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보는 전래동화 #04
“이제 와서 어미를 다그쳐본들 뭣하겠소? 어미도 지금 반성을 하고 있을 것이오.”
어머니는 할머니의 역정이 자신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막아준 할아버지가 지금은 고맙지도 않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고개를 숙일뿐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문을 지켜야 한다. 혼사로 복궐하는 것은 이제 물 건너갔지만 명예마저 더럽히면 우리 가문은 이대로 끝장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 하는 법.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이 매우 못마땅하다. 그래서 다시 야단을 치려한 것을 할아버지가 제지를 한다. 그리고는 모두 방으로 돌려보낸다.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 보거라.”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 인사를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간다. 모두 나간 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물어본다.
“아니, 영감. 조금 전에는 왜 말리셨소?”
“지금 저 아이들이 내 말의 의미를 몰라서 대답을 안 하는 것 같소?”
“그럼 영감은 저 아이들이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알다마다. 알지만 차마 지들 손으로 딸을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구려.”
“저런 것들이 어찌 우리 가문을 지킬꼬.”
할머니의 답답한 한숨에 할아버지도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무언가 결심한 듯 괜스레 치맛자락으로 몸을 감쌌다.
한편, 칠성을 짊어지고 나간 사내는 바로 뒷산이 아니라 일부러 조금 더 떨어진 산으로 칠성을 데리고 갔다. 인적이 드물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굴에 도착해서 칠성을 내려놓았다.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맥박이 뛰는 것을 보니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가지고 온 헝겊으로 상처부위를 닦아주고, 주위의 풀과 나무를 모아 동굴 안에 불도 지펴주었다. 그렇게 급한 것을 끝내고는 잠시 앉아 쉬어가기로 했다.
“에휴,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게 왜 아씨를 넘봐서.”
“아씨가 어릴 때부터 유독 칠성이한테 잘 해줬지 않은가? 뭐, 우리들한테도 다 잘해주기는 했지만.”
“아씨 같으신 분들만 있다면야 양반들을 정말 양반답게 모실 텐데.”
“내 말이 그 말일세. 이런 걸 보면 정말 우리 같은 종놈들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단 말여.”
“우리가 언제 사람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는가? 목숨도 우리 것이 아닌데.”
“칠성이야 우리가 아까 일부러 좀 살살 때려 이렇게 목숨이나마 부지한 건데 아씨는 어떻게 되는겨?”
“아마 내일 송장 하나 더 치우게 되겠지. 종놈 하고 놀아난 딸년을 주인마님이 가만히 두겠어?”
“설마 진짜 그렇게까지 할까?”
“자네는 아직도 주인마님을 모르는가? 가문의 명예를 얼마나 중히 여기시는 분인데. 그리고 아들도 아닌 딸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한다면 결과는 뻔한 거 아니겠어?”
“그래도 정 참판댁하고 혼담도 오가고 있다는데 송장 치우게는 안 하겠지.”
“아니, 내 생각은 그 반대일세. 혼담이 오가고 있으니 더더욱 입막음도 하고 명예를 지키는 고상한 가문 대접받고 싶어 할 걸세.”
“그럴까? 그나저나 칠성이는 살 수 있을까 몰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이니 나머지는 지 운명에 달려있는 게지.”
“그려, 우리 같은 종놈이 이제 뭘 더 해줄 수 있겠는가? 주인아씨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이리도 흉한 대접을 받는데, 우린 사람도 아닌 것이여.”
“도끼도 가져왔지? 혹시나 깨어나면 나무라도 해다 팔아서 먹고살아야 할 텐데.”
“우리도 너무 늦으면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니 어여 가세.”
사내들은 아직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칠성이의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주고는 다시 산을 내려갔다.
광에 갇혀있는 진아는 매타작을 당하는 칠성이를 생각하니 눈물부터 난다. 참 좋은 사내이고 잘 챙겨주어 마음이 갔을 뿐인데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전에 칠성이와 있을 때는 그냥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칠성이가 멍석말이까지 당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이제는 칠성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밤이 되었지만 배고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칠성이 걱정만 될 뿐이다. 울다 고개를 들어보니 작은 창 밖으로 둥근달이 보인다. 진아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창가로 가서 달에게 소원을 빈다.
“달님, 부디 칠성이를 돌봐주세요. 칠성이만 무사히 살 수 있다면 제 목숨도 아깝지 않사옵니다. 부디 칠성이를.”
그렇게 달에게 기도를 하고 다시 뒤로가 자리에 앉았다.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그저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을 뿐이다. 조용한 밤공기 사이로 풀벌레 소리만 느껴진다. 그런데 순간 바깥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리더니 창문 너머로 무언가 작은 물건 하나가 떨어졌다.