유로)을 마시는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카페테리아에서 바라보는 피렌체 풍경, 그리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참 아름다웠다.
참고로 검색을 하면서 놀라운 사이트를 발견했다. 실제 미술관에서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구글의 사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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